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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황태자의 귀환 (1/94)


  • 1화. 황태자의 귀환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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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산한 밤이었다.

    이벨리아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창밖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리게 빛나는 보름달 위로 짙은 먹색 구름이 유유히 지나갔다. 그 사이로 새어 나온 달빛이 바로 아래 굽이진 능선을 을씨년스럽게 비췄다.

    “후우…….”

    말없이 창밖 풍광을 응시하던 이벨리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밤이 아직 깊은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최근 들어 심해진 불면증 탓이었다.

    불면증이 시작된 건 한 달쯤 전부터였다. 정확히는 열감기에 의식을 잃곤 내리 사흘을 꼬박 앓고 일어난 후부터.

    [열이 떨어지지 않아 여러 가지 약재를 사용했습니다. 그 부작용으로 불면이 생기셨을 수도 있으나, 일시적일 겁니다.]

    황실 주치의의 소견은 그게 다였다.

    불면을 치료할 약 처방도, 제대로 된 원인을 찾아 주지도 않았다.

    이벨리아 캐롤라인은 허울뿐인 황태자비였다.

    그런 그녀가 매일 밤 깊은 고통 속을 헤매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의 고충을 덜어 줄 의사는 황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 이젠 두통까지 너무 심해…….”

    이벨리아는 미간을 좁히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근래 들어 수면 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들더니 급기야 심한 두통까지 일었다.

    새벽만 아니었어도 페일린에게 두통약을 부탁했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한밤중이었다.

    하는 수 없이 무릎을 끌어안은 채 심호흡을 반복했다. 그게 두통을 덜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안정을 되찾기까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제야 이벨리아는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창백해진 얼굴로 창 너머를 응시했다.

    초록색 눈동자로 시리게 빛나는 달빛이 빼곡하게 스며들었다. 만월은 이벨리아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환하게 빛을 뿜어내는 것이 저와는 다르게 생기 있어 보여서 좋았고, 누구의 허락 없이도 마음껏 바라봐도 되는 유일한 것이라 그렇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

    불현듯 떠오른 누군가의 얼굴에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때 끼이익, 예기치 못한 소음이 그녀의 여린 몸을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갔다.

    순간 놀란 이벨리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냐.”

    두려움에 휩싸인 목소리가 제법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벅저벅, 거리를 좁히는 묵직한 걸음 소리만이 그녀의 두려움을 더욱 배가시킬 뿐.

    이벨리아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캐노피 너머를 빤히 응시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이어지고, 곧 캐노피 뒤로 흐릿한 형상이 드러났다.

    이벨리아는 나이트가운을 꽉 움켜쥐었다.

    “이 시간에 태자비의 침실로 찾아오다니 목숨이 두 개쯤 되는 자인가 보구나.”

    “…….”

    “어서 신분을…….”

    긴장에 젖은 목소리가 단호히 명령을 내리던 찰나였다. 창문 새로 들어온 바람이 얇은 천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흐릿하기만 하던 형상이 더없이 또렷해졌다.

    그 순간 이벨리아는 몸을 딱딱하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는 길이니, 나라면 목숨이 두 개쯤 될 수도 있겠군.”

    달빛을 머금은 듯 시리게 빛나는 은발과 피로 물든 듯 착각을 일으키는 적안 그리고 냉기 가득한 목소리까지.

    발체로페 제국의 유일한 황태자이자 자신의 하나뿐인 남편, 리우리안 페트로프였다.

    “……리우리안?”

    이벨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남편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남자는 입술을 비뚜름히 감아올리며 한 발짝, 한 발짝 거리를 좁혀 왔다.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거칠게 뛰기 시작한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의 걸음이 멈춘 건 그녀의 바로 앞에 닿아서였다. 그는 기꺼이 한쪽 무릎을 굽히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이야, 이벨리아.”

    핏기 없는 여린 손을 부드럽게 부여잡곤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이벨리아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혼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장면이었다.

    그가, 그가 제 손등에 입을 맞추고 인사를 건네다니.

    “곧 황궁에 당도할 것이라 전서구를 보냈는데,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나? 그게 아니면…….”

    “…….”

    “혹 내가 전장에서 죽기를 바란 건가.”

    막 전장에서 돌아온 사람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나른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곧 그의 입가에 명백한 비웃음이 물들기 시작했고, 지독히도 익숙한 그 모습에 이벨리아는 정신을 번쩍 차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탐한 건 제국의 황태자비 자리가 아니었나?]

    [웬만하면 이쪽 길로 다니지 않았으면 싶군. 그대를 마주하는 게 나한텐 고역이라 말이야.]

    [고고한 척 구는 건 아비를 쏙 빼닮았군. 하지만 내 앞에서까지 힘들게 가식을 떨 필요는 없어. 어차피 난 그대에겐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니 말이야.]

    그는 매 순간 그랬다. 자신이 원수의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맹목적으로 싫어했고 증오했다.

    그가 그렇게 된 이면에 황후와 정부인 렐리아의 조악한 술수가 있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땐 이미 숱한 모욕과 멸시에 가슴이 너덜너덜해졌을 때였고, 저를 향한 리우리안의 편견이 너무도 견고하게 다져진 후였다.

    그런 그를 상대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황후의 사랑스러운 아들로 살 뿐인 그는 언제나 그녀를 황태자비의 자리에서 내쫓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만 노렸다.

    그런 남자였다, 그녀의 남편은.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다.”

    이벨리아는 본능처럼 그의 시선을 피하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전장에서 죽기를 바랐다니, 1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자신을 향한 적개심으로 가득한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된다라…….”

    “…….”

    “그럼 이유를 설명해 보겠어?”

    “…….”

    “내가 죽길 바란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잔뜩 겁을 집어먹은 표정인 건지 말이야.”

    멎은 듯했던 비웃음이 다시금 리우리안의 입매를 타고 선명히 떠올랐다.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안면 근육을 딱딱하게 굳혔다.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그대가 놀랐다는 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어. 내가 궁금한 건 그 이유지.”

    “……전하께선 저의 하나뿐인 주군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전하의 죽음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물은 건 왜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건지 그 이유에 대한 건데, 그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는군. 정말 내가 영영 황궁으로 돌아오지 못하길 바란 건 아닌가?”

    끔찍한 모함이나 다름없는 말을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뱉었다. 그 순간 이벨리아는 아주 오랜만에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하아.”

    목에 걸렸던 숨이 토해지듯 터져 나왔다. 심장이 잘려 나간 것처럼 통증이 일고, 정신이 멍해졌다.

    어떤 소식도 없이 1년 만에 그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그녀에겐 혼란 그 자체였다. 그의 모진 말까지 견딜 면역력이 아직 준비되기 전이었다. 그러니 그와의 대면을 가능한 한 빨리 피하는 것이 좋았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벨리아는 최대한 냉랭한 목소리로 이만 돌아가 줄 것을 청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리우리안이라면 주제도 모르고 밀어내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녀의 말에 곧 한껏 뒤틀린 눈빛으로 쏘아볼 터였다.

    매몰차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인이 박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듯 살기 가득하던 눈빛.

    이벨리아는 어서 그 시선이 자신을 향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고통까지 감수한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래, 시간이 늦었지.”

    지독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언뜻 흥미로운 빛을 띠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이벨리아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어느덧 굽혔던 무릎을 편 그가 이채 어린 적안으로 지긋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찾았어. 전장에서 보낸 권태로운 1년을 이곳에서 보상받아 볼까 하고 말이야.”

    귓가를 은밀하게 휘감는 목소리가 소름 끼치리만치 음험했다. 리우리안을 바라보는 이벨리아의 동공이 일순 밀려오는 두려움에 요동쳤다.

    그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동시에 이벨리아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에 굴하지 않고 리우리안 역시 이벨리아를 따라 침대 위로 올랐다.

    이벨리아는 리우리안이 다가온 만큼 뒤로 기어 거리를 두었다. 그러고 나면 그는 보란 듯이 더 큰 움직임으로 그녀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혀 왔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는 자리에 닿고 나서야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벨리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 위의 리우리안을 바라보았다.

    음심으로 가득한 눈동자가 그녀를 발라먹을 듯 샅샅이 훑었다.

    그가 가소롭다는 듯 탄식을 뱉었다.

    “두려워하고 있군, 나를.”

    “…….”

    “그대의 말대로라면 난 비의 하나뿐인 주군인데 말이야.”

    그러니 하나뿐인 주군의 죽음을 바랐을 리 없다던 그녀의 말은 완벽히 틀렸다는 듯, 그가 속삭였다.

    파리하게 질린 이벨리아의 입술이 한 치의 거짓 없이 가냘프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기분 좋게 관망하던 그가 일순 몸을 일으키곤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제야 이벨리아는 참았던 숨을 급하게 쏟아 냈다.

    리우리안은 아량을 베풀 듯 이벨리아의 호흡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얼마간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그녀의 잇새로 고른 숨이 새어 나왔을 때였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당분간 다시 전장에 나가는 일은 없을 거야. 지난 1년간 내가 그렇게 만들었거든. 엘리아 왕국뿐 아니라 그 어떤 누구도 이 발체로페 제국을 감히 넘볼 수 없게 말이야.”

    “…….”

    “그러니 잘 지내보자고, 이벨리아.”

    의미를 알 수 없는 인사였다.

    말끝에 씨익 웃어 보인 그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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