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누가 누구랑 한 침대에서 뒹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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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누가 누구랑 한 침대에서 뒹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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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누가 누구랑 한 침대에서 뒹굴어?
2023.08.26.
“반센트?”
수풀 사이에서 나온 반센트를 본 델리나가 총을 내렸다.
“거기에서 뭐 하고 있어?”
“함정 설치.”
“아하.”
“한번 걸리면 죽어도 못 빠져나오게 해 놨지.”
저 근처는 절대로 가지 말자고 델리나는 다짐했다. 그런데 수풀이 또 한 번 요란하게 흔들리더니 에스텔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델리나네?”
같이 함정을 설치한 듯 에스텔은 온몸에 잎사귀를 한가득 붙이고 있었다. 그 뒤로는 후작가의 기사들이 열심히 함정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 보네? 너도 여기서 사냥하려고?”
“그럴까 했는데……. 함정 설치한 거 보니까 다른 데 가는 게 좋겠다 싶은데요.”
“아무래도 그렇지. 사실 여기서 반센트랑 내 합작품 실험할 거거든.”
“합작품이요?”
“응. 여러 개가 있기는 한데 그중에 하나를 보여 주자면……, 짠!”
에스텔이 꺼내 든 것은 총이었다. 외관은 평범했다.
“……그냥 총 아니에요?”
“응. 그런데 발사되는 건 다르거든. 잘 봐, 예를 들면…….”
예시를 보여 주고 싶은지 에스텔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때마침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 한 마리가 보였다.
“잘 봐. 내가 저기에 한번 쏴 볼 테니까.”
그 말에 델리나도 흥미롭다는 얼굴로 새 쪽을 바라보았다.
“자, 이렇게 쏘면……! 음?”
자세를 잡은 에스텔이 방아쇠를 당겼지 총은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자 에스텔이 총을 바짝 당겨 살펴보기 시작했다.
“뭐지? 부품 하나가 어긋났나?”
“원래는 뭐가 발사되는 건데요?”
“수면탄이라고. 맞추는 순간 가루처럼 퍼져서 잠들게 하는 건데…… 악!”
불발의 원인을 찾듯 총을 연신 달칵거리던 에스텔이 손으로 총을 탁 내리쳤다. 그러자 총구에서 수면탄이 발사됐고 그대로 에스텔의 몸을 직격했다.
“후작님!”
델리나가 놀라서 외치는데 연기처럼 퍼진 가루는 그대로 에스텔의 온몸에 달라붙었다. 그러자 에스텔이 스스로도 웃긴 듯 입꼬리를 올렸다.
“와, 이거 효과 한번 엄청ㄴ…….”
마지막 말을 채 잇지 못하고서 에스텔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에스텔의 주위로 기사들이 우르르 다가갔다.
“……잠드셨습니다.”
“…….”
수면탄을 스스로에게 쏘고 잠든 에스텔이었다. 황당한 상황에 델리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익숙하다는 얼굴이었다.
“괜찮으신 거야, 후작님?”
“인체에 해는 없고 잠만 자는 거니까 괜찮아.”
“어……. 근데 다른 곳으로 옮기긴 해야겠다. 저대로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말하지 않아도 기사들은 알아서 에스텔을 안아 들고 있었다. 반센트가 에스텔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가는데 그때 델리나 건너편으로 또 누군가가 나타났다.
“…….”
“…….”
‘왜, 하필…….’
요란한 소리를 듣고 온 듯 데미안이 서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던 데미안을 반센트가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봤다.
“너도, 너도 같이 가 봐. 후작님 살펴봐야지.”
이대로 있다가는 상황이 상당히 어색해질 것 같아서 델리나는 빨리 반센트를 보내려 했다. 하지만 반센트의 표정은 이미 좋지 않았다.
“응? 얼른.”
대치가 길어질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델리나였다. 이윽고 반센트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근처에 있으니까 상관없나.”
“응?”
“그럼 먼저 간다.”
여전히 잠에 빠진 에스텔을 말에 싣고서, 반센트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다가 반센트가 고개를 돌리고 데미안에게 말했다.
“이따 가시려면 저쪽 길로 가시죠.”
“…….”
“안전하니까.”
반센트가 추천한 곳은 각종 함정이 설치된 길목이었다. 친절하게 손으로 방향까지 가리킨 반센트가 곧 기사들과 함께 사라졌다.
“헬리움 제국에서는 안전하다는 뜻을 다르게 쓰나 본데.”
“당연히 아니죠. 하여튼 그쪽으로 가지는 마세요. 한번 걸리면 진짜 큰일 날지도 모르거든요.”
반센트가 사라지자 데미안이 자연스레 델리나에게 다가왔다. 사냥을 할 생각인지 데미안의 허리에는 칼이 채워져 있었다.
“다른 기사들은요?”
“딱히 같이 있고 싶지는 않아서, 나 혼자 사냥한다고 했어.”
하기야 기사들 또한 데카르의 사람들일 테니 데미안의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것이다.
“말한 게 있으니 사슴 하나는 잡고 돌아가야지.”
“……진짜 잡아서 저 주시려고요? 아까 같은 대사 하면서?”
상상만 해도 싫은 듯 델리나의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제가 황자님 입장 생각해서 구애 정도야 그냥 넘어가겠다고 하긴 했지만요. 제발 그런 대사는 안 하시면 안 될까요? 그냥 아무 말 없이 주셔도 감사한 척 받을 테니까요.”
“이미 대사도 다 생각해 뒀는데.”
“그 대사 고이 마음속에 간직하시고요. 아, 사슴 잡는다고 하셨죠? 아니면 제가 잡고서 그냥 황자님이 주셨다고 할게요. 그게 더 낫겠네요.”
“영애가 잡는다고? 사슴을?”
“못 믿으시겠으면 보여 드릴까요?”
의심스러워하는 데미안의 눈빛에 델리나가 단검을 뽑아 옆에 있는 나무 기둥으로 던졌다. 그러자 팔랑이며 떨어지고 있던 나뭇잎이 단검에 꿰뚫리며 나무 기둥에 날아가 박혔다.
“…….”
“어때요? 이만하면 괜찮죠?”
“응.”
델리나의 실력에 조금 놀란 듯, 데미안이 박혀 있는 단검에 시선을 보냈다. 단검을 도로 뽑은 델리나가 검집에 칼을 끼웠다.
“광대는 이런 것도 배우나?”
“뭐…… 일종의 생계형 기술이죠. 그냥 조금씩 해요.”
“그러고 보면 후작가에서는 공연도 했었지.”
“그렇죠. 공연도 하고, 검술도 하고, 총도 좀 쏘죠.”
델리나의 말에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왜 그 사람이 영애한테 흥미로워하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
“왜?”
“설마 황자님, 진짜 저한테 반하신 건 아니시죠?”
“…….”
“그러면 많이 힘드실 텐데요. 아쉬우시겠지만 전 진짜 황자님께 마음이 없거든요.”
진지한 델리나의 표정이 어이가 없는 듯 데미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영애는 진짜 내 취향 아니야. 한 방에 같이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네?”
“그러니까 걱정 말라고.”
반했냐는 소리에 딱 잘라 말하는 데미안이었다. 그러자 델리나도 어이없다는 듯 온몸을 떨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저야말로 황자님이랑 일 년, 아니 평생 동안 같은 방을 써도 문제없어요! 침대에서 같이 잘 수도 있는데요?”
“어, 나도. 영애랑 한 침대에서 뒹굴어도 전혀 문제없어.”
“와, 그러면 저는…….”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취향이 아닌지를 대결하듯, 점차 두 사람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때 두 사람 사이를 가르는 음성이 있었다.
“누가 누구랑 한 침대에서 뒹굴어?”
헉.
몹시도 분노에 찬, 그럼에도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 데미안과 델리나의 시선도 빠르게 그에게 향했다. 그곳에는 살벌한 기세의 벨리온이 있었다. 그 뒤로 칼릭스, 펠릭, 대공가의 기사들이 서 있었다.
“무슨 소리지, 그게.”
‘설마 아까 반센트가 중얼거렸던 게……!’
근처에 있다는 말이, 벨리온이 근처에 있다는 뜻이었던 모양이었다. 참으로 좋지 못한 상황이 연출되어 델리나가 재빠르게 수습하려고 했다.
“어디부터 들으셨는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한 침대에서 뒹굴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황자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은데.”
데미안이 황족이라는 자각은 저 멀리 사냥터 밖에 던져 놓은 듯, 상당히 말이 험해진 벨리온이었다. 처음으로 벨리온과 대면한 데미안은 조금 움찔하더니 곧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서로의 취향을 놓고 이야기하다가 나온 말입니다. 한 침대에서 뒹굴어도 아무 일 없을 정도로 서로 취향이 아니라는 뜻이었고요.”
“왜 광대가 별론데.”
오해가 풀리자마자 이번에는 다른 것에 분노하는 벨리온이었다. 그의 말에 경악한 델리나가 다시 나섰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많은데요. 저마다 취향도 다 다르고요. 그러니까 별로라는 뜻이 아니라, 함께 결혼해서 살 것 같지 않다는 뜻이죠. 설마 전하, 저를 루넨 황자님이랑 결혼시키실 생각이셨어요?”
결혼이라는 말에 정신을 차린 듯 벨리온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델리나가 급히 데미안을 향해 눈짓했다.
‘살고 싶으면 얼른 가요.’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뵙지요.”
본능적으로 물러서야 한다는 걸 알아차린 듯 데미안이 짧게 인사하고서 몸을 돌렸다. 데미안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델리나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제야 펠릭이 델리나에게 다가왔다.
“와, 아가씨. 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진짜 루넨 제국으로 결혼하러 가시는 줄 알았잖아요.”
“걱정 마.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취향이 아니라는 데미안과의 대화 이후로 더더욱 단호해진 델리나였다. 그러자 펠릭이 안심한 얼굴로 델리나에게 빠르게 소곤거렸다.
“예, 그리고 황자님 빨리 보내신 것도 정말 잘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아까 그 말 듣고 전하께서 진짜……. 그냥 전쟁 치를 뻔했다니까요.”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느꼈어.”
델리나가 펠릭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사람들이 유독 많이 따라온 것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나저나 어쩌다가 단체로 이렇게 온 거야?”
“말도 마세요. 디아몬 공작가랑 사냥감 대결하려고 이동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하께서 아가씨 목소리가 들린다고 진로를 바꾸는 바람에 저희도 부랴부랴 달려왔습니다.”
“……누구랑 사냥 대결을 하고 있었다고?”
디아몬 공작가라는 말에 델리나가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하지만 펠릭이 다시 답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저 멀리서 익숙한 인물들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