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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감당하기 힘든 수치심 (11/94)


  • 11화. 감당하기 힘든 수치심
    2023.06.11.


    다음 날, 아침.

    이벨리아는 창백한 낯으로 거울 앞에 앉았다.

    불면증에 잠을 설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건만, 근래 들어 아침을 맞이하는 게 너무 버거웠다.

    오늘 같은 경우엔 동이 트고 나서야 잠이 매섭게 밀려왔다. 마음 같아선 이 기회에 늦잠이나마 늘어지게 자고 싶은데, 오늘은 그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핏기 없는 입술 새로 나직한 숨이 새어 나왔다.

    “아휴, 오늘따라 유난히 더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요.”

    페일린이 이벨리아의 얼굴에 색조를 입히다 말고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왔다.

    이벨리아는 힘없이 입매를 당겨 올렸다.

    “그러게. 오늘은 좀 많이 힘드네.”

    평소와 다르게 꾸밈없는 날것 그대로의 진심이 고스란히 새어 나왔다.

    정말이지 오늘은 유난히 힘들었다. 계속 잠을 자지 못한 데다 리우리안 때문에 혼란한 나날을 연이어 보내고 있으니 피로할 이유야 차고 넘쳤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필 이런 날 황후 폐하께선 티파티를 여셔선…….”

    페일린이 입술을 비죽거리며 웅얼거렸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힘없이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아.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

    “하지만 렐리아 영애님과 그분의 친우들까지 자리하실 게 분명하다고요.”

    “……그렇겠지, 아무래도.”

    애써 괜찮은 척하던 이벨리아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한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자리에 참석하지 않아도 어떤 상황들이 이어질지 머릿속에 빤히 그려졌다.

    초대를 받았지만,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 취급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나마 불청객 취급이면 다행이었다. 유령 취급을 받을지도 몰랐다.

    늘 그랬다. 오늘과 같은 티파티를 여러 번 가졌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제 편은 없었다.

    황후는 본인이 렐리아의 강력한 지지자임을 숨기지 않으며 그녀를 완벽한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아픈 척이라도 할 걸 그랬나?”

    이벨리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색조를 입히던 페일린의 손이 다시금 멈추었다.

    그제야 이벨리아는 실언을 했다는 것을 깨닫곤 억지로나마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냥. 어쩐지 오늘은 아침부터 단잠이 몰려왔거든. 티파티만 아니었다면 늘어지게 늦잠을 잘 수 있었다는 아쉬움에 나도 모르게 실언했어.”

    “전하…….”

    “시간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아. 아무래도 서두르는 게 좋겠어, 페일린.”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페일린을 재촉했다. 그럼에도 멈추었던 페일린의 손은 다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단장을 마치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더디기만 한 페일린의 손길을 재촉하지 않았다.

    불편하게 일그러진 페일린의 표정이, 움찔거리면서도 속도를 내지 못하는 그녀의 손길이 자신을 온전히 걱정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 같아서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이벨리아는 아주 잠깐이지만, 진심 가득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

    “어머, 태자비 전하. 와 주셨군요.”

    이벨리아가 황후궁 유리온실에 도착하자, 먼저 자리해 있던 렐리아가 웃으며 알은 척을 해 왔다.

    이벨리아는 느리게 뻗던 걸음을 멈추곤 테이블에 자리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시계 방향으로 한 번, 곧장 반대 방향으로 한 번 시선이 움직였다. 그런데도 찾는 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곧장 렐리아를 향해 물었다.

    “영애, 폐하께선 어찌…….”

    “아, 황후 폐하께선 오전에 갑자기 두통이 이셔서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셨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어진 렐리아의 대답에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갑자기 오전에 두통이 일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껏 황후는 본인이 준비한 티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본인이 직접 준비한 자리라 그렇기도 했지만, 언제나 눈엣가시로 여기던 자신을 마음 편히 몰아붙이기 위해 만든 자리이니 참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즐기던 눈요기도 마다하고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니, 영 이상했다. 아무래도 다른 의도가 있을 것 같단 직감이 밀려왔다.

    “너무 걱정 마시어요. 황궁의에게 진찰받으시는 것까지 제가 확인하고 오는 길이랍니다. 오늘 하루 푹 쉬면 좋아지실 거라고, 황궁의께서 말씀하셨어요.”

    침묵의 이유를 달리 해석한 것인지, 렐리아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줄줄 읊어 댔다.

    이벨리아는 렐리아와 그 옆에 앉은 영애들을 한번 응시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심하신 건 아니라니 안심이 되네.”

    “그럼 어서 앉으시지요, 비 전하. 폐하께서 오늘을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하셨답니다. 비록 참석하진 못하셨지만, 저희끼리라도 즐겁게 즐겨 달라 전언하셨어요.”

    렐리아는 발랄하게 눈웃음을 치며 해맑게 말했다. 같은 여자가 보아도 참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리우리안의 마음도 자신이 아닌 렐리아에게 향한 채 움직일 줄 모르는 것일까.

    본능처럼 떠오르는 생각을 곱씹으며, 이벨리아가 천천히 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아, 전하. 한 가지 양해를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 말씀 올려도 될까요?”

    느닷없는 말이었다.

    이벨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상석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곤 렐리아를 보았다.

    지나치게 예의를 차린 투인데, 묘하게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렐리아의 환한 미소 때문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렐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황후 폐하께서 오늘 티파티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매우 유감스러워하시며, 제게 폐하를 대신해 주최자 역할을 부족함 없이 수행해 달라고 말씀하셨어요.”

    티끌 하나 찾아볼 수 없이 해맑은 목소리가 당치도 않을 말을 망설임도 없이 내뱉었다. 그리고 이벨리아는 본능처럼 허탈한 숨을 툭 흘렸다.

    결국 렐리아가 하고 싶은 말은 본래는 황후의 자리이고, 황후가 참석하지 않은 지금 태자비의 자리여야 마땅한 상석이, 오늘만큼은 이 렐리아 넷트의 차지라는 것이었다.

    이벨리아는 할 말을 잊은 채 렐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후의 부재를 대신할 황태자비가 버젓이 있음에도 렐리아에게 부탁을 했다니.

    결국 목적은 이것이었던 건가.

    다른 영애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황후는 두통을 앓아야만 했던 것인가.

    순간 잇새로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여기저기서 아닌 척하지만 노골적으로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지도 않은 소리들이 한데 모여 이벨리아의 마음을 순식간에 어지럽혔다. 형언할 수 없는 수치심에 드레스 자락을 쥔 손이 바들거리고, 눈가가 홧홧해졌다.

    그럴수록 그들만의 티파티나 다름없는 자리가 더욱 즐겁고 화기애애해져 갔다.

    “하아…….”

    이벨리아는 고개를 떨군 채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쉬었다.

    숨결이 지나간 자리가 지나치게 뜨거웠다.

    이런 수치심이라면 그간 수도 없이 겪었건만 오늘따라 감당하기 힘들었다.

    오늘을 유난히도 피로하게 시작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레이디들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군.”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나타난 리우리안 때문일지도.

    이벨리아는 익숙한 음성에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발끝만 노려본 채 열감이 몰리기 시작한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전하!”

    내도록 영애 무리에 섞여 있던 렐리아가 망설임도 없이 리우리안을 향해 달려갔다.

    걸음을 재촉하며 이벨리아의 어깨를 치기까지 했지만, 마땅한 사과는 전하지 않았다.

    그것까지도 이벨리아는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렐리. 달려오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것이, 뜻밖에 전하를 뵙게 된 것이 너무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렐리아가 리우리안을 올려다보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리우리안이 다정한 눈으로 렐리아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어머님께선 어디에 계시고 렐리가 어머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거지?”

    “아, 폐하께선 오늘 갑작스러운 두통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셨어요.”

    “그래서 렐리가 어머님을 대신해 레이디들을 대접하고 있는 건가? 이런, 고마워라.”

    리우리안은 기특하다는 듯 렐리아의 볼을 쓸어내렸다. 다감한 손길이 스친 자리가 금세 홍조로 물들었다.

    렐리아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눈매를 휘어 접었다.

    “아니에요.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인걸요.”

    그 말을 하는 데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등 뒤의 이벨리아의 존재를 완벽히 무시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런 렐리아의 태도를 지적하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중심을 지켜야 하는 차기 황제이자 태자비의 하나뿐인 남편인 리우리안마저도.

    “그나저나 디저트가 많이 비었군.”

    “앗, 황후 폐하께서 준비해 주신 디저트가 너무 달콤해서 영애들과 함께 즐기다 보니 그릇이 많이 비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착실하게 대답하는 목소리엔 시종일관 애교가 넘쳐 흘렸다. 그럴 때마다 리우리안의 미소 역시 더욱 짙어져만 갔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그게 이벨리아의 마음을 산산이 부서뜨리고 있다는 건 그 자리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레이디들께서 좋아하실 만한 달콤한 디저트를 아낌없이 내어 드리거라. 특히 렐리가 자주 찾는 디저트는 더욱 꼼꼼히 챙겨야 할 것이야.”

    “예. 준비하겠습니다, 전하.”

    리우리안의 명령에 고개 숙인 시녀가 곧장 등을 보이고 멀어졌다.

    그제야 렐리아에게 시선을 돌린 그가 한층 더 다정해진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레이디들의 시간을 더 이상 방해할 순 없지. 즐거운 시간 보내도록 해, 렐리.”

    암묵적으로 알려진 불륜 상대에게 하는 극진한 대우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게 그렇지 않아도 아둔한 렐리아의 눈을 더욱 멀게 만들었다.

    렐리아는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눈동자가 기쁘고 황홀한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리우리안은 렐리아의 머리카락을 부드러이 쓸어내리는 것으로 헤어짐의 인사를 대신하곤 곧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그런 그가 불현듯 걸음을 멈춰선 건…….

    “그럼 우린 이만 가 볼까?”

    이벨리아의 앞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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