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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72/94)


69화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20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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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봐.”

잔을 깨트린 이는 벨리온이었다. 그의 손에서 찻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벨리온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서늘한 말투로 말했다.

“어디서 왔다고?”

“……데카르 황제한테서…….”

벨리온이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 펠릭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은 펠릭이 든 편지에 닿아 있었다. 당장 눈앞에서 치우려는 듯, 그가 펠릭 앞에 선 순간이었다.

“잠시만요!”

이를 말리는 것은 델리나였다.

“그래도 편지니까 내용 확인은 해 볼게요.”

이대로 있다가는 편지가 그대로 찢기리란 것을 깨달은 델리나가 빠르게 펠릭에게 다가가 편지를 받아 들었다. 벨리온만큼 놀란 델리나도 레터 나이프를 기다릴 새도 없이 손으로 편지 봉투를 쫙 뜯었다.

“…….”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편지를 읽던 델리나가 침묵했다. 식당 안 분위기는 점점 나빠졌다. 결국 펠릭이 물었고 델리나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분한테 아들이 있었나?”

“예?”

“내용에 황자가 나오는데.”

황자 데미안과의 약혼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편지에 델리나가 묻자 펠릭이 바로 답했다.

“그렇다면…… 아마 아들이 아니라 이복형제일 겁니다.”

“이복형제?”

“예. 루넨 제국의 선대 황제는 많은 후, 비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만큼 자식도 많았습니다. 데카르 황제에게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고요. 만약 아들이 있었으면 이미 소문이 났을 것입니다.”

“그랬구나. 그렇다는 건…….”

‘그냥 데려갈 수 없으니까 결혼으로 묶어 두려는 셈인가.’

황궁 연회장에서의 납치 미수 사건을 떠올린 델리나가 몸서리를 쳤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면 그 황자 놈……, 아니 황자와의 약혼이라는 겁니까?”

“그런 것 같아. 근데 답장은 안 보내 줘도 된대. 직접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그 말에 벨리온이 빠르게 말했다.

“버려.”

집안에 루넨 제국과 관련된 그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은 듯, 델리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든 벨리온이 약혼장을 사정없이 구겼다.

무려 루넨 제국의 황제 인장이 찍힌 편지였는데 식당 안에 있던 이들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표정들이었다. 펠릭이 씩씩댔다.

“그렇습니다. 아가씨. 굳이 답장을 보내지 말라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거절할 걸 뻔히 알고 사전에 차단하려는 거라고요.”

“…….”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황자가 헬리움 제국에 방문할 모양인데 어림도 없죠. 어디 감히 아가씨를 노립니까? 아가씨 앞에 서려면 전하보다도 잘생겨야 하고, 재력이며 권력이며…….”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진정 좀 해 봐.”

하지만 분노하고 있는 건 펠릭만이 아니었다. 칼릭스나 젠이나 입은 다물고 있었지만 각자 손에 쥐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가 손에서 힘없이 구부러진 채 덜렁대고 있었다.

“데미안이라고 했지.”

벨리온이 살기를 뿜으며 황자의 이름을 되뇌었다. 처참히 구겨진 편지처럼 될 것 같은 데미안이라는 존재에 아주 조금 동정심을 가진 델리나가 급히 입을 열었다.

“물론 저는 루넨 제국으로 갈 생각도 그 황자랑 결혼할 생각도 전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다들 이상한 짓 하지 마세요.”

“…….”

“안 할 거죠?”

델리나의 말에 남자들은 긍정도 부정도 않고 델리나의 눈을 피했다. 그들은 델리나가 끝까지 대답을 요구하자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생일.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날일 뿐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날이었다. 사실 델리나는 생일이라는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생일은 성인이 되는 날이라서인지 기분이 묘했다.

‘그때 이후로 확실히 많이 컸지.’

델리나는 전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응시했다. 과거로 돌아왔을 때의 여자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성숙한 여인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오늘만큼은 표정 변화라고는 도통 없는 베티조차 어딘가 들떠 보였다. 치장을 돕는 베티의 능숙한 손길에 델리나는 익숙한 듯 몸을 맡겼다.

“단장을 마치시면 바로 식당으로 가시면 됩니다.”

“응.”

“그리고 생일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고마워.”

언제나처럼 조용히 베티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델리나는 마냥 좋았다. 유달리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나 한껏 멋을 낸 드레스가, 베티의 축하하는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아가씨!”

“끽!”

그리고 시끄럽게 축하하는 건 다른 이들이 충분히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델리나가 방에서 나오자마자 펠릭이 요란스레 튀어나와 델리나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자 델리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제 발밑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사이 펠릭의 어깨에서 뛰어내린 보석이는 자연스레 델리나의 어깨에 안착했다.

“……뭐야, 이건?”

“뭐긴요. 아가씨를 축하하기 위한 레드 카펫이죠.”

“…….”

“자! 가시죠, 아가씨.”

기다란 복도에 놓인 레드 카펫의 위용에 아찔해진 델리나는 주춤대며 한 걸음 물러섰다. 펠릭은 싱글벙글 웃으며 어서 오라는 듯 손짓하고 있었다.

“베티. 여기 카펫 싹 다 치워 줘.”

“예.”

하지만 델리나의 말 한마디에 레드 카펫은 베티의 손에 의해 서서히 걷혔다. 그 모습을 본 펠릭이 외쳤다.

“아이고! 아가씨를 위해 아침부터 정성껏 깐 레드 카펫이!”

작년에는 꽃가루를 뿌리더니, 이번에는 레드 카펫인가 싶었다. 그렇게 펠릭이 외치는 동안 델리나는 걸음을 옮겨 식당으로 향했다.

아침에 베티의 축하를 받고, 펠릭의 요란한 인사를 한 번 더 받고, 이제 식당에 가면…….

델리나가 대공가에 온 후, 생일 때마다 차례대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올해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식당에 있는 이가 벨리온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델리나!”

식당 안으로 델리나가 들어서자 젠이 웃으며 반겼다. 그 곁에 서 있던 칼릭스와 벨리온도 델리나에게 인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일 축하해.”

가장 먼저 델리나에게 선물을 내민 것은 젠이었다. 양손에 무언가를 소중히 품고 있던 젠은 들고 있던 것을 델리나에게 넘겨주었다.

“꽃이잖아?”

“응. 꽃.”

하지만 대공가 정원에 피는 꽃이 아니라는 것을 델리나는 단박에 눈치챘다. 꽃의 생김새와 젠의 몸에 새로 생겨난 잔상처들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너 이거……! 산꼭대기 절벽에서만 피는 거 아니야? 근데 그걸 캐 왔어?”

“응.”

“그냥 정원에 피는 꽃을 줘도 되는데……. 어디 크게 다친 데는 없고?”

“응, 응. 없어.”

선물을 받아 줘서 좋다는 듯 젠이 마냥 웃었다. 젠 옆에 서 있는 칼릭스는 왠지 엄청 졸린 눈을 하고 있었다.

“너는 상태가 왜 또 이래?”

어지간한 훈련에도 끄떡없는 애가 그러고 있으니, 델리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칼릭스가 옆에 있는 케이크를 가리켰다.

“이거 만드느라.”

척 봐도 몹시 크고 화려한 5단짜리 케이크가 떡하니 식탁에 놓여 있었다. 칼릭스의 말을 보충하듯 펠릭이 고개를 내저으며 덧붙였다.

“말도 마세요, 아가씨. 일주일 전부터 이거 만든다고 도련님이 부엌에서 사셨습니다.”

“…….”

“도련님쯤 되니까 이런 케이크를 혼자 만드셨지. 저라면 아마 침대에서 며칠을 앓았을 겁니다.”

과연 펠릭의 말처럼 케이크는 델리나가 지금껏 본 케이크 중에 가장 크고 화려했다. 케이크를 멍하니 보던 델리나가 입을 열었다.

“케이크 진짜 예쁘다. 고마워.”

“뭘.”

“근데 너무 커서 이걸 언제 다 먹…… 아니, 아니다. 다 먹을 수 있겠네.”

칼릭스와 젠을 번갈아 보던 델리나가 곧장 케이크의 크기를 수긍했다. 이어서 벨리온이 말했다.

“생일 축하한다, 광대.”

“감사해요, 전하.”

“……말했던 선물은, 나중에 주지.”

“네, 그럼요. 늦게 주셔도 된다니까요.”

엄청나게 화려하고 성대한 생일 축하는 아니었다. 하지만 델리나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이들의 축하 인사 하나하나가, 그리고 정성을 담은 선물들이 얼마나 저를 위하는 것인지를 알았기에.

“자, 자. 아가씨. 초에 불붙였으니까,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어느새 초에 불을 붙인 펠릭이 델리나를 가운데로 이끌었다.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던 델리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들 생일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대공가에 와서 수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어린 소녀는 어른이 되었고,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델리나는 잊지 않았다. 성장과 함께, 불꽃이 휘몰아치던 그 끔찍했던 날 또한 가까워져 오고 있음을.

“음, 그리고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건강하게 모두 다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바람이에요.”

말을 마친 델리나가 촛불을 훅 불어 껐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펠릭이 눈물을 닦는 흉내를 내며 손가락으로 눈가를 쓸었다.

“세상에, 아가씨. 어느새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셔서 무척이나 따뜻하신 말씀을……. 아, 역시 아가씨. 그냥 결혼 안 하고 평생 대공가에서 살면 안 되겠습니까? 이제부터 저 그냥 반대하겠습니다. 아가씨 결혼 반대요.”

“됐으니까, 같이 케이크 먹자. 맛있어 보이는데.”

“…….”

“빨리. 나 오늘 많이 먹으려고 야식도 참았단 말이야.”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델리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했다. 그들의 시선을 알아차린 델리나가 조금 민망한 듯 빠르게 델리나가 손짓하며 사람들을 자리로 모았다.

“저, 축하 모임 중에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선 사용인 때문이었다.

“뭐지?”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대공가 정문으로 어느 여인이 왔는데, 전하께서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걸 왜, 지금.”

“그게…… 그 여인이 가지고 온 것이 있는데, 그게 좀 전하와 관련된 것이라…….”

사용인이 벨리온의 눈치를 연신 보며 말했다. 그러자 델리나는 알 수 있었다. 사용인이 급히 벨리온을 부른 이유를, 그리고 대공가의 정문 앞에 있다는 여인의 정체를.

생일.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날일 뿐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날이었다. 그리고 이제 델리나에게 또 다른 특별한 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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