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제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라서 (75/94)


75화 제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라서
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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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면이긴 했지만 델리나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두 남녀의 정체를. 그 정도로 두 사람의 외모는 데카르와 닮아 있었다.

‘루넨 제국……!’

황족, 그것도 무려 루넨 제국의 황족이 모임에 왔다는 소리에 다른 영애 영식들이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메이린이 아래를 보기 시작했고, 데미안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실비아가 있는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

데미안과 눈이 마주치자 델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곁에서 셀린이 물었다.

“왜 그래, 델리나?”

아.

셀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과한 반응을 보이는 델리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제야 델리나가 몸을 주춤거렸다.

‘맞다. 아직 약혼 이야기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데…….’

“……루넨 제국의 황자님과 황녀님을 뵙습니다.”

때마침 가까이 다가온 데미안과 메이린에게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는 델리나였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이리 저희 후작가에 방문해 주시니 정말 영광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한껏 우쭐해진 실비아가 앞으로 나와 데미안과 메이린을 맞이했다.

“모쪼록 좋은 시간 보내시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면 되세요.”

실비아가 자연스레 데미안과 메이린의 자리를 안내했다. 델리나는 한숨을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가뜩이나 신경 쓸 데가 많은데 신경 쓸 것이 더더욱 늘어나 버리고 말았다.

‘닮기는 엄청 닮았네.’

데카르와 닮은 데미안의 외모에, 델리나의 경계심은 점점 높아졌다. 데카르에게 납치를 한 번 당했던 델리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안,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루넨 제국에서 온 황녀 메이린이라고 해요.”

메이린이 먼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에게 제 소개를 했다. 그러나 데미안의 시선은 계속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바로 델리나에게 말이다.

‘왜 저래?’

그 노골적인 시선을 알아차린 델리나의 고개가 땅굴을 팔 듯 점점 숙여졌다. 그때 데미안의 시선을 알아차린 실비아가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황자님?”

실비아의 물음에도 데미안은 델리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곧 데미안의 입이 열렸다.

“아, 실례했습니다.”

“…….”

“저기 영애분 외모가 너무 아름다워서 저도 모르게 그만.”

‘???’

그 말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실비아와 주변 영애들의 눈동자가 커졌고, 에일리는 연신 눈을 빛냈으며, 기드온은 마시고 있던 찻물을 도로 주륵 내뱉었다.

“…….”

동시에 테이블이 정적으로 맴돌았다. 당사자인 델리나조차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렸다.

“......!”

하지만 침묵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루한 듯 앉아 있던 반센트나, 미소를 잃지 않던 노아가 데미안을 향해 조용히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것을 포착한 델리나가 빠르게 답했다.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화장법을 조금 다르게 했는데, 그게 아마도 루넨 제국의 화장법과 많이 비슷했나 봅니다.”

“아뇨, 전 지금 영애의 얼굴 자체에 대해서 말한 건데.”

“…….”

“제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라서.”

자연스레 화장법으로 화제를 돌려 빠져나가려 했으나 데미안은 더 어마어마한 말을 뱉었다.

그러면서도 당연한 듯 목소리 하나 떨지 않았고, 눈으로는 계속 델리나를 보고 있었다.

바로 앞에서 제 동생의 외모 칭찬 세례를 들어야만 했던 기드온은 충격이 심했는지 찻잔을 쥔 손을 덜덜 떨었다. 델리나는 모임이고 뭐고 창문을 깨고 탈출하고 싶었다.

“어머, 이상형이라뇨. 오늘 플로렌 영애의 화장이 너무 진해서 황자님께서 맨얼굴을 잘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그때 실비아가 끼어들었다.

“그보다 두 분. 이렇게 오셨는데 저희 가문의 자랑인 디저트도 한번 맛봐 주시겠어요? 루넨 제국과 비교해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희 가문도 디저트를 잘하기로 정평이 나 있거든요.”

델리나의 외모 칭찬이 몹시도 고까웠던 듯 실비아는 대화의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델리나 입장에서도 정말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이었다. 처음으로 두 사람의 목적이 일치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헬리움 제국에는 사냥제 일로 오신 겁니까?”

데미안에게 질문을 던진 이는 노아였다. 그리고 사냥제라는 말에 델리나도 덩달아 이를 떠올렸다.

헬리움 제국의 사냥제.

타 제국과는 달리 헬리움 제국의 사냥제는 조금 특별했다. 바로 제국의 건국일을 기념하는 행사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헬리움 제국의 초대 황제가 제국을 세우기 직전, 마지막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직접 험준한 숲을 가로질러 적들을 무찌른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후 초대 황제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가 사람 대신 사냥감을 사냥하게 되었다.

사실상 건국제를 대신하는 행사였기에 타 제국이나 왕국에서도 이를 축하하기 위해 귀빈들이 오곤 했다. 루넨 제국의 대표로 온 데미안을 보며 노아가 눈매를 휘었다.

“헬리움 제국의 숲은 워낙에 험준해서 위험하실 수도 있는데. 가령 누가 들어갔다 실종되어서 어디 노예로 팔려 가거나 할 수도 있고요.”

반센트도 중얼거렸다.

“정체 모를 함정에 걸려서 실험대로 끌려갈 수도 있고.”

참으로 구체적인 예시들에 델리나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정작 데미안은 태연했다.

“괜찮습니다. 딱히 무서워하는 건 없어서.”

노아와 반센트를 상대로 저리 답하는 데미안도 어찌 보면 대단했다. 아슬아슬한 상황 속 델리나는 빨리 모임이 파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루넨 제국이라면 저도 들어 봤어요. 상당히 재미난 것들이 많다고 들었고요.”

이번에는 셀린이 데미안을 향해 말했다.

“저도 언젠가 루넨 제국에 꼭 방문해 보고 싶네요.”

“……그렇습니까.”

방긋 웃는 셀린의 미소에 데미안도 가만히 답했다. 셀린이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루넨 제국은 신기한 볼거리도 많다던데……. 맞아, 델리나. 너도 신기한 거 할 수 있잖아.”

“응?”

“예전에 나한테 보여 줬던 거. 그거 한 번 더 보여 주면 안 돼? 손에서 카드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랬었잖아.”

“……그걸 해 보라고? 지금?”

셀린이 무엇을 보여 달라고 하는지 깨달은 델리나가 반문했다. 그러자 실비아가 말을 받았다.

“맞아요. 그러고 보니까 영애께서는 그런 것을 할 줄 아셨죠?”

“…….”

“오래전에 황궁 연회 이후로 보여 주신 적이 없으셨잖아요. 그래서 저도 좀 궁금했는데…… 지금 한번 보여 주시는 것이 어떠세요?”

그 말에 셀린 주변에 있던 영애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실비아의 입꼬리가 한없이 올라갔다.

“무려 대공 전하의 광대신데 하실 수 있으시지요?”

대공가의 후원을 받는 광대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껏 델리나에게 공연을 보여 달라고 청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대공의 딸인 셀린이 말을 꺼냈다. 덩달아 실비아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두 분은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여기 플로렌 영애가 사실 광대로도 유명하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사실 귀족 영애가 가질 만한 호칭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영애께서 좋다는데 어쩌겠어요, 그렇죠, 플로렌 영애?”

이때다 싶어 데미안에게 광대 이야기를 하는 실비아였다. 이제는 다른 테이블에 있던 영애와 영식들의 시선도 델리나에게 쏠려 있었다.

“…….”

“어머, 못하시겠나요? 영애?”

침묵하는 델리나를 보며 실비아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부채로 가린 채 물었다. 그러자 델리나가 입을 열었다.

“아뇨, 물론 할 수 있죠. 잠깐 무슨 공연을 할까 생각을 좀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가요?”

공연을 핑계로 저를 조롱하려는 것이 훤히 보였다. 하지만 델리나는 실비아를 향해 미소 지었다.

“공연을 하려면 영애의 협조가 필요한데 괜찮으시겠지요?”

“제가요?”

“네. 걱정 마세요. 그냥 자리에 앉아 계시기만 하는 일이거든요.”

“……그래요. 뭔데요?”

“지금 착용하고 계신 목걸이만 풀어서 저한테 주시면 돼요.”

“네?”

델리나의 말에 당황한 듯 실비아가 제 목걸이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델리나는 왜 실비아가 목걸이 푸는 것을 망설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귀해 보이는 그 목걸이는, 바로 로즈립 후작 가문을 대표하는 목걸이 중 하나였기에.

“이, 이걸요?”

“네. 왜요? 혹시 싫으신가요?”

“…….”

“그 누구보다 제 공연을 보고 싶어 하시는 분이 이렇게 협조를 안 해 주시면 저도 하기가 힘들어지는데요. 그럼 그냥 공연은 안 하는 걸로…….”

“아뇨. 드릴게요.”

비웃는 듯한 델리나의 미소에 발끈한 실비아가 빠르게 목걸이를 풀었다. 그러고는 어디 얼마나 대단한 공연을 하려는지 보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델리나와 목걸이를 쳐다봤다.

“대신 그만큼이나 놀라운 공연을 보여 주시는 건 맞으시겠죠?”

“당연하죠. 다른 분은 몰라도, 아마 로즈립 영애께서는 무척 놀라실 거예요.”

“무슨…….”

실비아가 다시 묻기도 전에 델리나가 목걸이를 높이 들어 올렸다.

“자, 여러분. 지금부터 이 목걸이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공연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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