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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혼란 (13/94)


  • 13화. 혼란
    2023.06.13.


    늦은 밤, 칼리프는 팔짱을 끼고 앉은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석양이 지기 시작한 게 조금 전의 일인 것 같은데 어느덧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굳이 눈을 감지 않아도 온통 시커먼 어둠뿐이었다. 그런데도 칼리프는 눈을 뜨지 않았다.

    뜰 수 없었다.

    중천에 뜬 해가 지고 달이 뜨도록 이벨리아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니까.

    “……후우.”

    다부지게 맞닿아 있던 입술 사이로 농도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간신히 눈을 뜨자 곧장 하얗게 질린 이벨리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다시 한번 한숨을 끓게 했다.

    문득 저녁 내내 들었던 서러운 흐느낌이 떠올랐다.

    [흐윽, 오늘따라, 끄윽, 많이 힘들, 다고 하셨을 때, 끄윽, 어떻게든 쉬시게 했어야, 했는데, 흐윽.]

    울음에 녹아 있던 넋두리를 몇 번이고 반복하던 시녀는 실신 직전이 되어서야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이벨리아의 곁을 떠났다.

    고요는 순식간에 찾아왔다. 그제야 칼리프는 생각할 수 있었다.

    아, 그녀가 힘들어했구나. 오늘따라 많이 힘들었구나. 그런데도 황후의 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곳을 찾았던 거구나.

    시녀의 넋두리로 시작된 1차원적인 생각들이 한껏 경직된 머릿속에 차근차근 나열되었다.

    그렇게 도달한 결론은 스스로를 향한 비난이었다.

    “……도대체 나는 여기서 얼마나 더, 그대에게 나쁜 사람이어야 하는 거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밀려오는 회의감에 견딜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정한 말만 골라 내뱉었다. 그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빌어먹을 넷트 후작가의 영애에게 다정하게 굴었고,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언제나 핑계는 똑같았다. 아직은 그녀에게 정체를 들켜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그러나 그를 더 견딜 수 없게 하는 건, 쓰러진 이벨리아의 곁을 지킬 수 있는 게 칼리프 드윗이 아닌 리우리안 페트로프라는 거였다.

    칼리프는 잠들어 있는 이벨리아를 빤히 보았다. 핏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사람 같았다.

    그래서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 그녀가 깨어나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녀를 위해 살생도 개의치 않으며 리우리안이 되길 자처했는데. 그녀가 깨어나지 않으면, 그러면 난…….

    “이런, 칼리프……. 너답지 않은 표정이군.”

    무섭게 뒤엉켜 가는 생각 사이로 문득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펠릭스였다.

    이벨리아와 단둘이 남은 후부터 침실의 문은 열린 적이 없었는데, 어느 틈에 들어온 것일까.

    아, 그 같잖은 이능에 이런 능력도 포함되어 있는 건가.

    칼리프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헛웃음만 흘렸다.

    “최근 들어 마음을 쓴 일이 많아서 그런 걸 거야. 더군다나 불면도 심하다고 했잖아.”

    “……그래. 황궁의도 비슷한 말을 하더군. 불면이 오래 지속되어 기력이 쇠한 것 같다고.”

    “푹 쉬고 나면 괜찮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만 황태자궁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벌써 몇 시간째야. 끼니까지 거르고, 그러다 너까지…….”

    “그래서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다.”

    칼리프는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펠릭스의 말을 잘랐다.

    “이벨리아가 쓰러진 건, 정확히 따지자면 불면이 아니라 리우리안 페트로프 때문이지.”

    “……칼리프.”

    “웃기지 않은가? 궁 안 곳곳에서, 지켜보는 시선도 개의치 않은 채 쓰레기처럼 구는데, 그 누구도 리우리안 페트로프를 만류하지 않아.”

    “…….”

    “태자비를 버젓이 눈앞에 두고도 정부나 다름없는 영애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지.”

    넋두리 끝에 칼리프가 이를 사리물었다. 유리온실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전하!]

    [이런, 렐리. 달려오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것이, 뜻밖에 전하를 뵙게 된 것이 너무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렐리아 넷트의 모습이 방금 전 본 듯이 생생했다. 정확히는 부러 이벨리아의 어깨를 치던 모습이었다.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렐리아에게선 일말의 죄책감도,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개 영애 주제에 황태자비의 몸을 친 중죄를 저지르고도 말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단전에서부터 끓어올랐지만, 조금도 내색할 수 없었다. 그뿐일까. 다정한 척 렐리아를 응시하기까지 했다.

    칼리프는 망연히 고개를 떨구었다.

    렐리아 넷트는 제게 있어 끔찍한 여자였다. 하지만 이 순간 그 여자보다 더욱 끔찍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칼리프. 이건 리우리안의 삶일 뿐이야. 네가 죄책감을 가질 일이 아니라고.”

    “……과연 그럴까. 그 빌어먹을 삶을 이어 가고 있는 건 나인데 말이야.”

    “리우리안인 척하기 위한 거잖아. 그건 곧 너의 비를 위한 일이고.”

    “어쩌면 그것까지도 허울 좋은 핑계일지 모르지. 리우리안 페트로프인 척하는 게 그녀를 위한 거라고 하면서도 결국 그녀를 궁지로 내모는 건 리우리안인 척을 하는 나니까.”

    칼리프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이벨리아의 손끝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힘없이 놓인 손끝마저도 애처로웠다. 그래서 더 잡고 싶었다. 제 온기라도 나누며 생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참고 또 참으며 매정한 척하는 것뿐이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펠릭스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지었다. 그러곤 줄곧 기대고 있던 창가에서 벗어나 칼리프와 이벨리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 정말 결국엔 이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만드는군.”

    지척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칼리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무어라 말을 건넬 새도 없이 펠릭스가 이벨리아의 이마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칼리프는 본능이나 다름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펠릭스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적안을 빈틈없이 메웠다.

    펠릭스의 실루엣은 물론, 그의 손과 맞닿은 이벨리아의 이마 위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옅은 선에 불과하던 빛은 곧 빛무리가 되었고 종국엔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눈부시게 발광했다.

    그 말도 안 되는 현상은 몇 초간 유지된 후에야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칼리프가 펠릭스의 손목을 억세게 붙잡았다.

    “곧 깨어날 거야.”

    “뭐?”

    “너의 비가 곧 자리에서 일어날 거라고.”

    펠릭스가 여상히 대꾸했다. 그럼에도 칼리프는 거칠게 구긴 미간을 펴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너의 비가 깨어날 생각도 없이 너무 단잠을 자서 이러고 있던 게 아닌가?”

    “헛소리 집어치우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워워,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너의 비에게 내 기운을 조금 나누어 줬을 뿐이니까.”

    칼리프가 헛웃음을 흘렸다. 기운을 나눠 줬다고?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줄곧 미동도 없이 숨만 겨우 내쉬던 이벨리아가 작게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칼리프의 눈동자가 본능처럼 이벨리아를 찾았다. 그러자 눈두덩을 움찔거리며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움직이는 이벨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당최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칼리프는 도무지 믿지 못하겠단 눈으로 펠릭스를 보았다.

    “말했잖아. 어쩌면 내가 네 생각보다 훨씬 더 쓸모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정말 네 기운을 나눠 주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너는 내가 가진 능력을 지나치게 얕잡아 봤겠지만, 사실 내가 하찮은 인간 따위에게 무시나 당해도 되는 존재는 절대 아니거든.”

    펠릭스가 거들먹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평소였다면 보란 듯이 무시를 해 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이벨리아의 움직임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이벨리아와 펠릭스를 번갈아 보던 칼리프의 안색이 금세 곤란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깨어난 후의 상황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 생각을 빠르게 눈치챈 펠릭스가 피식거리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그녀에게 다가가 보는 건 어때?”

    “뭐?”

    “아직 네 진짜 정체를 밝힐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네 마음까지 숨길 필요가 있을까?”

    칼리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알아듣게 얘기해.”

    “리우리안인 척하려고 너의 비에게 모질게 구는 게 못 견디게 힘든 거잖아. 그런데 꼭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다.”

    “이벨리아에게 내가 리우리안이 아니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선 이렇게 하는 것만이 최선이야.”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계속해서 뒷걸음질 치던 펠릭스가 일순 걸음을 멈추곤 창가에 기대듯 섰다. 당장이라도 창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펠릭스는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리우리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끝까지 정체를 들키지 말아야 하는 건 황후와 그 세력들 아닌가? 물론 너의 비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선 지금처럼 리우리안인 척하는 게 최선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이 방법은 아닐 수도 있지.”

    “…….”

    “네 눈으로 봐. 리우리안 역할에 착실한 널 보며 너의 비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

    “리우리안의 마음이라고 계속 이벨리아에게 매정하라는 법이 있나? 내가 겪은 바로는 사람 마음처럼 간사하고 갈대 같은 게 없던데 말이야.”

    말끝에 펠릭스가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모습을 반투명하게 바꾸곤, 곧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만큼은 숱하게 봐 온 모습인데도 칼리프는 혼란한 눈으로 창가를 응시했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펠릭스 때문인지, 그가 남긴 말 때문인지 혼란의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찾기도 전에 그토록 기다리던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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