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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그녀를 찾은 이유 (7/94)


  • 7화. 그녀를 찾은 이유
    2023.06.07.



     
    리우리안의 모습은 명백히 위협적이었다. 그런데도 레이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지적했듯 누군가에겐 충성심이 깊은,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불손하기만 한 눈빛도 거두지 않았다.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나서야 이벨리아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전하, 무슨 일로 이곳까지 걸음 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벨리아는 서둘러 말을 붙이며 레이튼의 앞을 가로막았다. 리우리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레이튼이라면, 그렇게나마 시야에서 지워 내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녀가 레이튼의 앞을 막고 서기 무섭게 리우리안의 표정은 더욱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태자비궁이 이유가 있어야만 내가 찾을 수 있는 곳이었나. 그게 아니라면, 내가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기라도 한 건가?”

    “…….”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정말 호위기사와 다정한 시간이라도 보내고 있던 모양이군.”

    그가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비아냥댔다.

    순간 이벨리아는 숨이 탁 막혔다. 아랫입술이 바르르 흔들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물기가 차오른 눈동자 위로 야유 섞인 그의 표정은 물론 그녀와 레이튼을 힐끔거리는 시종들의 모습이 비쳤다.

    절반은 불결한 무언가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동정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그걸 인지한 순간, 이벨리아는 밀려오는 수치심에 혀를 깨물어서라도 죽고만 싶었다.

    문득 언젠가 그가 오늘처럼 태자비궁을 찾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대가 나의 렐리아에게 감히 훈계를 했다지? 다른 영애들이 보는 자리에서 어지간히 렐리아를 우습게 만들었다고. 감히, 나의 렐리아를 말이야.]

    [되도록 태자비궁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당분간은 그대의 털끝 하나도 마주하고 싶지 않으니.]

    그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기어이 제 앞에 섰고, 시종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당연하다는 듯 렐리아의 역성을 들었다.

    그뿐일까. 꼴도 보기 싫다는 말을 에둘러 전하며 아랫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보란 듯이 우습게 만들었다. 이유는 며칠 전 도를 넘은 렐리아의 태도에 가벼이 훈계를 내렸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때도 그랬다. 지금처럼 동정 어린 시선은 물론 괜히 나서서 불화를 만들었다는 원망의 눈길을 받아야 했다.

    이벨리아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본능처럼 떠오른 생각을 담담히 마주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약속이나 한 듯 허리에 힘이 들어가고 그를 향한 시선에 적개심이 실렸다.

    “제게 용무가 있어 오신 것이 아닙니까.”

    “용무. 용무라…….”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리우리안이 같잖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럼에도 이벨리아는 흔들림 없이 그를 마주했다.

    1년 전의 제 모습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 정도 비웃음 따위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비정상적으로 단단했던 그때의 이벨리아 캐롤라인으로.

    “그래. 그랬지. 그대에게 전할 말이 있어 온 것이 맞아.”

    “…….”

    “그런데 아무래도 태자비궁의 시종들은 물론 그대의 호위까지 본분을 잊은 듯하여 내가 직접 태자비궁의 기강을 바로잡아 볼까 하는데.”

    리우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입꼬리를 힘껏 비틀어 올리며 뒤틀린 심기를 한껏 내색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기분이 태도가 되어 별것 아닌 일에도 시종들에게 분풀이를 하곤 했다.

    보통은 황태자궁의 시종들이 희생양이 되곤 했는데, 오늘은 제 궁의 시종들이 표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그가 그렇게 하도록 그냥 놔둘 생각이 없었다.

    “제 사람들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제게 맡겨 두시고 전하께선 본래 이곳을 찾은 용무를 보시지요.”

    이벨리아는 똑 부러지게 제 의사를 전했다.

    처음이었다, 리우리안의 뜻에 직접적으로 반기를 든 것은.

    제 말에 그의 표정이 더욱더 경직되는 게 보였지만, 이벨리아는 물러서지도, 제 행동을 후회하지도 않았다.

    몇 번을 생각해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았다. 제 사람들만큼은 제가 지키는 게 맞았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벨리아는 손을 공손히 모아 잡은 채 적당히 시선을 아래로 했다. 황태자를 대하는 태도로 일말의 군더더기가 없었다.

    굳이 문제랄 게 있다면 황태자를 향한 예의가 지나칠 만큼 경직되었고, 그 정도를 칼같이 지켰다는 데에 있었다.

    “본분을 잊은 건 시종과 호위뿐이 아닌 모양이군.”

    리우리안은 억눌린 목소리를 씹듯이 뱉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이 기분이 더러웠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이유가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중 가장 거슬리는 것은 건방진 호위를 막아서고 있는 이벨리아였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호위를 어떻게 하기라도 할까 봐 한껏 경계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에게 남편이란 자리는 호위기사보다도 못하다는 듯 보였다.

    이를 사리물었다. 턱이 불거지고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녀의 태도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리우리안 페트로프가 만든 거였다.

    그러니 그녀에게 가는 길에 놓인 이 견고하고 거대한 장벽을 무너트리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다 알면서도 도통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리우리안은 숨을 거칠게 들이마시며 양손을 꽉 말아 쥐었다. 그것으로나마 매섭게 휘몰아치는 감정을 독하게 인내하며 돌덩이처럼 굳은 입술을 움직였다.

    “사흘 뒤 승전 파티가 있을 거야. 나를 위한 자리이고, 황제 폐하께서 직접 주최한 파티이니 나를 위해 모두가 모이겠지.”

    “…….”

    “그날만큼은 내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거야. 어제처럼 그런 같잖은 눈속임 정도론 어림도 없을 거란 의미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한차례 정원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의 전언은 어렵지 않은 내용이었다. 승전 파티라면 이벨리아 역시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그가 ‘왜’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거였다.

    “……어째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어째서라니.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지?”

    망설임 끝에 물은 말에 그가 눈썹을 사납게 추켜 올렸다. 그럴수록 이벨리아의 마음은 착잡해져만 갔다.

    사흘 후 승전 파티가 있을 거란 사실은 황궁 밖의 귀족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자신이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아무리 허울뿐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자신이 이 나라의 황태자비인데.

    귀족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저는 모를 거라고 생각할 만큼, 그에게 자신은 겨우 그런 사람으로밖에 비치지 않는 것인가.

    이벨리아는 묵직한 숨을 내쉬었다. 그를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목구멍에 복숭아씨가 걸린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만 그를 피하고 싶었다.

    “……황실의 일원이자 태자비로서의 품위를 위한 준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황실에 누가 되지 않을 만큼 열심히 준비할 것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준비뿐 아니라 연회장에서 행동 역시 내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만 지킬 것이니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지요.”

    “조용히 자리만 지킬 것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리우리안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켰다. 그 탓에 당혹스러운 건 이벨리아였다.

    그녀는 순간 비참한 기분도 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미간을 험악하게 구기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인지 알 수 없었다.

    늘 그랬듯, 허수아비처럼 제 자리만 지키겠다고 한 게 다였다.

    당연하게 렐리아와 파티에 참석하여 보란 듯이 자신을 우습게 만드는 그의 모든 행동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니, 그라면 제 말에 담긴 뜻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제게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최 내게 무슨 설명을 바라는 건지 모르겠군.”

    “사흘 후 승전 파티가 예정되어 있다는 건 저 역시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나는 그날 연회장으로 향하기 전 태자비궁을 찾을 계획이야. 그러니 내가 도착하기 전에 준비는 끝마쳤으면 좋겠군.”

    “당일에 제게 명하실 일이 있어 그러시는 거라면 지금 말씀하시지요. 연회장 밖에서 렐리아 영애와 함께 태자비궁을 찾으셨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한다면…….”

    이벨리아는 얕게 한숨을 내쉬며 초연한 얼굴로 입술을 움직였다. 기계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별안간 이마를 문지르며 탄식을 흘렸다.

    “아무래도 나의 비는 나를 무심한 남편으로 만드는 거로 모자라, 자격 없는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신 것 같군.”

    헛웃음에 뒤섞여 실려 나온 말들이 온통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벨리아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상대를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그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승전 파티에 비와 참석할 것이다. 파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이 나는 그 순간까지 내 곁을 지키는 건.”

    일순 말을 멈춘 그가 안광을 형형하게 번뜩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그 앞에 선 이벨리아의 표정이 시시각각 처참하게 일그러져 갔다.

    리우리안은 그 모습을 오롯이 관망하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영애가 아닌 비가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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