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잘 부탁드릴게요, 아버지 (69/94)


70화 잘 부탁드릴게요, 아버지
2023.08.09.


16915810081313.jpg

 
“안내해.”

사용인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본 벨리온이 걸음을 옮겼다. 델리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벨리온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고, 델리나는 창가로 향했다.

“…….”

벨리온의 명을 받은 것인지 사용인들을 따라 여인이 점차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를 본 델리나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차분한 검은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여인의 외모는 누가 봐도 울피림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벨리온과 닮아 있었다.

셀린.

‘저 여인이, 바로 전하의 딸…….’

사실 소문으로만 들었지 이토록 가까이에서 셀린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두 주먹을 꽉 쥐던 델리나가 몸을 틀어 식당을 빠져나갔다.

“아가씨?”

등 뒤에서 놀란 펠릭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델리나는 복도를 빠르게 지나 정문 쪽으로 향했다. 곧 정문 너머로 벨리온의 모습이 보였고, 그 바로 앞에 서 있는 여인도 보였다.

“처음 뵙습니다, 대공 전하. 셀린이라고 합니다.”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델리나가 주춤거리고 있는데 셀린이 품 안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뭔지 아실까요?”

평범한 목걸이였다. 하지만 목걸이 중앙에 새겨진 문양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울피림 대공가의 문양이었다.

“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주셨던 목걸이에요.”

“…….”

“주시면서 이곳으로 꼭 찾아가라고 하셨고요.”

벨리온과 셀린 두 사람의 사이에서, 목걸이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벨리온은 잠시 말없이 셀린의 얼굴을 보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델리나를 한 번 힐끔 바라보았다.

“방에 가서 이야기하지.”

어느새 델리나를 따라 다가온 사람들은 여전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은 한 눈치들이었다. 누가 봐도 벨리온과 닮은 셀린의 외모와 그녀의 손에 들린 목걸이 때문이었다.

“데려와.”

“네? 아, 네. 이쪽으로 오시죠.”

벨리온의 말에 델리나의 눈치를 보던 펠릭이 셀린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멀어져 가는 세 사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베티가 다가와 물었지만 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좀 놀라서……. 다시 식당으로 갈까? 케이크 먹어 봐야지. 맛있을 텐데.”

“…….”

“응? 빨리 가자. 얼른 먹어야지. 나 배고파.”

애써 분위기를 전환시키며 델리나가 칼릭스와 젠의 팔을 잡아끌었다. 결국 그 두 사람도 별말 없이 델리나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 * *

물론 식당으로 돌아왔다고 아까의 분위기가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웃고야 있었지만, 델리나도 혼란스러웠다. 막연히 언젠가 이런 날이 오겠지, 하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이렇게 셀린을 마주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끽, 끽.”

“그래, 너도 놀랐지? 얼굴 보고.”

“끽!”

“나도 놀랐어. 생각보다도 엄청 닮아 가지고.”

케이크를 다 먹고 방에 돌아와서도 벨리온과 셀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델리나는 의자에 앉아 보석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저런 얼굴이었구나.’

이전 삶에서는 성인이 되고 다락방에 갇혀 살다시피 했기에 셀린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들은 모두 에일리의 입을 통해 들었었다.

울피림 대공가의 대공녀, 사교계의 제일가는 꽃 등의 다양한 호칭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해서 가장 유명한 것은 따로 있었다.

제국의 모든 남자를 발밑에 꿇릴 수 있는 여인.

모든 남자를 발밑에 꿇린다니, 어느 정도 과장된 소문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그런 소문이 돈 이유가 있었다. 제국에서 그 누구보다 큰 영향력을 가진 남자들이 셀린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다섯 명이 말이다.

‘그리고 그중 둘이 지금 여기에 있고.’

셀린을 처음 봤을 때의 칼릭스와 젠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녀가 제 가족임을 한 번에 알아봤을 것이다. 젠도 새롭게 대공가에 머물게 된 셀린에게 관심을 가질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나는…….’

칼릭스와 젠의 곁에 있는 셀린. 그리고 외면당하는 자신.

이제는 정말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델리나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끽!”

“응, 그래. 위로해 주는 거야?”

델리나가 싱숭생숭한 것을 아는지 보석이는 연신 델리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사실 거의 헝클어트리고 있었지만.

보석이가 제 머릴 어떻게 하든 델리나는 다시 생각에 빠진 얼굴로 제 방을 둘러보았다.

‘원래 대공가 일원들이 쓰는 방인데.’

과거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과거에는 셀린에 대해 듣기만 했는데, 지금은 대공가에서 마주했으니까 말이다. 델리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보석아.”

“끽?”

“너 전하 집무실에서 놀고 싶지?”

“……끽?”

“응, 그래. 가고 싶다고? 가 보자.”

“끽! 끽!”

벨리온의 집무실이라는 소리에 보석이가 고개를 내저었지만, 델리나는 보석이를 품에 안고 방을 빠져나갔다. 품 안에서 보석이가 발버둥 쳤지만 부질없는 반항이었다.

‘지금쯤이면 이야기가 끝났으려나.’

벨리온의 집무실이 가까워질수록 더 고요해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문 앞에 선 델리나는 문을 두드릴까 말까 망설였다. 평소 같으면 아무 망설임 없이 두드렸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끽!”

“잠깐만, 그렇게 움직이면……!”

델리나가 머뭇거리는 사이, 힘찬 외침과 함께 보석이가 델리나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델리나는 보석이를 잡으려다가 그대로 문고리를 잡고 앞으로 쓰러졌다.

“…….”

바닥으로 엎드리듯 넘어진 델리나는 익숙한 카펫의 감촉에 서서히 얼굴을 들어 올렸다. 문을 열며 넘어진 탓에 집무실 안에 있던 벨리온과 셀린, 그리고 펠릭이 델리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펠릭이 다가가며 묻자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난 델리나가 바닥에 있던 보석이를 빠르게 품에 안아 들었다.

“죄송해요. 보석이가 날뛰어서 잡다가 그만…….”

“…….”

“가 볼게요. 일들 보세요.”

급격히 밀려오는 창피함에 빠르게 델리나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하지만 델리나가 도로 문을 닫기 전에 벨리온이 그녀를 막았다.

“들어와도 돼.”

“어, 하지만…….”

“다 끝났으니까.”

벨리온의 말대로 셀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셀린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잘 부탁드릴게요.”

“…….”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과 동시에 델리나와 셀린이 눈이 마주쳤다. 셀린이 델리나를 향해 가만히 미소 짓고는 펠릭의 안내를 받아 방을 빠져나갔다.

“…….”

셀린이 나가고 방 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벨리온의 집무실에 들어온 보석이는 극도로 얌전해져 있었고, 보석이를 품에 안은 델리나도 자리에 앉았다.

“파티는 끝났나?”

“진작에 끝났죠.”

셀린의 등장으로 케이크만 먹고 방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것을 아는 듯 벨리온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저기…… 저 사람은…….”

“셀린이라고 하던데.”

“…….”

“앞으로 여기에 머물 거고.”

‘역시 그렇게 됐구나.’

벨리온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벨리온이 물었다.

“더 묻고 싶은 건 없나.”

“묻고 싶은 거요?”

벨리온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델리나가 답했다.

“혹시 제가 방을 옮겨야 하는 건가요?”

“왜 옮겨.”

“원래 제 방은 대공가의 일원들이 쓰는 방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하나 싶어서요.”

울피림의 이름을 받게 될 셀린이 그 방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벨리온이 단호하게 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계속 써.”

“네. 그럴게요.”

‘하긴 내가 몇 년이나 계속 썼는데 거길 주는 것도 좀 그런가.’

사용 흔적이 있는 가구들을 쓰기는 싫을 테니, 아예 새 방을 주는 건가 싶었다. 델리나는 서류 정리를 하기 시작한 벨리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전하는 어땠더라.’

다섯 명의 아이들이 셀린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벨리온의 태도에 대해선 딱히 알려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울피림의 이름을 주고 딸로 인정까지 했으니, 어느 정도 호감은 있었을 것이다.

“저도 이만 가 볼게요. 쉬세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 델리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리온도 가는 델리나를 잡지는 않았고, 델리나는 방을 나섰다.

‘유독 조용하네.’

대공가는 원래 조용했지만 셀린 때문인지 유달리 고요한 것 같았다. 복도에는 사용인 하나 없었다. 그사이 자유를 찾은 보석이는 창가를 통해 사라졌고, 델리나는 혼자 고요한 복도를 거닐었다.

‘음?’

복도 끝에서 모퉁이를 돌자, 멀리서 사용인들 몇몇과 셀린이 보였다. 방 정리를 하는 듯, 사용인들이 청소 도구를 들고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방도 정해졌구나.’

셀린에게 주어진 방도 대공가에서 상당히 큰 방이었다. 델리나가 잠시 사용인들을 보고 있는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 셀린이 델리나를 향해 인사했다.

1691581008132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