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고귀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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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고귀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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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고귀한 사람
2023.06.04.
“이 꼴을 보고 안색이 나아졌다고 하시니, 황궁의에게 태자비를 꼼꼼히 살피라 명을 내리시겠다는 말조차 믿을 수가 있어야지 말입니다.”
리우리안은 이벨리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렇게 읊조렸다.
이벨리아를 보며 한 말이었지만, 실상은 가드로를 향해 뱉은 말이었다.
가드로의 위선이 너무도 우스웠다. 누구보다 이벨리아를 위하는 척하고 있지만, 가드로 역시 그녀를 방관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1년 사이 이벨리아의 안색이 이렇게까지 나빠질 순 없었을 테니.
가드로의 안면이 분노에 바들바들 떨렸다. 그럼에도 리우리안은 개의치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식사는 두 분이 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하곤 이벨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이만 일어나지.”
이벨리아가 몸을 움찔 떨었다. 곤란하단 낯빛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리우리안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어 제 품으로 힘껏 당겼다.
가녀린 여체가 속절없이 딸려 왔다. 그제야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황제 부부에게서 등을 돌렸다.
***
이벨리아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만찬장을 빠져나와 정원을 가로지르기까지, 손목을 잡아끄는 힘은 물론 성큼성큼 뻗는 걸음에 그녀를 향한 배려는 없었다.
“전하.”
“…….”
“전하……!”
이벨리아는 억눌린 소리로 리우리안을 불렀다. 처음 부름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처럼 멈추지 않던 그가 두 번째 부름에선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아, 하아.”
이벨리아는 쌓였던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리고 이마 위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돌볼 새도 없이 리우리안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도 없이 봐 왔던 뒷모습인데, 오늘따라 그 느낌이 너무 달랐다.
“……전하.”
이벨리아는 한결 정돈된 목소리로 리우리안을 불렀다. 작은 고갯짓으로나마 돌아봐 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는 원래가 그녀의 바람을 들어 주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체념한 얼굴로 조심스레 걸음을 떼어 그의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곤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폐하께선…… 폐하께선 줄곧 저를 살뜰히 살펴주셨어요.”
차분한 척 위장한 목소리가 언뜻 어색하게 흔들렸다. 아닌 척했지만, 그녀 역시 혼란한 상태였다. 자신의 역성을 드는 리우리안이라니, 당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대적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발체로페 제국의 황제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언행에 황제가 분노했으니, 어떤 엄벌이 내려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서 그를 설득해야 했다. 황제에게 사죄할 수 있도록.
“저를 자주 찾으시어 불편한 점은 없는지 꼼꼼하게 물어봐 주셨고, 열병에 사흘을 꼬박 앓았을 때도 몸에 좋다는 약은 아끼지 말라 황궁의에게 명을 내려 주셨어요. 그리고, 그리고 또…….”
“그만.”
뻔뻔하게 거짓을 고하던 이벨리아가 단호한 명령 앞에 거짓말처럼 말을 멈추었다. 그러곤 몸을 바르르 떨었다.
처음 느껴보는 한기가 몸속 가득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그녀를 찍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싸늘한 시선 때문이었다.
“이런다고 해서 그대가 얻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설마 폐하를 그렇게까지 믿고 있는 건가?”
“…….”
“폐하가 없는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역성을 든다 하여 그대에게 돌아가는 것이 있기라도 할 거라고?”
부정하며 비꼬듯 되묻는 말에 이벨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걸 바랐다면 하지도 않았을 말이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건 오로지 그였다.
“……전하, 폐하께선 이 나라의 황제이십니다. 이 나라 제국민들의 평안을 살피셔야 하는 분께서 어떻게 한낱 태자비의 불면만을 염려하실 수 있겠습니까.”
“현명한 여인이라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군.”
불현듯 허탈한 웃음이 그녀의 귓가를 휘감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이벨리아가 속절없이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곱아드는 손가락을 어쩌지 못하고 꽉 움켜쥐었다.
그의 얼굴이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식어있었다.
“……전하.”
“그대가 한낱 태자비라면 그런 태자비를 둔 나 역시 하찮은 황태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전하, 제 말은……!”
“설마 거기까지 생각도 하지 않고 뱉은 말은 아니겠지.”
순간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요동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적이었다.
“그, 그건.”
변명할 말을 찾아 바쁘게 머리를 굴려봤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건 명백한 자신의 실수였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호시탐탐 자신의 흠을 찾는 그 앞에서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한숨이 밀려왔다. 하지만 지금이 속 편하게 한숨이나 쉴 때가 아니었다.
이벨리아는 서둘러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전하.”
“…….”
“고귀한 전하께서 하찮다니. 어리석은 저의 실수이니 넓은 아량으로 헤아려 주시길 감히 부탁드립니다.”
부부 사이에 주고받을 사과라기엔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딱딱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렇기에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벨리아는 부디 이 이상으로 그의 심기가 상하지 않길 바라며, 그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그래. 그대의 말처럼 나는 고귀한 황태자이지.”
“지당하신 말씀…….”
이벨리아는 습관처럼 입술을 움직였다. 상대가 듣기 좋을 말만 골라 대답하는 건 과거의 그녀에겐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의 그녀에겐 조금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쉬운 일을 끝까지 완수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나의 비인 그대 역시 언제나 고귀한 사람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할 거야.”
그가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붙잡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
“…….”
이벨리아는 당황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눈만 빠르게 끔벅였다.
고귀한 사람이라니.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당황스러웠다. 고귀하다는 말이 그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이던가? 아니, 어떤 식으로도, 비꼬는 뉘앙스로도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전하……. 도대체, 어째서…….”
이벨리아는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데 꿈에서도 들어 본 적 없는 다정한 말씨가 가슴 깊숙한 곳에 박혀 온몸을 둥둥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뿐일까. 그의 눈동자가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거짓을 고한 사람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청백했다.
그러니 더욱이나 꿈이어야 마땅한 상황인데, 맹목적으로나마 그렇게 믿으려고 할 때마다 그에게 붙잡힌 어깨에서 지나치게 뜨거운 열감이 전해졌다.
이벨리아는 속절없이 그를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들을 눈으로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 거냐고. 무슨 의미로 제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고.
하지만 늘 그랬듯 그녀가 바라는 대답 같은 건 돌아오지 않았다.
“난 유약한 비 따위 필요 없어. 비를 보살피지 않는 황태자란 타이틀은 더더욱이나 사양하고 싶군.”
일순 표정을 단호하게 굳힌 그가 익히 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시에 요란하게 흔들리던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추곤 탁하게 빛을 잃어갔다.
“하…….”
이벨리아는 멈췄던 숨을 툭 내쉬었다. 허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무뎌졌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주변으로 싸늘한 냉기가 휘감겼다. 너무 뜨거워 타들어 갈 것만 같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어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혹한의 한가운데에 놓인 것처럼 미동도 할 수 없었고, 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 없었다.
그때 톤 높은 목소리가 느닷없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전하!”
적막을 흩뜨리고 나타난 건 렐리아 넷트였다.
이벨리아는 렐리아를 발견하기 무섭게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다.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나타나다니, 수치스러운 기분이 밀려왔다.
그녀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렐리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척까지 다가왔다. 기어이 리우리안의 옆에 섰고,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손길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정확히는 이벨리아의 어깨를 잡고 있던 리우리안의 팔에 억지로 팔짱을 낀 것이었다.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렐리아는 감히 황태자비의 앞에서 당연하단 듯 황태자에게 팔짱을 끼고도 당당하게 미소를 감아올렸다.
수차례 겪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1년 만에 다시 보는 모습이라 그런지, 이벨리아는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하, 황후 폐하께서 지금 당장 전하를 모시고 응접실로 오라 하셨습니다.”
렐리아는 이벨리아의 안색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최소한의 예의만 차린 뒤 곧장 리우리안을 향해 말했다.
발랄한 그녀의 목소리에 이벨리아는 차마 고개를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마 곧 리우리안은 렐리아의 손을 잡고 제게서 멀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주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모습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그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강하게 밀려왔다.
리우리안의 옆에 서서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렐리아가 못내 얄미웠다.
자그마치 1년 만인데, 리우리안과 함께 있는 꼴은 잠깐도 볼 수 없다는 듯한 그녀의 태도가 너무 약 올랐다.
하지만 오늘도 그녀의 기대는 예외 없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전하, 황후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어서 저랑 가세요.”
렐리아가 붙잡은 그의 팔을 미약하게 흔들며 재촉했다.
정말 미약한 힘일 뿐이었다. 힘껏 붙잡아 흔들었음에도 어깨를 붙잡은 리우리안의 자세를 흩트리지 못할 만큼.
그러나 리우리안은 그 약한 힘에 이끌려 결국 이벨리아의 어깨를 놓아 버렸다.
이벨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이 탁 막히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꽉 막힌 숨이 밀려 올라왔다.
그때 누구의 것인지 모를 걸음 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거침없이 꿰뚫고 들어왔다. 그럴수록 이벨리아는 감은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지금껏 수도 없이 봐 왔는데, 어쩐지 오늘은 자신이 없었다. 혼자 남아 제게서 등을 돌리고 멀어져 갈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