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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70/94)


71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2023.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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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당황한 델리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곧 가까이 다가온 셀린이 미소 지었다.

“델리나 플로렌 영애라고 아버지께 전해 들었어요.”

“…….”

“저는 셀린이라고 해요. 아, 이제는 셀린 울피림이겠네요. 오늘부터 이곳에서 살게 되어서,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네.”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할 줄은 몰랐기에 델리나가 멍하니 답했다. 여전히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방 쪽을 힐끗 본 셀린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방 정리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모양이에요.”

“…….”

“그래서 말인데, 혹시 괜찮으시면 저택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용인들에게 듣자 하니, 여기는 다양한 장치가 많아서 저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하다고 하더라고요.”

난생처음 보는 델리나에게도 셀린은 사근사근했다. 하기야 처음 벨리온을 보고서도 그리 태연했으니, 어떻게 보면 정말 울피림 사람이 맞구나 싶었다.

“네. 안내해 드릴게요.”

델리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셀린의 등장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델리나 또한 셀린의 정보가 필요했기에.

* * *

“이쪽은 정원이에요. 보통 꽃밭이긴 한데, 벽 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함정이 발동할 수 있거든요. 그것만 주의하시면 돼요. 아, 거긴 밟지 마시고요. 구덩이 밑에 칼들이 박혀 있으니까.”

예전에 델리나가 저택을 구경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셀린이 저택을 구경하고 있었다. 저택 이곳저곳을 알려 준 다음, 델리나는 바깥쪽에 있는 정원으로 셀린을 안내했다. 장치며 함정 이야기가 절반을 차지했지만 말이다.

“대공가에는 상당히 무서운 장치들이 많네요.”

셀린이 감탄했다.

“한 번에 만들어진 건 아니고 선대 대공들이 하나씩 만들다 보니 늘어난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가문이 폐쇄적인데다가 적의 공격도 있으니 그런 것 같고요.”

델리나가 예전에 함정에 당할 뻔한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셀린에게 물었다.

“그러면 대공가에 오는 방법도 어머니가 알려 주신 건가요?”

“네. 늑대들을 피하는 방법은 알려 주셨는데, 이런 장치에 대해서는 못 들었거든요. 정문으로 곧장 왔으니 망정이지 저도 큰일 날 뻔했네요.”

“……그러셨구나.”

셀린의 말에 호응하면서도, 델리나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바로 셀린의 태연한 태도들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울피림 대공가인데 이 정도로 침착할 수가 있나?’

제아무리 담이 큰 사람이래도 대공가의 저택이나 벨리온을 처음 맞닥트리면 절로 겁을 먹고는 했다. 물론 셀린의 성향이 원래 그렇다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전에는 저택에서 사용인 일을 하셨다고 했죠?”

“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귀족 저택에서 일을 하면서 지냈고요. 그러다가 얼마 전에 알게 되었어요. 어머니가 주신 목걸이의 문양이 무엇인지를요.”

셀린의 아버지가 벨리온이라고 해도, 십몇 년을 평민으로 살았을 셀린이었다. 자신이 귀족 출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델리나를 대하는 셀린의 태도는 퍽 자연스러웠다. 델리나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 셀린이 말했다.

“그래도 울피림 대공녀라면 귀족답게 행동해야 할 것 같아서 예전에 모셨던 귀부인들 몸짓을 따라 하고 있기는 한데, 괜찮나요?”

“……네, 좋은걸요.”

눈썰미가 좋아서 단숨에 귀족들의 자세나 행동을 따라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막연히 그렇다고 하기에는 어딘지 석연찮았다. 델리나는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최근에 안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자신이 대공가의 핏줄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다면 이토록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와 태도가 어느 정도 설명이 됐다. 하지만 심증일 뿐 물증은 없기에 델리나는 다른 것으로 화제를 돌렸다.

“여기는 꽃밭이에요. 보통은 관리하는 사용인 외에는 거의 사람이 없긴 한데, 가끔 있는 경우도 있어요.”

‘바로 저기 있는 젠처럼 말이지.’

“델리나?”

꽃밭에 웅크려 무언가 꿈지럭대던 젠이 델리나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젠의 손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뭐 하고 있었어?”

“산에서 캐 온 거 여기에 심고 있었어.”

생일 선물로 준 꽃 외에도 이것저것 캐 온 모양이었다. 삽 없이 오로지 손만으로 흙을 파헤치고 있던 젠이 델리나의 옆에 있던 셀린을 쳐다봤다.

“아, 아까 봤었지? 셀린 영애야. 오늘부터 여기서 살기로 했대.”

델리나가 셀린을 소개하자 그녀가 젠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셀린 울피림이라고 해요.”

“…….”

“처음에 봤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크시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셀린이 물었지만 젠은 말없이 있다가 슬며시 델리나의 등 뒤로 숨었다. 물론 숨는다고 가려질 덩치는 아니었지만. 셀린을 경계하는 젠의 모습에 델리나가 덧붙였다.

“원래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낯을 가리거든요.”

“그래요? 미안해요. 너무 초면인데 다가갔나 봐요.”

셀린의 사과에도 여전히 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델리나만 바라봤다.

“이것도 꽃병에 담아서 줄까?”

“그럴래? 그렇지 않아도 방 안에 있는 건 다 시들었는데. 잘됐다.”

“응, 응. 알았어.”

젠이 신난 얼굴로 양손에 꽃을 든 채 사라졌다. 젠의 뒷모습을 보던 셀린이 물었다.

“저분도 대공가에서 후원을 받으시는 분이죠?”

“맞아요.”

기본적인 대공가의 정보를 알고 있다면 후원에 관해서도 알고 있을 터였다. 대공가의 후원을 받는 아이들은 아슈드 외에는 다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영애께서는 조금 특별한 것으로 후원을 받고 계신다고 하던데요.”

“맞아요. 광대요.”

자신이 대공가의 후원을 받는 것이 알려지자마자, 정말이지 몇 년 동안 숱하게 받아 온 질문 중 하나였다. 진짜 광대냐고 묻는 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부끄럽던 것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제가 생각하는 광대가 맞을까요?”

“그렇죠. 이런 거요.”

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낸 델리나가 손을 작게 흔들었다. 그러자 카드는 한 장에서 두 장으로, 두 장에서 네 장으로 점차 불어났다. 이윽고 셀 수 없이 많아진 카드를 델리나가 공중으로 집어 던지자 순식간에 카드들은 꽃가루로 바뀌며 떨어졌다. 

“……정말이셨네요.”

“네. 원래 이런 걸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열심히 연습했죠.”

델리나의 기술에 놀란 듯 셀린의 눈이 깜빡였다. 델리나는 이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제가 얼마나 피나는 연습을 했는지 잠시 떠올렸다.

‘또 공연 같은 거 시킬까 봐 얼마나 연습했는데.’

혹시 또 하이르가 부를 사태를 대비한 델리나였다. 덕분에 지금은 정말 어디서 공연을 해도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었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그야말로 생존형 연습에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어떤 의미로 동기 부여는 확실했으니, 참 이래저래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러면 공연 같은 것도 하는 건가요?”

“예전에 정식으로 한 번…… 했었죠. 이후로는 한 적 없지만요.”

광대라고 밝혀지기는 했지만 벨리온 때문인지 누구 하나 제게 공연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럼 저 원숭이도 공연 때문에 데리고 있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 처음에는 선물로 받은 거였어요. 물론 공연도 잘하지만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장난기 많은 보석이였다. 나무에 매달려 있던 보석이가 새로운 얼굴인 셀린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저 원숭이도 낯가림이 심한가요?”

“아뇨. 원래는 사람들한테 잘 붙는 애긴 한데…….”

‘전하랑 닮아서 그런가.’

제아무리 장난기 많은 보석이라도 건드리지 않는 인간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벨리온이었다.

“끽!”

하지만 또 의외로 벨리온 닮은 꼴인 칼릭스에게는 잘 달라붙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먹어.”

“끽끽!”

물론 칼릭스가 주는 간식 때문인 것 같지만.

어느새 나타난 칼릭스 어깨에서 보석이가 간식을 우물대며 먹는 사이, 세 사람이 서로를 마주했다. 먼저 인사한 쪽은 셀린이었다.

“안녕하세요. 아버지께는 이야기 들었어요.”

“…….”

“서로 나이는 같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제가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맞겠죠? 아니면 이름으로 부를까요?”

칼릭스, 셀린.

벨리온과 있을 때도 그랬지만, 정말 이렇게 같이 있으니 칼릭스와 셀린이 가족이라는 게 실감 났다. 정원에 잘 나오지 않는 칼릭스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또한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셀린이라는 존재를 말이다.

“전하께서 그리하라고 했습니까.”

“아뇨. 그건 아니지만 가계도에 같이 올라가게 되면, 아무래도 대공자라는 호칭은 어색하지 않을까요? 이름이 더 나을 것도 같은데.”

“…….”

칼릭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곁에 있는 델리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자 셀린이 델리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맞아요, 그렇지 않아도 영애에게도 부탁하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요.”

“네?”

“어차피 저도 이곳에 살면서 계속 영애랑 마주칠 텐데, 우리 서로 말 놓으면서 편하게 지내면 어떨까요?”

“뭐……, 전 상관없긴 한데…….”

셀린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 정도로의, 그런 웃음이었다.

“그래요. 그러면 이렇게 셋이서 서로 같이 잘 지내봐요. 아니, 지내보자.”

그렇게 말하며 셀린이 델리나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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