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너의 비가 아니라
(9/94)
9화. 너의 비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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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너의 비가 아니라
2023.06.09.
렐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황태자비 전하와 말씀이신가요?”
실망감에 젖은 목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울렸다. 그런 렐리아를 바라보는 유스티아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물들었지만, 곧 표정을 갈무리했다.
“영애도 알다시피 황위 계승까지 리우의 평판은 아주 중요한 문제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승전 파티는 리우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자리야.”
“그러니 더더욱 전하의 곁에는 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폐하.”
그녀를 달래기 위한 유스티아의 노력에도 렐리아는 완강했다.
유스티아는 침음을 흘렸다. 제 말에 반기를 드는 법이 없던 아이인데, 실망감이 어지간히 큰 모양이었다.
그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벨리아와의 국혼 후에도 리우의 곁을 지키는 건 언제나 렐리아였다.
처음엔 그 모습을 이상하게 보는 이들도 분명 있었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을 받아들였다.
어린 시절부터 오누이처럼 지내며 워낙 가까운 사이라는 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물론 세간에 받아들여지기까지 평소 렐리아와 절친하게 지냈던 영애들이 바람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유스티아는 그 모습을 그저 기껍게 관망했다. 그녀에게 캐롤라인 후작가의 여식은 그저 눈엣가시일 뿐이었다.
더욱이 리우리안이 원하는 건 명백하게 렐리아였다. 하나뿐인 아들이 제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이 점찍어 둔 여인을 원한다는 데 말릴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도리어 탐탁지 않아 하는 가드로와 정면으로 맞서며 렐리아의 입지를 탄탄하게 지켜 주었다.
렐리아 넷트는 황후의 마음을 얻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간 모든 것을 손에 쥐어 왔다.
그러니 지금쯤 렐리아가 느낄 박탈감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일 게 분명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유스티아가 느끼는 감정은 값싼 동정심, 딱 거기까지였다.
유스티아에게 중요한 건 언제나 리우리안이었다. 리우리안이 그런 결정을 한 이상, 유스티아는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아들의 결정을 지지하고 싶었다.
“물론 나도 리우의 곁을 지키는 게 영애이길 바라. 하지만 사흘 뒤 열리는 파티는 그냥 파티가 아니야, 영애. 무려 리우리안이 목숨 걸고 싸웠던 1년을 치하하는 파티란다. 리우는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승리를 당당하게 거머쥐었어.”
“…….”
“파티에 참석하는 모든 이가 분명 리우를 주목할 거란다. 그런 상황에 리우가 보란 듯이 태자비와 함께 등장한다면 리우의 황위 계승을 아니꼽게 바라보던 자들이 의아하게 여길 거야. 그리고 그 의아함은…….”
“…….”
“리우를 향한 부정적인 시선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는 시작이 될지도 모르지.”
유스티아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사실 그녀가 리우리안의 뜻을 이렇게까지 지지하는 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기도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리우가 기특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한 건지, 정말이지 그간 알아 온 제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훌륭한 발상이었다.
리우리안의 평판이 좋아진다는 건, 곧 그를 지지하는 새로운 세력의 기반이 만들어진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많아진다는 건 리우리안의 황위 계승이 앞당겨질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
꿈에 그리던 유스티아의 세상까지 계획보다 빠르게 당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유스티아는 어느 때보다 또렷한 눈으로 렐리아를 바라보았다.
“영애, 이건 정치적인 문제란다. 리우가 파티에 태자비와 함께 참석한다고 하여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번 파티는 영애에겐 달갑지 않은 순간이 되겠지만, 훗날 돌아보면 영애가 손에 쥐게 될 권력을 위한 작은 과정에 지나지 않을 거란다.”
짧지 않은 황후의 말은 렐리아의 야망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서운함을 완전히 지워 내긴 힘들었는지 경직된 표정은 쉬이 풀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납득한 눈빛만큼은 칭찬할 가치가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젠 당근을 줄 차례인가.
어느덧 자애로운 어머니의 가면을 쓴 유스티아가 렐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런 조치도 없이 승전 파티에 리우가 태자비와 등장하도록 두진 않을 거야. 아무렴 네 입장이 우스워질 수도 있고, 흉흉한 소문이 돌 수도 있는데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지.”
“폐하…….”
“그래서 영애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단다.”
제법 거창하게 운을 뗀 유스티아가 한없이 따듯한 미소로 렐리아를 응시했다.
“승전 파티 전에 다른 영애들을 초대하여 티파티를 열까 하는데.”
“…….”
“영애가 나를 대신해 주최자로 참석해 주었으면 하는구나.”
누군가의 마음을 무너트리기 위한 꿍꿍이의 시작이었다.
***
늦은 밤.
리우리안은 한쪽 팔로 눈을 가린 채 미동도 없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우라가 가득 뿜어져 나왔다.
펠릭스는 테이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못마땅한 눈으로 리우리안을 바라보았다.
“이봐. 설마 그 상태로 잠이 든 건 아니지?”
“…….”
“고민거리가 있는 거 같아서 그냥 두긴 했는데 말이야. 벌써 몇 시간째 같은 자세로 그러고 있는 건지 알기는 하는 건가?”
“…….”
“이봐! 정말 그대로 자는 거야? 그래?”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톤이 리우리안의 귓속을 사정없이 헤집었다. 팔 아래 가려진 미간이 구겨지고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제발 그 입 좀 닥쳐.”
그렇지 않아도 속이 시끄럽던 참이었다. 이벨리아 때문이었다.
호위의 앞은 그토록 온화하게 막아 놓고 자신을 향해선 싸늘한 표정만 보이던 그녀의 얼굴이 온종일 잔상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기 싫었다.
그 말간 얼굴로 다른 놈의 앞을 막아서는 모습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리우리안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숨소리에 불과한 소리는 사납게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것과 닮아 있었다. 단박에 상대의 기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위압적이었다.
하지만 펠릭스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끄덕이며 피식거릴 뿐이었다.
“그러게 내가 분명 충고했잖아. 당분간 그대의 비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이야.”
그렇게 말한 펠릭스가 테이블에 댄 팔을 비스듬히 펴 관자놀이를 짚었다.
리우리안의 심기를 거스를 말이란 걸 알면서도 내뱉었다. 곧 기다렸다는 듯 리우리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기다리던 반응이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맹렬하게 치켜올린 눈매 사이로 고약한 눈빛이 쏟아져 나왔다. 삽시간에 뿜어져 나온 살기는 단박에 목을 옥죌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펠릭스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되레 더욱 흥미롭다는 듯 리우리안을 보았다.
“글쎄, 말을 말 같지 않게 듣는 건 너인 것 같은데?”
“도대체 내가 왜 너 따위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거지?”
리우리안이 히스테릭하게 미간을 좁혔다.
펠릭스는 눈썹을 위로 들썩거렸다. 의외였다.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쯤이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몰려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가 누구이던가. 수백 수천이 죽어 나가던 전장에서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던 냉철한 존재였다. 긴 시간 잠들어 있던 자신의 실체를 보고도 겁먹은 기색 한번 보이지 않던 사내였다.
그런데 고작 여자 일에 이토록 흔들린다고?
펠릭스의 입술이 더욱 흥미에 젖은 채 휘어 올라갔다.
“내게 먼저 도움을 청한 건 너 아니었어?”
“그리고 얼마 뒤 네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고도 분명히 이야기했지.”
“네 말대로 해 주기엔 이미 내 흥미가 지나치게 돋아 버린 후였다고. 물론 네가 꽤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기도 하지만 말이야.”
펠릭스는 한마디도 지지 않은 채 또박또박 리우리안의 말을 받아쳤다.
리우리안의 눈매가 더욱 사납게 휘어졌다. 그는 이런 펠릭스의 반응 따위는 익숙하다는 듯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완전히 침대에서 일어나는 폼이 펠릭스를 피해 침실 밖으로 나가려는 듯 보였다.
펠릭스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이벨리아는 생각보다 아주 섬세한 여인이야. 갑자기 달라진 네 태도는 그녀에게 그저 혼란만 안겨 줄 뿐이라고. 당분간 그녀를 만나지 말라는 건 진심으로 한 충고였어.”
“닥쳐. 네가 이벨리아에 대해 알면 뭘 안다고 그따위로 지껄이는 거지?”
“적어도 너보단 내가 그녀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것 같은데?”
“나는 그동안 수도 없이 그녀를 보아 왔어!”
“그렇지만 그녀가 지나치리만치 섬세한 여인이란 건 눈치채지 못했지.”
틈 없이 이어진 펠릭스의 말에 리우리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섬세하단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건 고작 매정하게 구는 것뿐이었다.
리우리안은 고집스레 펠릭스를 응시하다 황급히 걸음을 떼었다. 더는 펠릭스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당분간은 그녀와 마주치지 마. 그녀에게도 시간이란 걸 좀 주라고.”
등 뒤에서 펠릭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리우리안은 침실 문을 향한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경고나 다름없는 메시지를 잊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나의 비다. 그러니 주제넘은 참견은 그쯤 하도록 해, 펠릭스.”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였지만, 펠릭스에게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리우리안은 펠릭스의 대답 따위 들을 생각도 없이 더욱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그때 웃음기 어린 펠릭스의 목소리가 리우의 마지막 인내심을 가차 없이 끊어 버렸다.
“이런, 네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
“엄밀히 말하자면 이벨리아는 리우리안 페트로프의 비야. 너의 비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