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업보
(1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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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업보
2023.06.12.
이벨리아는 요란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 앞을 보았다.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설마, 이만 가 보자는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건 아니겠지. 코앞에서 들려오는 이 익숙한 목소리가, 절대 리우리안의 것일 리는 없겠지.
하지만 그녀의 예측은 전부 빗나갔다.
코앞에 선 남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리우리안이었고, 그는 정확히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
“…….”
이벨리아는 눈앞의 상황을 믿지 못하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왜…….”
근래 들어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오늘도 그녀의 입 안을 맴돌았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을 인식하곤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때 기대하지 않았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이런, 막 자리에서 일어난 건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나?”
리우리안이 자신을 똑바로 보며 유감이라는 듯 말했다. 지금의 말은 물론이고 이만 가자고 했던 것까지 전부 제게 말한 것이 틀림없다는 뉘앙스였다.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긴커녕 이제 막 도착한 길이었지만, 설령 자리에서 일어난 게 맞는다고 하더라도 리우리안이 제게 동행을 청하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의 적안이 유난스러울 정도로 잔잔했다. 그뿐일까. 그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이기까지 했다.
“설마 오늘 함께 아버님을 알현하기로 한 것을 잊은 건 아니겠지.”
이어진 말에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뜨였다. 머릿속을 이 잡듯 뒤져도 황제 폐하를 알현하기로 한 기억은 없었다.
습관처럼 페일린을 찾아 고개를 돌려봤지만, 그녀 역시나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전하께서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잊은 게 확실하군.”
아래로 내렸던 그녀의 시선이 단박에 위로 들렸다. 맥락을 끊는 리우리안의 말투가 지나치게 단호했다. 정말 황제의 명이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버님께서 많이 섭섭해하시겠어. 그대를 제법 어여삐 여기시는 분인데 그분과의 약속을 잊다니 말이야.”
“……전하.”
“왜 억울한 표정이지? 잊은 적이 없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그러기엔 그대의 표정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인데.”
“…….”
“그게 아니라면 설마 전해 듣지 못한 것인가?”
리우리안이 설마 하는 눈으로 이벨리아를 보았다. 흐트러짐은 물론 거짓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그래서 이벨리아는 불현듯 혼란해졌다.
정말 누군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황제의 명을 전하지 않은 것일까.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이 넓은 궁 안에 온전한 제 편이라곤 페일린과 레이튼뿐이었으니까.
“태자비궁 시종들의 기강이 엉망이란 건 지난번 일로 충분히 실감하고 있었지만, 감히 황제의 명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거로 모자라 제 주인을 곤란하게 하는 간 큰 놈이 있다니. 지나치게 형편없군.”
“…….”
“태자비궁의 기강은 그대가 직접 바로 잡겠다더니, 그 결과가 고작 이것인가?”
그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비웃음을 머금은 그가 맹렬한 비난을 이어왔다.
이벨리아는 그녀답지 않게 거친 숨을 내쉬며 본능처럼 주변을 살폈다. 저들을 보며 수군거리는 영애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가운데엔 의미를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렐리아가 있었다.
처음 받아보는 시선도 아니건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순간 명치로 묵직한 통증이 전해지고 눈앞이 핑 돌았다.
무어라 반박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명치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통증의 세기가 빠른 속도로 강해졌다. 허리를 펴고 있는 것조차 곤혹스럽게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하지만 통증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눈앞이 하얗게 번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자리는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게 리우리안과 함께 동행하는 척 나서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아도 자신을 우습게 보는 렐리아와 그 친우들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까지 보일 순 없었다.
“더 지체했다간 폐하께서 명하신 시간을 지키지 못할 것 같은데. 계속 이렇게 서 있을 생각인가?”
“……아닙니다. 어서 가시지요.”
이벨리아는 통증을 억지로 참아 내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러곤 등 떠밀리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걸음을 떼었다.
다행히 리우리안은 별다른 말 없이 그녀와 발을 맞추었다.
렐리아를 비롯한 다른 영애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지만,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듯 황태자 부부의 행보는 무심했다.
둘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렐리아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눈매를 사납게 세웠다.
이런 식으로 마무리가 되라고 황후가 만들어 준 자리가 아니었다. 조금 더 이벨리아를 몰아붙이고 물어뜯으며 그녀를 만신창이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분했다. 승전 파티에서 느끼게 될 굴욕에 대한 복수는 단 하나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시시하게 마무리가 되다니.
렐리아는 온몸을 바르르 떨며 아랫입술을 거세게 짓씹었다. 당장에라도 황후궁으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
온실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이벨리아의 걸음이 급격하게 느려졌다.
이벨리아는 버티지 못하고 명치를 끌어안은 채 상체를 굽혔다. 힘 풀린 다리가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저, 전하!”
놀란 페일린이 달음박질치듯 달려와 이벨리아를 부축했다.
“……괜찮아. 괜찮아, 페일린.”
이벨리아는 바들바들 떨리는 페일린의 손을 꽉 잡으며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괜찮다는 말에도 페일린은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그녀는 제 상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울먹였다.
“전하, 얼굴이 하얗게 질리셨어요. 아무래도, 아무래도 궁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걸으실 수 있겠어요?”
“페일린.”
“역시 무리시겠죠? 그럼 어떡하지. 우선 저한테라도 몸을 기대세요. 제가 어떻게든 태자비궁까지 부축해 드릴게요. 어서 저한테.”
“페일린. 나 정말 괜찮아. 그러니까 진정해.”
이벨리아는 제법 단호한 투로 페일린을 제지했다.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사이좋게 걱정이나 주고받을 때가 아니었다.
이벨리아는 억지로나마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곤 리우리안을 보았다.
몇 발짝 떨어진 자리에 서 있는 그의 표정이 사납게 구겨져 있었다.
“가시지요, 전하.”
평소와 다름없는 단정한 목소리로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리우리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되레 그는 더욱 미간을 구긴 채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래도 아버님은 나 혼자 뵙는 게 좋을 것 같군.”
곧장 이어진 그의 말에 이벨리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황제의 명을 이유로 자신을 보란 듯이 우습게 만들 땐 언제고 이제 와 혼자 뵙는 게 좋을 것 같다니.
그렇지 않아도 엉망인 컨디션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결국 조금 전 렐리아 앞에서의 행동은 그렇지 않아도 권위 없는 황태자비인 자신을 더욱 우습게 만들기 위한 질 나쁜 장난이었던 것인가.
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숨 쉬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심장이 저몄다.
이럴 줄 알았다면 우스운 꼴이 되더라도 끝까지 유리온실에 남겠다고 버틸 것을.
차라리 렐리아와 그녀의 친우들에게 조롱이나 당하는 것이 이보단 덜 비참했을 텐데.
서글픈 미소가 속절없이 그녀의 입가를 적셨다. 입술을 달싹이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질 만큼 지쳐 가는 제 몸 상태가 느껴졌다.
그런데도 이 모든 상황에 인이 박인 몸은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계처럼 움직였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지금 그대의 낯빛이 어떤 줄이나 알고 있나? 나를 얼마나 더 못된 남편으로 만들고 싶은 거지?”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제게 명을 내리신 건 황제 폐하이십니다. 태자비궁으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폐하를 뵙고 직접 양해를 구한 후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폐하께서 지금 그대의 모습을 보신다면 퍽이나 마음 편해하시겠군.”
“전하를 통해 제 상태를 전해 들으신다고 하여 어심이 편하시겠습니까.”
이벨리아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똑 부러지게 제 의사를 전했다. 그런 와중에도 드레스 안에 감춰진 두 다리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 바들거렸다.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이만 태자비궁에 돌아가 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엄한 황제의 명을 핑계로 질 나쁜 장난이나 친 리우리안에게 이런 식으로나마 벌을 주고 싶었다.
그게 진작에 망가진 마음으로도 모자라 몸까지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방법이라고 해도.
“가시지요.”
이벨리아는 단호하게 통보하며, 앞장서 걸음을 떼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머릿속이 지진 난 듯 요동치고 눈앞이 뒤흔들렸다.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버텼다.
하지만 한계에 치달은 몸은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이벨리아는 점점 둔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결국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으로 자꾸만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하, 비는 도대체 내 말을……!”
사납게 날을 세운 리우리안의 목소리까지도 부드럽게 들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이벨리아는 더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순간 시야가 어지럽게 회전하며 일순 암전이 되었다.
“이벨리아!”
누군가 놀란 듯 힘껏 내지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이벨리아는 정신을 놓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