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황제의 제안 (2/94)


2화. 황제의 제안
2023.06.02.


16857029577468.jpg

 
“비 전하, 일어나실 시간이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황제 폐하께서 명하신 조찬 자리에 참석하시려면 부지런히 준비하셔야 해요!”

아침을 알리는 페일린의 목소리가 넓은 침실 안을 활기차게 울렸다.

페일린은 이벨리아를 재촉하면서도 그녀를 흔들어 깨우진 않았다. 최근 그녀가 지독한 불면증에 고생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걸음으로 침실을 가로지른 페일린은 빈틈없이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금세 밀려들어 왔다. 탁하게 잠들어 있던 공기가 순식간에 흐트러지고, 닫혀 있던 이벨리아의 눈꺼풀이 더디게 위로 들렸다.

긴 속눈썹 아래 드러난 녹안에서는 조금의 잠기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벨리아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전하. 간밤엔 좀 주무신 거예요? 매번 힘들어하시더니, 오늘은 수월하게 일어나시는 것 같아요.”

이벨리아를 위한 세숫물을 준비하던 페일린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곤 한달음에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응, 그냥…….”

이벨리아가 생기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숙면을 취한 사람의 것이라기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페일린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설마 한숨도 못 주무신 거예요?”

이벨리아는 그저 옅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누구보다도 잠을 이루고 싶었으나, 갖은 노력에도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몽롱해질 참이면 애써 지워 냈던 리우리안의 말소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당분간 다시 전장에 나가는 일은 없을 거야. 지난 1년간 내가 그렇게 만들었거든. 엘리아 왕국뿐 아니라 그 어떤 누구도 이 발체로페 제국을 감히 넘볼 수 없게 말이야.]

리우리안을 선두로 한 기사단이 전쟁의 승기를 거머쥐고 있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벨리아가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다음이었다.

[그러니 잘 지내보자고, 이벨리아.]

이벨리아 캐롤라인과 리우리안 페트로프는 부부이긴 했으나 정치적인 명분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역대 가장 강력한 황제인 가드로 페트로프가 언젠가 제 뒤를 잇게 될 아들을 염려해 결정한 사안이었다.

현 발체로페 제국은 가드로의 통치 아래 두 세력으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후의 모처인 가넷 공작가와 황제의 최측근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캐롤라인 후작가.

두 세력은 완벽한 권력 쟁취를 위해 수시로 부딪쳤다. 하지만 권력은 쉽사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그들의 중심엔 가드로가 있었고, 그는 적재적소의 순간에 황권을 발휘하며 끊임없이 두 세력을 경쟁시켰다.

그 결과 발체로페 제국은 대내적으론 제국민들이 살기 좋은 아주 평화로운 나라가 되었고, 대외적으론 대륙의 그 어떤 나라도 쉬이 넘볼 수 없는 강한 제국이 되었다.

그럴수록 황권은 더욱 강력해져 갔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모든 건 역대 황제 중 가장 강하고 영민한 가드로 페트로프가 처음부터 계산한 결과였으니까.

가드로는 자신이 이룬 업적을 리우리안이 이어 가길 바랐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리우리안은 정치적인 일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평생을 황후인 유스티아의 사랑스러운 아들로 살며 유일하게 흥미를 느끼는 검술에만 몰두했고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했다.

가드로는 리우리안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이대로 가다간 차기 황제로서의 자질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뿐일까. 십수 년에 걸쳐 공들여 만든 지금의 체제가 순식간에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안이 필요했다. 가드로는 절대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그 문제를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캐롤라인 후작.]

[예, 폐하.]

[후작에게 긴히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후작의 딸을 내게 태자비로 주지 않겠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이야기에 에드윅 캐롤라인은 쉬이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제 딸을 보내야 하는 자리가 제국의 망나니로 알려진 리우리안 페트로프의 곁이란 걸 단박에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황제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지 못한 건 그가 황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제안을 한 황제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신의로 빛났기 때문이라고.

거기까지가 이벨리아가 부친인 에드윅을 통해 들은 이야기였다.

[선택은 네 몫이다, 이벨리아. 폐하께서도 내게 선택권을 주신 거지, 강요를 하신 게 아니었어.]

그렇게 이야기를 끝맺은 에드윅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인자한 미소만 머금었을 뿐.

그 미소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얼마든지 주겠단 의미가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고민하지 않았다.

[할게요.]

고민의 여지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정치적인 목적의 결혼 제안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고 싶었다.

리우리안은 이벨리아가 줄곧 마음에 담아 온 특별한 사람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이유도 없이 숨이 가빠 왔고, 가슴이 떨렸다.

그 증상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잠잠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벨리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그를 제 마음에 품고 말았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가까스로 억눌렀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고, 이벨리아는 어제보다 오늘 리우리안이 더 좋아졌다. 그 찰나에 부친을 통해 듣게 된 제안이었다.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첫 시작이 정치적인 목적일지언정 그를 위한 내조에 온 힘을 쏟으면 분명 좋은 부부가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얼마 가지 못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이런, 비께서 기어이 여기까지 걸음 하셨군. 여긴 나의 개인적인 공간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찾지 마시라 분명 당부까지 했는데 말이야.]

[전하…….]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로 인사라도 하지 그래? 렐리, 인사해. 이쪽은 황태자비, 이벨리아 캐롤라인. 그리고 이쪽은 비도 알음알음 들어 알고 있을 나의 렐리아 넷트야.]

며칠째 머리카락 한 올 찾아볼 수 없던 리우리안이 심한 몸살에 앓고 있다기에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곧장 찾은 황태자궁이었다.

분명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했는데, 그의 안색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좋아 보였다.

그런 그의 곁엔 리우리안과 진짜 정을 통한 여자라고 소문나 있던 렐리아 넷트가 함께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상념에 빠져 있던 이벨리아는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후작님께 말씀드려서 불면에 좋은 다른 약을 구해 봐야겠어요.”

그렇게 말한 페일린이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벨리아는 서둘러 그녀를 만류했다.

“아니야, 페일린. 그럴 필요 없어. 황실 주치의도 찾지 못한 원인을 다른 의사라고 해서 찾을 순 없을 거야.”

“하지만 벌써 한 달이 넘게 힘들어하고 계시잖아요. 이렇게까지 잠을 못 이루시는데 아무런 약 처방도 없이 일시적일 거라고만 말씀하시니, 정말 너무하신 것 같아요!”

페일린은 주먹까지 옹골차게 말아 쥐곤 분통을 터뜨렸다.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그것만으로 이벨리아는 큰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페일린은 이 냉랭한 황궁 안에서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래서 더욱 페일린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황궁의 일원이었다. 고귀한 신분으로 검증되지 않은 약을 먹어 혹여나 앓기라도 한다면, 페일린은 물론 그 약과 관련한 모든 이가 처벌을 면할 수 없을 터였다.

“난 정말 괜찮아, 페일린. 어젠…… 어젠 잠을 잘 수 없는 이유가 있었어.”

이벨리아는 억지로나마 생긋 웃어 보이며 페일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둘러댄 이유가 페일린의 걱정을 더욱 배가시켰다.

“이유요?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한 걸음 더 다가온 페일린이 눈에 불을 켜고 물었다. 이벨리아는 의도에 없이 난처해졌다.

“그건…….”

새벽에 보았던 리우리안의 얼굴이 다시 한번 또렷하게 떠올랐다. 동시에 이벨리아는 속이 답답해졌다.

“……전하께서 돌아오셨어.”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한숨과 함께 사실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페일린은 쉬이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페일린은 이벨리아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고 나서야 혼란에 요동치는 눈으로 이벨리아를 보았다.

“전하요? 설마, 황태자 전하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벨리아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페일린의 낯빛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뜻하지 않은 정적이 이어졌다. 한참 말을 고르던 페일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폐하께서 조찬을 함께하자고 명하신 것도…….”

“그래, 맞아. 전하 때문일 거야.”

그렇게 대답한 이벨리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겼다.

그토록 원했던 남자를 손에 쥐고도 이벨리아는 아주 잠깐도 행복하지 못했다.

불면증을 차치하고서라도 걱정에 쉬이 잠을 이룰 수 없게 하던 남편이 돌아왔는데도, 안도는커녕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저 그가 돌아왔을 뿐인데, 그 하나만으로 그녀의 일상은 완벽하게 뒤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이렇게 뒤흔드는 남자의 마음속엔 여전히 그녀가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한 자락도 없는 것 같았다.

그뿐일까. 앞으로 잘 지내보자던 그의 말이 끔찍한 지옥문이 열렸음을 알리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이벨리아는 묵직한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황제의 명이 떨어진 약속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한다는 걸 알지만, 벌써부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금 한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때보다 불편한 아침이었다.

***

화려한 만찬장 내부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아래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리우리안이 팔짱을 낀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

너른 어깨가 일정한 박자로 오르내렸다. 그것을 제외하곤 그에게선 작은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밤새 한숨도 이루지 못한 탓이었다.

위험한 전장 속을 전전하다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집인데,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시끄러웠다.

시작은 황궁에 당도하기 무섭게 전해 들은 황제의 명이었다.
 

16857029577476.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