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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황태자의 계획 (8/94)


8화. 황태자의 계획
2023.06.08.



 
늦은 저녁, 유스티아는 창가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말없이 찻잔을 기울였다.

다른 날과 크게 다름없는 저녁임이 분명하건만, 이상하게도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문득 오늘 오전에 보았던 리우리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침 후 단장을 마치자 문밖을 지키고 있던 시녀가 리우리안의 방문 소식을 알려 왔다.

그게 뭐라고 유스티아는 함박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유스티아에게 리우리안은 하나뿐인 아들이자 그녀의 인생을 바친 전부였다. 그런 리우리안을 전장에 떠나보내야 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랬던 아들이 1년 만에야 어디 한 곳 다친 데 없이 무사하게 돌아왔는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인지 모르게 자신이 알던 아들이 아닌 것 같단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이른 아침 자신을 찾겠다는 아들의 소식 하나로 말끔하게 사라졌다.

유스티아는 오랜만에 갖는 아들과의 티타임에 전에 없이 가슴이 들떴다. 그간 미뤄 두었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꺼내는 것만으로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승전 파티와 관련한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리우, 승전 파티가 사흘 후라는 건 알고 있지? 후작에게 듣기론 렐리아 영애가 그날 너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 무척 열심히 준비 중이라더구나.]

유스티아는 무척 일상적인 목소리로 렐리아의 근황을 전했다. 렐리아의 이야기는 리우와의 대화에서 빠질 수 없는 화젯거리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렐리아의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리우리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렇습니까.]

생기를 잃은 아들의 목소리가 유스티아를 전에 없이 당혹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은 채 렐리아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1년 만에 서는 자리이지 않니. 긴장이 되기도, 설레기도 할 거야. 그래서인지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

[리우, 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영애도 마음고생이 많았단다. 네가 혹시 전장에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는 게 아니냐고 당치도 않을 말들을 영애의 뒤에서 수군거린 모양이야. 그런데 네가 이렇게 보란 듯이 멀쩡하게 나타났으니, 영애도 이번 파티에서 제대로 보여 주고 싶지 않겠니?]

조금도 보태지 않은 지난 1년의 이야기였다.

속상해하는 렐리아를 보며 유스티아는 늘 미안한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리우리안이 전장에 나가지만 않았더라도 당하지 않았을 취급이었다.

더욱이 전장에 나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척이나 애틋하던 두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길길이 날뛸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미동도 없이 무표정한 리우리안의 앞에서 그녀의 확신은 산산이 조각났다.

[그렇지 않아도 상의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뵙자고 청했습니다.]

[상의? 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어서 말해 보렴, 리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이번 승전 파티에 태자비와 함께 참석하는 것이 어떨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파티에, 태자비와 참석하겠다고?]

유스티아의 동공이 크게 팽창한 채 속절없이 흔들렸다. 어떤 식으로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리우리안의 입에서 렐리아가 아닌 태자비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다니.

유스티아는 밀려드는 복잡한 감정에 선뜻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그라졌던 위화감이 재차 밀려들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오해하실만한 일은 아니니, 그런 표정 마시지요.]

[……리우, 네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통 갈피가 잡히지 않는구나.]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1년이나 걸린 전쟁이지 않습니까. 기어이 승리로 이끈 전쟁이기도 하고요.]

리우리안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유스티아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말의 요지를 통 이해하기 힘들었다.

[보란 듯이 승리로 이끈 엘리아 왕국과의 전쟁은 앞으로 길이 남을 제 업적입니다. 그러니 저를 달리 보는 시선이 많아졌지 않겠습니까.]

[…….]

[저를 지지하는 새로운 세력이 생겼을지도 모를 이때 태자비가 아닌 렐리와 함께 파티를 즐겼다가 겨우 긍정적으로 바꿔 놓은 평판을 잃게 되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되어 그렇습니다.]

차분한 설명이 더 이어지고 나서야 유스티아는 리우리안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간의 주름은 펴지지 않았다.

리우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번 전쟁으로 말미암아 달라졌을 귀족들의 심리를 예상하며 자신의 앞일을 고려하다니.

그건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고 나면 리우리안은 제 뜻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아버님께선 정무관들을 비롯한 귀족들의 환심은 물론, 제국민들의 민심까지 얻길 바라실 겁니다. 그 정도 준비는 되어야 별 탈 없이 승계도 해 주려고 하실 테고요.]

[…….]

[1년을 그 숨 막히는 전장에서 악착같이 버텼습니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결국엔 제 손으로 이룬 이 업적을 쉽게 무너트리고 싶지 않아요.]

[…….]

[기왕 이렇게 된 거, 아버님께 확실히 인정받고 차기 황제로서의 기반도 단단히 다지고 싶습니다.]

유스티아는 꾹 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한순간 탁 놓아 버렸다.

리우리안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여전히 놀라움이 가시지 않았지만, 아들의 마지막 말을 듣고도 침묵만 하고 있을 재간이 없었다.

줄곧 느끼던 위화감 따위는 깔끔히 잊은 채 물기 젖은 눈으로 리우리안을 바라보았다.

[오, 리우. 내 아들아. 1년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유스티아는 리우리안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손끝에 감기는 아들의 피부가 무척이나 거칠거칠했다.

그게 꼭 지난 1년간 치열했던 리우리안의 시간을 대변하는 것 같아 다시 한번 마음이 무너졌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끔찍한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고된 시간이었으면 언제나 어린아이만 같던 제 아들이 1년 사이 장성한 어른이 되어 돌아온 것일까.

유스티아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리우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것이 없었다.

리우의 말처럼 귀족들의 환심을 산다면 제국민들의 민심이야 자연스럽게 뒤따라올 것이 분명했다.

민가를 술렁이게 하는 소문은 대부분 귀족가에서 새어 나온 이야깃거리였으니까.

리우 스스로 귀족들은 물론 제국민들의 마음까지 얻는다면 가드로도 결국엔 리우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터.

그것이야말로 아비의 인정에 목말라했던 리우가 가장 바라는 일이었다.

[알았다, 리우. 네 뜻대로 하려무나.]

유스티아는 수척해진 리우의 볼을 쓸어내리며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렐리아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아무리 제 눈에 예쁜 후작가의 영애라고 하더라도 제 아들만큼 어여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렐리아를 그저 방치할 수만도 없다.

유스티아는 그새 식어 버린 차를 재차 한 모금 삼켰다. 그때, 조용하던 황후의 침실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후 폐하, 넷트 후작 영애께서 응접실에 도착하셨습니다.”

공손히 예를 갖춘 시녀장의 말은 유스티아가 줄곧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유스티아는 미련 없이 찻잔을 내려놓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가 익숙하게 걸음을 뻗은 방향은 응접실이 있는 복도 방향이었다.

***

유스티아는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렐리아를 향해 환히 웃어 보였다.

“영애. 갑작스레 불러 당황스러웠을 텐데, 이렇게 와 주어 고맙구나.”

형식적인 말로 치하하며 자리에 앉았다. 뒤따라 앉은 렐리아가 눈매를 휘어 접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어요, 폐하. 폐하께서 이렇게 찾아 주실 때마다 저는 무척이나 기쁜걸요.”

입에 발린 말이란 걸 알면서도 귓속에 꿀이 발린 것처럼 렐리아의 말이 달았다. 하지만 지금이 렐리아의 말을 기껍게 음미나 할 때가 아니었다.

유스티아는 괜스레 렐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렐리아에게선 언제나 그렇듯 오늘 역시 구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승전 파티를 앞두고 리우리안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하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이겠지만.

유스티아는 렐리아의 마음 같은 건 모르는 척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늦은 시간에 급히 영애를 부른 건, 전해야 할 말이 있어서야.”

“전해 주실 말씀이요?”

곧장 말을 덧붙이려던 유스티아가 문득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렐리아의 눈이 너무 순진무구했다. 반갑지 않은 말을 전해야 하는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렐리아는 그녀가 인정한 리우리안의 유일한 짝이었다. 비록 황태자비의 자리는 내어 주지 못했지만 리우리안의 승계 이후 곧바로 렐리아를 황비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과 달리 렐리아에게 완벽히 힘을 실어 줄 수 있었다. 황태자비인 이벨리아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쥔 황비가 되기까진 시간문제일 터였다.

더불어 이벨리아의 입지가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캐롤라인 후작가의 세력 역시 밀려나게 될 것이고, 종국엔 가넷 공작가이자 자신의 세력만이 황궁을 장악하게 될 터.

거기까지가 유스티아가 그리는 완벽한 그림이었다. 꿈꾸는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도 렐리아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좋을 게 없었다.

물론 다른 선택지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유스티아는 렐리아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되도록 렐리아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리우리안에게 뜻대로 하라 답까지 내어 준 후이지 않던가.

유스티아는 단호하게 마음을 다졌다.

“영애, 사흘 뒤 리우리안을 위해 열리는 승전 파티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황태자 전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준비 중이었답니다.”

“아무래도 이번 파티는 황태자비가 리우와 함께해야 할 것 같구나.”

황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렐리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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