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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얼른 벗어 (80/94)


80화 얼른 벗어
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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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역시.’

굳은 듯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아슈드를 본 델리나가 작게 신음을 냈다. 사실 평범녀 능력에는 또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능력 제한 둘. 이상하리만큼 아슈드를 포함한 다섯 명에게는 능력이 안 걸린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다섯 명에게는 평범녀 능력이 통하지 않았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너……?”

“침상 정리는 모두 해 두었습니다. 들어오시지요.”

이상한 아슈드의 반응에 보좌관이 덩달아 델리나를 쳐다보자 델리나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이 이상 다른 사람 눈에 띄었다가는 좋을 일이 없었다.

“하녀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 그러니까…… 됐으니까 이만 가 봐.”

보좌관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다급히 방문을 닫는 아슈드였다. 둘만 남게 되자 아슈드의 표정에 경악이 서렸다.

“너 뭐야. 왜 여기 있어? 그 꼴은 또 뭐고? 왜 하녀인데?”

“사정이 좀 생겨서……. 기술 썼다가 엉뚱한 사람한테 잡혔거든.”

“그럼 뭐야, 광대 기술 부작용 같은 거야?”

“그런 셈이지.”

그 말에도 아슈드는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델리나가 아슈드에게 성큼 다가왔다.

“자, 그러니까 얼른 벗어.”

“뭐, 뭐?”

“이미 이렇게 들어온 거, 너 옷시중 들어 줘야 할 거 아니야. 지금 나가면 빨리 나왔다고 의심한다고.”

이렇게 된 거 하녀로서의 의무를 다하자 생각한 델리나였다. 하지만 아슈드는 제 옷깃을 여미기 바빴다.

“됐어! 원래도 나 혼자 갈아입거든? 그러니까, 저기 가서 뒤돌아 있어.”

“저기 책상 쪽?”

“어, 얼른.”

자신을 멀리 내쫓듯 책상 앞으로 가 딱 붙어 서 있으라는 아슈드의 말에 델리나는 순순히 그 앞에 가서 뒤돌아섰다. 그러자 옷을 갈아입는 듯 뒤에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려고 준비하는 거야?”

“어.”

이제 막 해가 지려고 하고 있었다. 조금은 이른 아슈드의 취침에, 델리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요즘 일 많이 힘들지?”

하이르의 상태는 델리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보다 조금 이르긴 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하이르의 건강은 그리 좋지 않았었다. 아슈드는 황제의 일을 전부 떠맡고 있었고, 그래서 델리나도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힘들긴. 이 정도는 다 하는 건데. 그냥 일도 없으니까 일찍 눕는 거야.”

하지만 델리나는 아슈드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풀을 발견했다. 풀에서 느껴지는 청량한 냄새에, 델리나는 화분이 무슨 용도로 아슈드의 책상에 놓여 있는지 깨달았다.

‘보통 잠 깰 때 많이 쓰는데. 아니면 집중할 때 쓰거나.’

괜찮다고는 하지만, 방 안 곳곳에서는 아슈드의 과중한 업무량이 느껴지는 듯했다. 델리나가 쌓여 있는 서류들을 보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아슈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너, 이상한 소문이 들리던데.”

“아, 응. 벌써 거기까지 퍼졌어? 로즈립 후작가 모임에서 일?”

예상했던 일인 듯 델리나가 태연히 대답했다. 그러자 초조해지는 쪽은 아슈드였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진짜 받아 주기라도 한 거야?”

“아니, 전혀. 거절했지. 알잖아. 나랑 루넨 제국과의 관계.”

“…….”

“그런데 거기도 거기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참 뭐라 하기도 그렇더라고. 근데 본격적이긴 했지. 반지까지 준비했었다니까?”

당시 모두를 충격에 빠트렸던 프러포즈 사건을 떠올리며 델리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무릎까지 꿇고 서는 품 안에 있던 반지 케이스를 꺼내더라고. 맞아. 지금 딱 네 책상 위에 있는 상자 크기 정도 됐었는데…….”

‘어?’

말하면서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델리나가 책상 위에 있는 작은 상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작은 상자인가 싶었던 것이, 지금은 반지 케이스로 보였다.

“지금 책상에 있는 거, 반지야? 반지 케이스?”

“아, 그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델리나의 등 뒤로 훅 다가온 아슈드가 재빨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어찌나 급하게 왔는지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아슈드를 본 델리나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어, 뭐야. 반응 보니까 네 건 아닌 것 같고, 설마 누구 선물 주려고?”

“…….”

“보니까 딱 선물하려고 했던 거 같은데? 이걸로 묶으려고 했던 거 아니야?”

델리나가 반지 케이스 옆에 있던 비단 끈을 흔들자 아슈드가 빠르게 손을 내밀었다.

“됐으니까 얼른 내놔!”

“에이, 내 선물은 없어? 그래도 나름 성인 되고 첫 생일인데. 내 선물도 이렇게 예쁜 끈으로 묶어서 줘도 되는데.”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 듯 델리나가 끈을 손에 쥔 채, 아슈드의 손을 피해 종종거리며 도망쳤다. 아슈드도 지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델리나 뒤를 쫓았다.

“자, 황태손 전하에게 반지를 받게 될 운명의 여인은 과연 누구일까요?”

“너, 진짜……!”

계속되는 델리나의 놀림에 귓가가 붉게 물든 아슈드가 휘날리는 끈을 덥석 잡았다. 하지만 너무 과하게 힘을 주어 당긴 탓인지, 끈을 잡고 있던 델리나의 몸이 휘청이며 곁에 있던 침대로 쓰러졌다.

“!”

넘어진 것은 델리나뿐만이 아니었다. 끈을 잡고 있던 아슈드도 침대 위로 엎어졌다. 그것도 델리나의 바로 위쪽으로 말이다.

“…….”

“…….”

제 눈앞에 있는 아슈드의 얼굴에, 델리나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아슈드도 놀란 듯 몸을 잔뜩 굳힌 채 바로 밑에 있는 델리나를 응시했다.

‘음?’

그러다가 델리나는 제 얼굴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고개를 돌렸다. 반지 케이스에서 튕겨 나왔는지, 델리나의 얼굴 바로 옆에 반지 하나가 나와 있었다.

“저기, 반지…… 떨어졌는데.”

어색해진 공기를 깨고 델리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델리나의 말에 반지를 보던 아슈드가 천천히 그것을 집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거리는 그대로였다.

“……이거, 누구한테 주는 거냐고 물었지.”

숨결마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아슈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는 계속해서 델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반지 줄 사람은 바로…….”

똑똑똑.

그리고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은.

“전하, 실례지만 지금 나오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문밖에서 들려오는 보좌관의 목소리에 팽팽하던 공기가 깨졌다. 놀란 아슈드가 잽싸게 일어나 침대 위로 누워 있던 델리나를 이불로 덮었고, 델리나는 순식간에 이불에 휩싸여 꽁꽁 가려졌다.

“무슨 일이지?”

곧 제 옷매무새를 정리한 아슈드가 문을 열자, 보좌관의 음성이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실례했습니다. 지금 황녀님께서 전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셔서요.”

이불에서 꾸물거리던 델리나도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보좌관이 말을 끝내자 이어서 메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 죄송해요. 설마 벌써 주무시려고 하시는지는 모르고 이런 실례를…….”

“아닙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빠가 계속 안 보이길래 걱정되어서 혹시 함께 계시는 건가 싶어서 찾아왔거든요.”

데미안을 찾으러 왔다는 소리에 델리나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 바람에 침대가 덜컹였고, 보좌관과 메이린의 주의를 돌리듯 아슈드가 빠르고 크게 말했다.

“그, 그거 큰일이군요. 저도 같이 찾아 드리겠습니다.”

“예? 하지만 지금 주무셔야 하는 거 아니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정말요?”

아슈드가 함께 찾아 준다고 하자 기쁜 듯 메이린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다. 곧 문이 빠르게 닫혔고 방 안이 고요해졌다. 그제서야 델리나도 이불 속에서 꾸물대며 기어 나왔다. 어둠과 고요함 속에서, 침대 밖으로 빠져나온 델리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라라…….’

자꾸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델리나는 조금 전에 메이린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아직 안 돌아온 걸 보면, 이야기가 다 안 끝난 건가?’

다시 응접실에 갈까 생각했지만 이내 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메이린과 아슈드가 데미안을 찾아가면 하던 이야기도 안 할 터였다.

“결국 실패네.”

계획적으로 하녀복까지 입고 왔건만, 정작 둘이 무슨 목적으로 만났는지는 결국 파악하지 못했다. 델리나는 조용히 눈을 굴렸다.

‘뭔가 건네주려는 게 있기는 있었는데.’

아주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의자 옆으로 숨기듯이 놓아둔 탓에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델리나는 데미안 옆에 있던 작은 상자 하나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 * *

“…….”

황궁의 응접실.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던 둘의 분위기는 데미안이 내놓은 상자로 인해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외관은 평범했지만 결코 평범한 상자가 아니었다. 셀린이 싱긋 웃었다.

“그분이 전해 주시라 했나요?”

“……예.”

데미안의 말에 셀린이 상자를 열어봤다. 안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약병들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셀린이 동봉되어 있던 편지를 꺼내 들었다. 셀린이 편지를 열어 그것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참, 재미있는 물건들을 보내 주셨네요.”

“…….”

“잘 쓰겠다고 전해 주세요.”

편지를 다 읽은 셀린이 웃으며 상자를 닫았다. 그녀의 말에 데미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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