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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그녀의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드셨길래? (71/94)


72화 그녀의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드셨길래?
202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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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가 더 악화되셨습니다.”

“…….”

“이런저런 약을 쓰고는 있지만, 워낙에 쇠약해지신지라……. 이대로라면 정말 힘드실 겁니다.”

침대 위에는 거친 숨소리를 내쉬며 잠든 하이르가 있었다. 그레이스와 아슈드가 황궁의의 말을 들으며 하이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심각한 건가?”

“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의 사태.

황궁의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곧 황궁의가 자리를 떠났다. 방에 남은 그레이스와 아슈드는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역시 당분간은 아슈드 네가 힘들겠지만 할 일이 많을 것 같아.”

“예.”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하이르는 약해지고 있었다. 몸도 몸이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네놈, 네놈…….”

언제 깨어났는지 하이르가 눈꺼풀을 힘겹게 깜빡이며 숨을 헐떡였다. 하이르의 시선은 아슈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왜 아직까지 여기 있는 거야?”

“…….”

“어서 당장 그 불온한 울피림 놈들을 붙잡지 않고, 왜, 왜 여기……! 그래, 둘이 한통속이라 이거지? 나를 죽이려고?”

하이르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곁에 있던 베개를 던졌다. 날아간 베개는 그대로 아슈드의 얼굴에 맞아떨어졌고, 그레이스가 그를 급히 말렸다.

“그만하세요, 아버지!”

“왜? 나를 말리는 걸 보니 너도 이제 저놈과 같은 편이냐? 내, 내 이것들을……!”

소리치기도 버거운 듯 가슴께를 부여잡은 하이르가 그대로 몸을 늘어트렸다. 잠깐의 난리 통 속에서도 아슈드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이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슈드의 살인 미수 사건 이후로 두 사람은 서로를 피했다.

아니, 하이르 쪽이 불안해하며 아슈드를 피한 것에 더 가까웠다. 하이르는 자신이 아슈드를 죽이려고 했으니 언제든지 아슈드가 벨리온의 손을 잡고 저를 죽이러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하이르는 악몽에 시달렸고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사실상 피해자인 아슈드가 가져야 할 두려움은, 도리어 하이르의 불안함으로 변질되어 갔다. 그 결과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하이르는, 이제는 하루의 절반을 침대에서 보내야만 했다.

“얼른 나가자.”

그 상황을 가운데에서 조율하고 있는 그레이스는 애써 피로한 기색을 지우고 아슈드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레이스를 잠시 바라본 아슈드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참, 그러고 보니까 오늘 루넨 제국에서 손님이 온다고 하지 않았어?”

“예.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겁니다.”

“그래. 아무래도 황족이니까, 우리가 상대를 해야겠지만…….”

말끝을 흐리며 그레이스가 아슈드를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그리고 지금 아버지 상태로는 곧 있을 사냥제도 네가 도맡아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

아슈드는 성인이 되자마자 많은 양의 업무들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도 그레이스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걱정 어린 얼굴을 보며 아슈드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럼요. 할 수 있어요.”

“…….”

“이미 고모님도 많은 걸 도와주시고 계시잖아요. 그걸로 충분해요.”

멀리서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슈드의 걸음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옮겨 갔다.

“그럼 이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아슈드는 삽시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곁에 있던 보좌관들과 사용인들이 다음의 스케줄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고, 아슈드는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

아슈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레이스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 * *

“헬리움 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황궁의 응접실.

시종장은 넓은 응접실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남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혹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고요.”

시종장의 말에도 두 남녀는 침묵했다. 하지만 태도는 조금씩 달랐다. 남자는 정말 필요한 게 없다는 듯 무감한 눈을 하고 있었고, 여자는 남자에게 붙어 있으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곧 황태손 전하께서 오실 겁니다. 그때까지만…….”

시종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응접실 문이 열렸다. 아슈드가 안에 들어오자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슈드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헬리움 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헬리움 제국의 황태손 아슈드입니다.”

“…….”

“황제 폐하께서 두 분을 맞으실 상황이 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제가 맞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슈드의 인사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 쪽이었다.

“아닙니다. 좋은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우선 앉으시지요.”

자연스레 말이 오갔지만 두 사람의 인사는 지극히도 형식적이었다. 그 분위기를 읽은 양, 옆에 있던 여인이 짐짓 불안한 얼굴로 남자를 보다가 아슈드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아슈드의 얼굴을 본 여인의 양 볼이 붉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메이린 황녀님 맞으시지요?”

“…….”

“?”

“아, 네, 네! 잘 부탁드려요.”\

아슈드의 인사에도 넋을 놓고 있던 메이린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런 제 동생을 바라보던 남자, 데미안도 이윽고 자리에 앉았다.

“아직 사냥제까지는 시간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데카르의 이복 쌍둥이 남매.

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 이미 그들의 신상 정보를 모조리 확인한 아슈드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어머니가 다르긴 했지만, 아버지의 영향인지 확실히 두 사람은 데카르와 닮아 있었다.

“헬리움 제국의 사냥제를 위해 루넨 제국의 황족분들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두 분이나.”

데카르의 성격을 잘 아는 아슈드 그가 두 사람을 보낸 이유를 찾듯 눈을 굴렸다. 그러자 메이린이 입을 열었다.

“원, 원래는 오빠 혼자 가는 거였는데 제가 함께 따라가고 싶다고 했어요. 민폐였다면…… 죄송합니다.”

“아뇨. 민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가요?”

주눅 들어 있던 메이린의 얼굴이 아슈드의 말에 확 밝아졌다. 정작 데미안은 무감한 얼굴로 말했다.

“사냥제도 사냥제지만 만나고 싶은 영애가 있어서요.”

“만나고 싶은 영애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플로렌 백작가의 델리나 플로렌 영애입니다.”

데미안의 말에 처음으로 아슈드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하긴 했지만 데미안이 아슈드의 동요를 알아챈 후였다. 하지만 데미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 플로렌 영애를 만나려고 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 영애랑 결혼하고 싶으니까요.”

응접실을 뒤흔들 말을 내뱉은 것 치고 데미안은 덤덤했다. 하지만 그 말의 영향력은 충분히 컸다. 한순간 응접실에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슈드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결혼이요?”

“예, 아직 약혼자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

“그렇다면 문제 될 건 없지 않습니까.”

분명 그랬다. 아니, 오히려 타 제국의 황족이 자국의 귀족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좋은 교류의 장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아슈드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다른 의미로 집요하게 데미안을 쳐다봤다.

“그 영애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직접 플로렌 영애를 본 적은 없지만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드셨길래?”

아슈드의 질문에 데미안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광대죠.”

“…….”

“귀족 영애가 광대라니, 그것만큼 신선한 게 어디 있습니까.”

광대라는 데미안의 말에 아슈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보니 루넨 황제 폐하와 얼굴만 닮으신 줄 알았더니, 성격도 많이 닮으신 모양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런 거겠지요. 아무래도 핏줄이 같으니.”

오래전 델리나를 데려가려 했던 데카르와, 델리나에게 구혼하는 데미안. 하는 말투나 행동은 달랐지만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은 똑같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

“결혼에 관한 건 혼자만의 생각이십니까?”

“무슨 소린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만.”

“그저 정말 플로렌 영애를 좋아하셔서, 광대라는 신선한 호칭에 이끌려서, 그런 순수한 이유로 결혼을 하시고 싶은 건지 묻는 것입니다.”

그 말에 한 번 더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길어지자 의외의 인물이 입을 열었다.

“그, 그러고 보니까 헬리움 황궁에는 이런저런 신비한 볼 것들이 많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볼 만한 걸 추천받을 수 있을까요?”

“…….”

“아니면, 그냥, 그냥 방에서 쉬어도 되고…….”

“……예, 괜찮은 곳을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분위기에 가까스로 용기를 낸 듯 메이린이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메이린의 반응에 아슈드 또한 더 이상의 말을 꺼내지 않았고, 데미안 또한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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