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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가슴이 엄청 뛰었어 (84/94)


84화 가슴이 엄청 뛰었어
20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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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듯해 델리나는 곧장 정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바로 젠을 발견했다.

“젠!”

델리나의 목소리에 젠이 수풀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베티의 말대로 젠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머리와 옷에는 풀과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안색도 나빴다.

“왜 그래? 무슨 일 있는 거야? 어디 다쳤어?”

“델리나…….”

델리나가 걱정스레 젠의 상태를 살피자 잔뜩 풀이 죽은 젠이 우물거렸다.

“나, 잃어버렸어…….”

“응? 뭐를?”

대답 대신 젠이 손가락으로 제 목을 가리켰다. 젠의 목이 휑했다. 그러자 델리나도 잃어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스카프 잃어버린 거야?”

다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면서도, 스카프를 잃어버렸다는 말에 델리나가 더욱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스카프가 젠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어쩌다가?”

“화단에서 꽃 심다가 흙이 묻어서 물에 씻어서 말리다가……. 자고 일어나니까 없었어.”

물에 젖은 스카프를 햇빛에 말리려 하다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찾고 있었던 거야?”

“응.”

“근데 지금까지 안 나오는 걸 보면…… 어쩌면 바람에 날아간 걸지도 모르겠는데.”

“…….”

그 말에 젠이 눈물을 글썽이자 재빠르게 델리나가 말을 바꿨다.

“그럴 수도 있긴 한데! 아직은 모르는 거지 뭐. 어쩌면 바닥에 묻혀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도 같이 찾아 줄게.”

“응……. 고마워.”

델리나는 재빨리 양팔을 걷어 올리고 수풀을 뒤지기 시작했다. 젠도 스카프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지만,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충격이긴 하겠지. 그동안 몸에서 거의 뗀 적이 없었는데.’

제가 선물해 준 스카프를 이토록 아끼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이런 일이 생기니 여러모로 걱정스러웠다. 젠의 성격상 분명 스카프를 찾을 때까지 정원에 있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 부근에서 잃어버린 거야?”

“응. 여기 나뭇가지에 스카프 매달고 잠깐 낮잠 자고 있었어.”

델리나는 혹시 바람에 날아갔까 싶어 벽을 올려다봤다.

“혹시 벽 너머는 가 봤어?”

“갔어. 근데 없었어.”

“그랬구나. 음, 그러면 사용인들한테는? 정원 관리하는 사용인들한테는 물어봤어?”

“응. 다들 못 봤대.”

하기야 젠의 스카프를 모르는 사용인은 없을 테니까. 발견했으면 바로 젠에게 돌려주러 왔을 것이다. 이윽고 델리나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델리나는 여차하면 최대한 비슷한 스카프라도 찾아서 선물할 생각까지 했다.

‘저렇게 열심히 찾고 있는데.’

땅 끝까지 팔 듯 젠은 손으로 흙을 파고 있었다. 델리나가 다시 정원을 둘러보는데 멀리서 사용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지금 막 사냥제 옷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 그래?”

옷이 왔다는 것을 알리러 온 듯, 사용인이 전달하자 델리나는 젠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선을 눈치챈 젠이 입꼬리를 올렸다.

“나 괜찮아. 델리나.”

“됐어. 옷이야 나중에 입으면 되는 건데, 뭘. 그냥 같이 찾자.”

“아냐. 내가 잃어버린 거니까, 내가 찾아볼게. 얼른 가 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는 젠을 보니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젠.”

“응?”

“……혹시, 혹시라도, 스카프 못 찾으면 내가 하나 또 선물해 줄 테니까 너무 무리해서는 찾지 마. 알겠지?”

“응, 응. 알겠어.”

말은 알았다고 했지만 젠의 얼굴엔 포기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델리나는 뒤돌아서 가면서도 내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저 정도면 새벽까지 찾아다닐 것 같은데. 밥도 제대로 안 먹은 것 같고. 잠은 제대로 잤나?’

나중에 음식이라도 가져다줄까 생각하는데 문득 델리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근데, 젠이 원래 그렇게 곤히 잠드는 편이었나?’

스카프가 날아갈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었다면 분명 젠은 잠에서 깼을 것이다. 남들에 비해 기척이나 소리에 예민한 젠이었기에 더더욱. 하지만 젠은 스카프가 사라지는 것도 모른 채 잠을 잤었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을 말이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 응.”

사용인의 목소리에 걸음을 재촉했지만 어쩐지 점점 의구심이 들어서, 델리나의 얼굴은 그리 좋지 못했다.

* * *

“없어, 없어…….”

델리나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지만 젠은 아직도 스카프를 찾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원의 구석까지 모조리 살펴본 젠이 실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젠은 불안한 듯 제 휑해진 목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잃어버린 저를 자책하듯 어깨는 한없이 처져 있었다.

“!”

그 순간 수풀 너머로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젠은 반사적으로 눈을 번뜩이며 공격 태세를 취했다.

“아, 나야. 놀랐어?”

셀린이 모습을 드러내자 젠이 얼굴을 풀었다. 하지만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여기 왜 있어?”

젠의 물음에 셀린은 대답 대신 웃으며 뒤로 감춰 놨던 것을 꺼내 들었다. 젠의 스카프였다.

“이거 찾고 있었지?”

“!”

셀린의 손에 들린 하늘색 스카프를 본 젠의 눈이 커졌다.

“내 방 창가에 걸려 있더라고. 딱 보니까 네 것 같아서.”

“맞아, 내 거야.”

다급해진 젠이 스카프로 손을 뻗었지만 셀린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금 그 손으로 만졌다가는 다시 더러워질 텐데.”

셀린의 말에 젠이 흙이 묻어 더러워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셀린이 다시 젠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냥 내가 매줄게. 그러면 흙 안 묻고 좋잖아.”

“…….”

“얼른.”

젠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 셀린이 재촉하자 잠시 머뭇거리던 젠이 셀린의 키에 맞춰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때 셀린의 몸에서 풍겨오는 향에 젠이 몸을 움찔했다.

“……?”

하지만 젠은 스카프를 매주는 셀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셀린은 천천히 스카프를 묶어 주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젠의 몸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젠은 심장이 빠르게 뛰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 다 됐다.”

그 사이 스카프를 다 묶은 셀린이 젠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몸이 이상한 것을 느끼며 젠은 몽롱해진 눈으로 셀린을 바라보았다. 젠을 보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셀린이 자연스레 젠에게 손을 뻗는, 그 순간이었다.

“젠!”

두 사람 간의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깨듯,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멍한 표정을 짓던 젠이 정신을 차리고서 고개를 홱 돌렸다.

“델리나!”

그렇게 외친 젠이 신이 난 얼굴로 곧장 델리나에게 달려가 제 스카프를 가리켰다.

“나, 이거 찾았어.”

“그래? 다행이다. 다행인데…….”

젠에게는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델리나의 시선은 셀린에게 향해 있었다. 다급히 온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써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델리나가 젠에게 물었다.

“스카프, 혹시 셀린이 준 거야?”

“응. 창가에 있었대.”

“……그래?”

신이 난 젠의 뒤로, 셀린이 천천히 다가왔다. 미소 띤 얼굴로 셀린이 물었다.

“정원에는 무슨 일로 온 거야, 델리나?”

“……혹시 젠이 스카프를 밤늦도록 찾을까 봐 걱정돼서 왔어.”

“그래? 그러면 다행이다. 이제 스카프 찾았으니까.”

다행이라는 듯 웃으면서 셀린이 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나 먼저 들어가 볼게. 둘 다 잘 자.”

“잘 가! 그리고 고마워.”

젠이 셀린에게 감사 인사를 잊지 않고 전했다. 한껏 신이 난 채 손을 흔드는 젠 뒤에서 델리나는 침묵하고 있었다.

“젠.”

비로소 셀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델리나가 입을 열었다.

“혹시 셀린이랑 있었을 때 무슨 일 없었어?”

유달리 깊게 잠을 잔 젠과 사라진 스카프. 젠이 스카프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안 이후, 델리나는 줄곧 셀린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셀린이 정원에 갔다는 사용인의 말에 델리나는 다급히 정원으로 쫓아왔다. 그리고 스카프를 찾았다는 셀린과 젠을 만났다.

“응? 무슨 일?”

“아무거나.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거나 몸이 어딘가 안 좋았다거나, 이런 거.”

“음…….”

젠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가슴이 엄청 뛰었어.”

“뭐?”

“얼굴도 빨개지고.”

젠의 입에서 나온 말에 델리나가 놀라 물었다.

“왜, 왜 그렇게 됐는데?”

“나도 몰라. 그냥 뛰었어.”

스스로도 제 변화의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젠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환하게 웃었다.

“근데 델리나가 내 이름 부르니까 사라졌어.”

“……그래? 이후에는 뭐 없었고?”

“응, 응.”

“그랬구나……. 아무튼 다행이네. 스카프 찾아서.”

“응!”

스카프를 되찾자 젠의 얼굴이 완전히 펴졌다. 델리나는 젠을 보고 웃다가 셀린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

분명 델리나는 봤다. 멀쩡해진 젠을 보고서, 한순간이지만 얼굴을 찌푸린 셀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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