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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칼리프 드윗 (10/94)


  • 10화. 칼리프 드윗
    2023.06.10.


    침실 출입문으로 향하던 리우리안의 걸음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동시에 허공에 박힌 적안이 무서운 속도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네가 진짜 리우리안이 아니라는 걸 그새 잊어버린 건가?”

    “…….”

    “칼리프 드윗.”

    칼리프 드윗.

    잊고 지냈던 이름이 언급된 순간,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렬한 살기가 그의 실루엣을 타고 흘러나왔다.

    힘없이 떨구고 있던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이 실리고, 곧 감당할 수 없이 바들거렸다.

    칼리프 드윗, 그 이름은 까맣게 잊었던 글자임과 동시에 그 누구도 언급해선 안 되는 금기된 단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이름을 감히, 너 따위가.

    칼리프는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그러곤 여전히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는 펠릭스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지나치게.”

    나직이 읊조리는 입술이 서서히 비틀려 올라갔다.

    “건방을.”

    돌처럼 굳었던 다리를 뻗을 때마다 속에서 들끓고 있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떠는군, 펠릭스.”

    칼리프는 당장이라도 검을 빼 들 기세로 검집을 쥐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줄곧 그의 태도가 거슬렸다. 알고 있는 거라곤 고작 제게 들은 몇 안 되는 이야기가 전부이면서 언제나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떠들어 댔다.

    이번만 해도 그랬다.

    이벨리아와 관련한 건 그게 무엇이든 자신이 선택할 문제였다. 감히 제게 이벨리아를 만나라 마라 훈계할 일이 아닌 것이다.

    “펠릭스, 넌 언제나 그랬지. 마치 나에 대해 다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건방을 떨었어.”

    “…….”

    “그 오만한 태도는 네가 가진 그 알량한 이능에서 나오는 용기인가?”

    칼리프는 치미는 비웃음을 감출 생각도 없이 선연하게 드러냈다. 그럼에도 펠릭스에게선 어떤 감정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여유작작한 태도였다.

    어쩐지 그 모습이 끔찍하게 보기 싫어졌다.

    빌어먹을 펠릭스 놈이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모습을 봐야 이 해일 같은 분노가 조금이나마 가라앉을 것 같았다.

    “네가 이능을 가진 존재이기에 내가 널 죽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던가.”

    “…….”

    “그렇게 떠든 네 입부터 갈가리 찢어발겨 주지.”

    칼리프는 손에 쥔 검을 펠릭스를 향해 겨눴다. 그러곤 목표를 향해 주저 없이 걸음을 떼었다. 진심으로 펠릭스를 죽일 듯한 기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펠릭스가 칼리프의 사정권 안에 들어왔다. 그 찰나, 팽팽하게 이어지던 긴장감 사이로 장난기 어린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이런. 화가 머리끝까지 났군.”

    내도록 팔짱을 끼고 있던 펠릭스가 양손을 머리 옆으로 올리며 입술을 삐쭉거렸다. 공격의 의사가 전혀 없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칼리프는 변함이 없었다. 계속해서 펠릭스를 향해 칼을 겨누었고, 비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도리어 입꼬리를 더욱 비틀어 올리며 뇌까렸다.

    “검을 눈앞에 두고도 그 입은 닥칠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내가 입을 다무는 것으로 네 검이 얌전해질 수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닥쳐 보도록 하지.”

    “여전히 장난질이군.”

    “장난이라니, 그럴 리가. 그러지 말고 진정을 좀 해 보는 게 어때?”

    펠릭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칼리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은 것일까.

    펠릭스가 참았던 숨을 내쉬며 호소했다.

    “나는 네게 있어 절대적인 아군이란 사실을 잊지 말란 말이야. 당분간 이벨리아를 만나지 말라고 한 것도 다 널 위한 충고였다고.”

    가운데로 모아 올린 눈썹이 퍽 억울한 듯 보이게 했다. 하지만 칼리프의 표정은 더욱이 싸늘해져만 갔다.

    “그 간사한 주둥이에 이벨리아의 이름을 한 번만 더 올렸다간 그때야말로 칼을 겨누는 거로 끝나지 않을 거야.”

    칼리프는 차게 식은 눈으로 펠릭스를 꿰뚫듯 응시하며 사납게 포효했다. 그제야 펠릭스는 자신이 또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아, 네 말대로 하지. 그러니 이제 그 검은 좀 내려놓는 게 어때?”

    펠릭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칼리프가 이벨리아를 상대로 미친 수준의 집착과 소유욕을 품고 있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이렇게까지 거슬려하다니.

    더욱이 아직까지도 자신을 향해 있는 뾰족한 칼끝이 그의 분노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화가 난 것일까.

    너무도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칼리프의 모습이 답답해서, 펠릭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가 난 건 알겠는데, 미안하지만 그런 거론 날 죽일 수 없어. 네가 엄청난 마력을 가진 존재라면 또 모를까.”

    말끝에 피식거린 펠릭스가 칼리프의 검을 향해 다리를 뻗었다. 그러곤 맨손으로 거침없이 검을 잡아 쥐어 제 목에 가져다 댔다.

    경악할 상황임이 분명하건만, 펠릭스는 지나칠 정도로 태연하다 못해 초연했다. 심지어는 퍽 지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봐. 이런 검으로는 나한테 작은 상처 하나도 내지 못한다니까.”

    칼리프는 미간을 좁혔다. 펠릭스를 진짜 죽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처럼 작은 상처 하나도 생기지 않는 걸 직접 목격하고 나자 형언할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게 표정으로 묻어났지만, 펠릭스는 개의치 않으며 말을 덧붙였다.

    “누차 얘기해 왔지만, 난 누구보다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길 바라. 그 과정에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고.”

    “네 도움 따위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면 나 정말 섭섭하다고, 칼리프. 자꾸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긍정적으로 좀 생각을 해 봐. 내가 생각보다 꽤 쓸모 있는 존재일지도 모르잖아.”

    “넌 그 주둥아리부터 아무 짝에 쓸모가 없어.”

    칼리프는 짜증스럽게 뇌까리며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뿜어져 나오는 살의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다행인 일이었다. 의미 없는 실랑이는 안 해도 된다는 뜻일 테니.

    펠릭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칼리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칼리프, 너도 알다시피 나는 수백 년 동안이나 봉인된 채 잠들어 있었어. 말이 잠들어 있던 거지, 내 의식은 늘 깨어 있었다고. 그 긴 시간 동안 옴짝달싹 못 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는 게 얼마나 지루한 일인 줄 알아?”

    펠릭스는 눈까지 아래로 내리깔며 감정에 호소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목마른 자가 결국 우물을 파는 법이었다.

    펠릭스는 칼리프가 꽤 흥미로웠다. 가능하다면 오래 곁에 두고 지켜보고 싶을 만큼.

    “난 진심으로 널 돕고 싶어. 네 신경을 거스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고.”

    “…….”

    “그러니 내게 말을 해 줘. 너의 생각에 대해 말이야.”

    처음과 달리 담백하게 끝을 맺은 목소리가 제법 신의에 젖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칼리프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침잠된 적안은 깊은 고민의 빛으로 가득했다.

    칼리프는 펠릭스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걸 핑계로 오늘처럼 계속 제 심기를 거스른다면……. 대책이 필요했다.

    이벨리아에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칼리프는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펠릭스까지 제 평정심을 흩뜨린다면 결국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실수를 하게 될 것이고 일을 그르치게 될 터였다.

    생각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박탈감과 피로가 밀려왔다.

    결국 선택권이 없는 문제였다. 제힘으론 어떻게도 이길 방법이 없는 펠릭스가 자의로 제게서 떨어져 나갈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이벨리아에게 힘을 실어 줄 거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위협이 되지 못하도록.”

    칼리프는 눈살을 구기며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하지만 속에만 담아 두었던 생각을 꺼내는 목소리는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이벨리아에게 힘을? 어떻게?”

    펠릭스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의외의 말이었다. 집착과 소유욕에 눈이 멀어 앞뒤 가리지 않고 이벨리아를 만나기에 급급한 줄 알았더니,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칼리프를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웠다.

    “이미 권력을 쥐고 있거나,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나와 이벨리아의 사람으로 만들어야겠지. 그러기 위해선 내 힘을 키우는 게 우선일 테고.”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라면 이미 황후와 황제의 세력으로 소속되어 있는 자들인 거 아닌가?”

    “맞아.”

    “그런 자들을 네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그건 너무 무모한 생각 아니야?”

    “……달리 방법이 없어. 모든 순간 이벨리아의 안전은 최우선으로 보장되어야 하니까. 그러려면 적어도 그녀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는 자들을 우리의 편으로 만들어야 해.”

    굳건한 목소리 끝에 어울리지 않는 한숨이 묻어났다.

    칼리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쩐지 두통이 몰려왔다. 막연히 머리로만 생각했던 것들을 말로 뱉자 새삼 실감된 탓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여정이 될 터였다.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이 일을 완벽한 엔딩으로 이끌기까지.

    하지만 해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지금까지 있는 힘을 다해 버틴 게 아니었던가.

    칼리프는 재차 마음을 단단히 다지며 펠릭스를 응시했다.

    “네가 어떤 식으로 쓰임을 증명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하게 알아 둬야 할 건 황후는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란 거야. 그러니 뭘 하든 황후의 의심을 피해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해.”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라……. 구체적으로 계획한 건 있어?”

    “앞으로 리우리안에게 생길 필연적인 일들을 가능한 한 최대로 이용해야겠지. 황후의 의심을 사지 않은 채, 이벨리아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도록. 그 시작은 승전 파티가 될 거다.”

    칼리프가 양손을 꽉 움켜쥔 채 굳은 다짐이 밴 목소리를 씹듯이 내뱉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펠릭스의 동공에 일순 이채가 감돌았다.

    순간 정오 무렵 다짜고짜 이벨리아를 찾아가 승전 파티에 함께할 것을 통보하던 칼리프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로 구는 건가 했더니, 영 생각 없이 한 행동은 아닌 모양이었다.

    “칼리프, 너도 계획이란 게 다 있었구나?”

    펠릭스는 칼리프를 보며 흥미롭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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