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죽이지 마요
(81/94)
81화 죽이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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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죽이지 마요
2023.08.20.
“여기까지만 하자!”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델리나가 지친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예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운 델리나가 손을 내저었다.
“끝, 끝! 이제 더는 못 해!”
“벌써요?”
흐느적대는 델리나를 펠릭이 웃으며 내려다봤다.
“어떻게 되신 거예요, 아가씨. 평소보다 집중력이 떨어지시는데?”
“……많이 티 났어?”
“네.”
펠릭의 말대로였다. 사실 대련을 하면서도 델리나는 완전히 검에 집중하지 못했다. 바로 셀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대화를 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멀리서라도 볼까 싶어 슬쩍 응접실을 찾아갔지만, 이미 이야기는 끝나 있었고 셀린은 먼저 돌아가기까지 한 상태였다. 델리나는 홀로 대공가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물어봐도 역시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고.’
대공가로 돌아와 나중에 셀린에게 데미안과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물었지만, 셀린의 입에서는 이렇다 할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상황이었다. 델리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혹시 사냥제 때문에 그러세요?”
펠릭이 델리나의 복잡한 얼굴을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이네요. 아가씨는 사냥제가 처음이시죠? 이제 막 성인이 되셨으니까요.”
위험한 맹수를 상대하는 것이다 보니 사냥제에 아이들은 참석할 수 없었다. 과거에도 사냥제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델리나는 사냥제가 정말 처음이었다.
“너무 긴장 안 하셔도 돼요. 사실 형식적인 행사 중 하나에 불과하니까요. 그래도 가장 무거운 맹수를 잡으면 뭐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가씨도 사냥 참여하실 거죠?”
“응, 별일 없는 이상 그럴 것 같은데.”
델리나의 실력으로는 딱히 막사에 앉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펠릭이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면 역시 그건가요?”
“응?”
“손수건 줄 분 결정하는 거요. 그것 때문에 고민하셨던 거죠?”
“…….”
델리나가 침묵하자 펠릭이 신이 난 듯 말을 이었다.
“가족분들께 줄 수도 있지만, 역시 이건 영애분들께서 영식분들께 주는 게 제일 구경하는 재미가 있으니까요. 저도 매년 가서 보는데 정말 청춘이라니까요.”
펠릭의 말대로 사냥제는 사냥에 참여하지 않는 영애들에게도 중요한 행사였다. 마음에 드는 영식에게 제가 만든 손수건을 전해 줄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영식들은 받은 손수건을 자신의 손목에 묶는 것으로 그 마음에 답하고는 했다.
“아가씨는 어떻게 할 예정이세요? 오빠분 것과 전하, 그리고 아가씨께서 마음에 두신 분 것까지 해서 세 장? 아니면 역시 그냥 한 장일까요?”
“……그거 생각한 건 아니야. 근데 알고는 있지. 그렇지 않아도 요새 에일리한테서 편지가 엄청 오거든.”
누구한테 손수건을 줘야 할지, 무슨 색으로 자수를 놓을지 편지에 세세히 적은 에일리였다. 편지를 떠올리며 델리나는 지친다는 표정을 지었다.
“펠릭은 손수건 같은 거 안 받아 봤어?”
“저요?”
“응.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손수건을 주고받는 것은 귀족들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종종 그 밑에 있는 사용인들도 손수건을 주고받았기에, 델리나는 펠릭도 받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럼요. 거기서 제가 전전 애인을 만났는데요. 그때 잡은 사냥감도 선물하고 그랬죠. 사실 그게 비공식 1등 사냥감이었을걸요? 정말 엄청 컸는데.”
추억에 잠긴 얼굴로 펠릭이 말을 이었다.
“헤어지고 나서도 다른 여인들한테 매년 받기는 했었습니다. 정말 어떻게 해서든 제 손목에다가 손수건을 걸려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데……. 하아, 정말이지. 손목은 하나뿐인데 어쩌겠습니까? 다 제가 너무 지나치게 잘난 탓인걸요.”
“어, 어. 그래. 나도 너무 지나치게 많은 걸 물었다. 이제 그만 말해도 돼.”
펠릭의 말에 없던 힘도 생겨나 도로 자리에서 일어난 델리나였다.
“아무튼 오늘 대련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또 부탁할게.”
“어휴,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아가씨랑 대련할 때 전하가 안 찾으시니 너무 편한데요. 매일 찾아 주셔도 됩니다.”
펠릭을 뒤로하고 훈련장에서 나온 델리나는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그때 하녀 한 명이 옆을 지나갔다. 델리나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잠깐, 잠깐만.”
“예?”
하녀는 최근에 셀린 담당으로 배정된 이였다. 그녀의 얼굴을 기억한 델리나가 물었다.
“지금 셀린 방에서 나온 거지? 셀린 방에 있어?”
“아뇨. 아가씨는 지금 막 정원에 가셨습니다.”
“정원?”
“예, 잠시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겠다고 하셔서 준비해 드리고 오는 참입니다.”
“……그래?”
잠시 눈을 굴리던 델리나가 하녀에게 조심히 물었다.
“혹시 그 외에 따로 뭐 가져간 건 없었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음……. 상자 같은 거나, 뭐 그런 작은 거?”
“아뇨, 없으셨습니다.”
“그래? 알았어. 고마워.”
‘하긴. 그런 걸 대놓고 가지고 돌아다니진 않겠지?’
상자 안의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가지고 다닌다면 품 안에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더 컸다. 델리나는 정원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정원에서 셀린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말 티타임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어딘가에서 차 향기가 풍겨 왔기 때문이었다.
“…….”
셀린을 발견한 델리나는 그대로 우뚝 선 채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정말 티타임을 가지려고 했는지 테이블에는 차와 과자가 놓여 있었고, 그 앞에 셀린이 앉아 있었다. 그것도 눈을 감은 채 말이다.
‘자고 있어?’
차와 과자를 옆에 두고 셀린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낯선 모습에 델리나가 몸을 주춤거렸다.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이라니.
‘ 황궁 가는 마차 안에서도 꼿꼿하게 앉아 있었는데.’
가는 길이 제법 피곤할 법도 하건만 셀린은 내내 웃으며 괜찮다는 말만 했다. 덩달아 델리나도 졸음을 애써 참은 채 정신을 바짝 차렸다.
“으음…….”
그때 미간을 찌푸린 셀린이 입을 달싹였다. 워낙 작게 중얼거려서 델리나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셀린의 입술은 멈추지 않았고, 급기야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놀란 델리나가 빠르게 다가갔다.
“싫어, 뜨거워……. 죽이지 마요…….”
셀린의 말을 들은 델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엄마…… 아빠…… 선생님…….”
‘선생님?’
셀린의 안색이 점점 나빠졌다. 식은땀을 흘리며 가쁜 호흡을 내쉬는 셀린을, 델리나가 흔들어 깨웠다.
“셀린!”
델리나의 외침에 셀린의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눈앞에 있는 델리나를 보고서 크게 놀란 셀린이 두 팔을 거세게 휘저었다.
“싫어! 저리 가요!”
“…….”
“가, 가란 말이야!”
“나야, 나. 델리나.”
시선은 델리나를 향했지만 셀린이 바라보는 것은 델리나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정신을 차린 듯 셀린의 팔이 스르륵 떨어졌다.
“……델리나?”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자각한 듯 셀린이 당황한 얼굴로 빠르게 말했다.
“그게, 그러니까, 이건…… 내가 밤에 잠을 못 자서……. 나도 모르게 여기서 잠들었나 봐. 악몽을 꿔서…….”
“…… 아, 그래?”
이토록 당황한 셀린은 처음이었기에 델리나도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른 채 입을 달싹였다. 셀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나 먼저 가 볼게.”
델리나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셀린이 급하게 자리를 떴다. 델리나 또한 셀린을 잡을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사라져가는 셀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대공가의 고요한 복도, 그 한가운데에 벨리온이 서 있었다.
“…….”
벨리온의 시선은 한 여인의 초상화를 향해 있었다.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여인의 이름은 마리엔. 셀린의 어머니이자 벨리온의 누나였다.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 벨리온. 나 정말 잘 살게.]
대공가를 떠나기 전 마리엔은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마리엔과의 대화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대공가에 돌아온 것은 당시 건네주었던 목걸이와 그 딸이었다.
“……행복했었나.”
제 앞에서 힘든 티를 내지 않았던 마리엔이었다. 그랬기에 그녀가 울피림의 성을 버리고 평민으로 살아가겠다고 한 것은 벨리온에게도 조금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제 누나의 행복을 빌며, 벨리온은 마리엔을 잡지 않았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는 순간, 황실에서 눈치챌 가능성이 있었기에 지난 몇십 년을 모른 척 살아왔었다. 그랬기에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녀가 어딘가에 살아 있어서, 금방이라도 제게 괜찮다며 미소 지어 줄 것만 같았다.
“전하.”
하지만 이제는 현실을 직시할 때였다. 펠릭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벨리온은 초상화에서 시선을 돌렸다.
“디아몬 공작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전하께서 조사를 의뢰하신 것도 완료되어 곧 보내 주신다고 합니다.”
펠릭의 말에 벨리온의 눈썹이 올라갔다.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였다.
“편지로 보내지 않고 직접 온다는 건가?”
웬만해서는 대공가에 찾아오는 일이 거의 없는 에드윈이었다. 에드윈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벨리온이 묻자 펠릭이 답했다.
“예, 그런데 오시는 건 공작님이 아니시랍니다.”
“그러면…… 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지.”
벨리온이 누가 온다는 뜻인지 바로 이해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마차 소리와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