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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무심한 남편이어도 (3/94)


  • 3화. 무심한 남편이어도
    20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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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하, 폐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시종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헛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황제가 먼저 그를 찾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시간 안에선 그랬다.

    공백이 1년 정도는 있어야 이렇게 먼저 찾아 주기도 하는 건가.

    실없는 생각을 했던 것도 잠시, 황제를 찾아 도착한 알현실에선 기대했던 일 같은 건 무엇도 벌어지지 않았다.

    [태자비가 불면으로 고생을 하는 모양이더구나.]

    그래서 무얼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자신은 의사가 아니었다. 태자비의 불면을 제게 토로한들 자신이 고쳐 줄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와의 자리가 길어질수록 괜한 걸음을 했다는 생각만이 절실해졌다.

    아무리 황제의 명이었다고 해도 본래의 리우리안답게 황태자궁에 돌아가 휴식을 취했어야 했는데.

    결국 황제의 말에 깊은 새벽, 이벨리아를 찾고 말았으니 그거야말로 전혀 계산에 없던 행동이었다.

    “후우.”

    리우리안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경솔했던 선택의 대가가 너무 가혹했다.

    1분 1초도 긴장을 늦출 수 없던 살육의 현장에서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과연 이보다 더 끔찍한 벌이 있을까.

    연거푸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탓에 그렇지 않아도 가라앉았던 공기가 더욱 묵직해졌을 때였다.

    고요하던 정적을 깨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우리안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홱 쏠렸다.

    열린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이벨리아였다. 가늘어진 그의 눈이 그녀를 꿰뚫듯 응시했다.

    이벨리아는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습관처럼 걸음을 서둘렀을 뿐인데, 저보다 먼저 도착한 리우리안을 마주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거칠게 쿵쿵 뛰었다. 자신을 향한 눈길이 너무도 강렬했다.

    경련하듯 떨리는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곤 뻣뻣해진 다리를 가까스로 뻗었다. 그때마다 집요해진 리우리안의 시선이 곳곳을 훑는 게 느껴졌다.

    긴장감이 더욱 배가되었지만, 태연한 척 꿋꿋하게 걸음의 속도를 유지했다. 집요한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건 그녀의 자리인 리우리안의 옆에 앉고 나서였다.

    이벨리아는 아닌 척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르고 리우리안의 실루엣이 흐리게 시야에 걸렸다.

    원치 않았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얼굴이군.”

    이벨리아는 본능이나 다름없이 어깨를 바르작 떨었다. 뚫어지게 보았다고는 하나 잠깐일 뿐이었는데, 자신의 불면을 정확하게 알아챈 것이 퍽 당혹스러웠다.

    “……신경 써 주실 정도의 일은 아닙니다.”

    “신경을 쓰지 않기엔 눈 뜨고 봐 줄 만한 안색이 아닌 거 같은데.”

    “…….”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건가? 날 하나 있는 아내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무심한 남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벨리아는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정면을 향한 눈동자가 거칠게 요동쳤고, 무릎 위에 가지런히 포개 올린 두 손에 힘이 실렸다.

    그의 말이 너무 아팠다. 정말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결혼 이후 그는 무심하지 않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때마다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를 탓한 적은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다.

    묵묵히 견디고 기다리면 언젠가 자신을 봐 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멍청한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그가, 너무 좋았으니까.

    왜 이렇게까지 좋은 건지 그 이유조차 알 수 없어 괴로울 만큼, 온 마음이 그를 원했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일부러 상처를 줄 필요는 없었다. 그런 수고를 감수하지 않아도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모든 순간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무심한 남편이어도, 저는 전하가 언제나 발체로페의 빛나는 황제가 되시길 진심으로 바랐고, 지금도 그 마음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곡해만큼은 말아 달라고. 입술이 반자동이나 다름없이 그렇게 속삭였다.

    “…….”

    “…….”

    비웃음이나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리우리안에게선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건지.

    이벨리아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왜 그와는 단 한 발짝도 함께 내딛지 못한 채 언제나 최악으로 제자리만 맴돌아야 하는 걸까.

    밀려오는 서러움에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 무렵이었다. 닫혀 있던 만찬장의 문이 다시 한번 열리고 황제와 황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벨리아는 본능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오늘도 태자비가 먼저 와 있었구나. 인사는 그쯤하고 앉자꾸나.”

    꾸벅 숙인 머리 위로 곧 가드로의 다정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모두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리우리안은 거만하게 다리를 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탐탁지 않은 가드로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리우리안을 향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 탓에 이벨리아는 제가 다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자리를 한 네 사람 중 환한 낯빛을 한 건 유스티아가 유일했다. 그녀는 리우리안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는 듯 시종일관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리우, 드디어 너를 마음 편히 마주하게 됐구나. 널 전장에 보내 놓고 하루도 마음 편히 자 본 적이 없어.”

    결코 편한 분위기가 아님에도 유스티아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가운데 테이블이 없었다면 당장 리우리안의 손이라도 움켜쥐었을 태세였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리우리안에게 유스티아는 언제나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였으니까.

    이상한 건 유스티아가 아니라 리우리안이었다. 원래라면 유스티아의 말에 미주알고주알 대답하며 장단을 맞췄을 그가 계속해서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이벨리아는 황제와 황후의 눈치를 살피며 리우리안을 곁눈질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블 어딘가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무척 지친 듯이 보여서, 이벨리아는 리우리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불편한 적막이 깨진 건 가드로의 목소리가 별안간 이벨리아를 향했을 때였다.

    “근래 태자비가 불면 때문에 고생한다고 들었다.”

    이벨리아는 조금 놀란 눈으로 가드로를 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수면 시간이 조금 줄어들었을 뿐입니다.”

    “황궁의에게 듣기로는 통 잠을 이루지 못해 힘들어한다고 하던데.”

    “염려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괜히 심려를 끼쳐 드렸어요. 죄송해요.”

    이벨리아는 괜찮은 척 말끝에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호의로 건넨 말이란 걸 알면서도 달갑지 않았다.

    가드로가 보이는 호의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명분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 페일린처럼 그녀의 일에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 줄 정도의 애정이나 의리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안색이 전보단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구나. 그래도 힘들면 얘기하거라. 황궁의에게 태자비를 꼼꼼히 살피라 이를 테니.”

    “말씀만이라도 감사드립니다.”

    이벨리아는 본능처럼 눈매를 휘어 접으며 예의를 차렸다.

    가드로의 눈빛이 제법 믿음직스럽게 빛났지만, 이벨리아는 그를 믿지 않았다.

    물론 가드로는 이 자리가 파한 후 그가 말한 대로 태자비궁 전담 황궁의에게 명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을 향한 최소한의 관심을 의무적으로나마 표현하는 행위일 뿐, 그 행동에 큰 의미는 없을 게 분명했다.

    새삼 자신의 위치를 실감했다. 이 씁쓸함을 어떻게 억누르면 좋을지. 이젠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슬퍼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대외적인 표정을 유지하며 어서 음식이 준비되기만을 기다렸다. 하인들이 바쁘게 오가며 먹음직스런 음식들로 상이 가득 채워지고 만찬장의 문이 닫혔을 때였다.

    피식, 누군가 흘린 실소가 분위기를 순식간에 싸늘해지게 만들었다.

    “우습군요.”

    이벨리아는 믿기 힘든 얼굴로 제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채 가드로를 직시하고 있는 리우리안의 얼굴이 그녀의 눈동자 가득 들어찼다.

    “황실 전담의들은 제국 내에서도 실력이 손꼽히는 자들이라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황제의 명령 없이는 병환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머저리 집단인 모양입니다.”

    리우리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돈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말을 내뱉었다.

    가드로의 안면이 삽시간에 경직되었다.

    “언제나 언행에 신중함을 기하라 누차 이야기했다.”

    “그들이 머저리인 게 아니라면 태자비의 불면증은 태자비가 얼마나 나약한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병증이 되겠군요.”

    “리우리안!”

    가드로가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그럼에도 리우리안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되레 황제를 향해 더욱 안광을 번뜩였다.

    “그것도 아니라면 태자비를 괴롭게 만드는 건 저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

    “태자비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유일한 이유였던 제가 1년이나 자리를 비웠는데, 오히려 태자비의 심신은 1년 전보다 더 유약해져 있으니 말입니다.”

    말끝에 조소를 흘리는 그를 보며 이벨리아는 아연히 입술을 벌렸다. 전에 없이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분명 황제 부부가 자리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를 무심한 남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러는 거냐고 자신을 비난하던 그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화살을 황제 부부에게로 돌린 것일까.

    “전하, 아무래도 오해를 하신 것…….”

    안절부절못하던 이벨리아가 리우리안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나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그의 시선이 이벨리아의 얼굴에 깊숙이 박혔다.

    이벨리아는 순간 할 말도 잃은 채 리우리안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 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꼭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그의 적안이 뜨겁게 들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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