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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성년식의 꽃 (67/94)


67화 성년식의 꽃
2023.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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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손 전하를 뵙습니다.”

아슈드가 눈앞에 서 있었다. 델리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를 보던 노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건 양보할 수밖에 없지.”

노아가 뒤로 살짝 물러섰고, 델리나는 앞에 선 아슈드를 바라봤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금색 머리카락 밑으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는 델리나만을 보고 있었다. 어느새 훌쩍 키가 자란 탓에 이제는 델리나가 고개를 들고 쳐다봐야 할 지경이었다. 손을 내밀고 있던 아슈드가 입을 열었다.

“뭐해, 빨리 안 잡고.”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내민 손은 얌전히 델리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춤이 시작되었다. 델리나도 아슈드의 손을 잡고서 발을 움직였다.

“언제 온 거야?”

“춤 시작 직전에.”

“아, 그래서 못 봤구나. 계속 노아랑 춰서 못 봤어.”

델리나가 노아를 떠올리며 말하자 아슈드 역시 노아를 떠올린 듯 미간을 구겼다.

“오랜만에 만나도 저놈은 한결같이 재수가 없어.”

“너도 한결같이 표정이 똑같아. 좀 웃어 봐, 그래도. 성년식이잖아.”

아슈드와 춤을 추자 데뷔탕트에서의 일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당시 주변 영애들을 꽤나 울렸던 아슈드는, 이제는 다른 의미로 영애들을 울리고 있었다.

“하기야 네가 인상만 써도 주변 영애들은 좋아하려나? 듣자 하니 황태손 전하의 외모 때문에 전국의 여인들이 가슴앓이를 한다고 하던데.”

“그런 건 또 어디서 봤어?”

“어디서 보긴. 한동안 신문에서 황태손의 외모를 찬양하는 기사가 나돌았는데. 오죽하면 그 외모가 너무 눈이 부셔서 등불 대신에 황태손의 초상화를 구해 쓴다는 소문이…….”

“그만, 그만!”

더는 듣기 힘든 듯 아슈드가 빠르게 말을 끊었다. 델리나가 키득거리며 귓불이 달아오른 아슈드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외적인 부분을 차치하고서라도, 아슈드는 착실히 성장했다.

‘오죽하면 제국을 부흥시킬 차기 황제감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하지.’

그만큼 아슈드는 열심이었다. 황궁에서의 일은 물론 때때로 바깥으로 시찰을 나가 제국민들의 상황을 살피기도 했다. 덕분에 아슈드의 위상은 높아졌고 이제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부족함이 없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여전히 껄끄러운 상황도 존재했다.

아슈드는 황제인 하이르하고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만, 사적으로는 서로 대화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델리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그레이스가 두 사람 사이를 조율하고 있었기에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었다.

“왜, 내가 봐도 많이 멋있는데.”

“……!”

아슈드의 발이 잠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를 받치듯 델리나의 팔이 아슈드의 허리를 감쌌다.

“왜 그래? 괜찮아?”

“…….”

드문 아슈드의 실수에 델리나가 놀라 물었지만 더 놀라 보이는 쪽은 아슈드였다. 이윽고 델리나의 팔이 몸에 감긴 것을 알아차린 아슈드가 몸을 흠칫 떨었다.

“뭐야, 천하의 황태손 전하께서도 실수할 때가 다 있고.”

“시끄러워. 다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그런 거잖아.”

제 실수를 알기는 아는 듯 아슈드의 귓불은 더 붉어져 있었다. 곧 아슈드가 우물댔다.

“……네가 보기에도 그래 보여?”

“뭐가?”

“나 멋있냐고.”

“응. 객관적으로 봐도 그렇지 않나?”

“아니, 객관적인 거 말고.”

“주관적으로? 음…….”

말할 듯 안 할 듯 뜸을 들이는 델리나였다.

“생각 좀 해 볼까? 고민을 좀 오래 해야 할 것 같은데.”

“…….”

누가 봐도 장난스러운 델리나의 미소에 아슈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때 음악 소리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듯 커졌고, 동시에 아슈드의 손이 델리나의 허리를 붙잡았다.

“!”

공중에 떠오른 델리나의 몸이 한 바퀴 빙글 돌더니 바닥에 착지했다. 한 치의 실수도 없는 완벽한 동작이었다. 주변에서 춤을 추고 있던 영애와 영식들이 잠시 넋 놓고 바라볼 정도로.

델리나는 저를 무척이나 가볍게 들어 올린 아슈드를 잠시 놀란 눈으로 보다가 이내 미소 지었다.

“그동안 근력 운동 열심히 했나 본데?”

“원래 세다고 했지.”

“글쎄, 그랬던가? 분명 그때 데뷔탕트 때는…….”

“……아예 공중에 띄워 버린다.”

“죄송합니다, 황태손 전하.”

음악 소리가 천천히 작아졌다. 그에 맞춰 자연스레 인사를 하면서 델리나가 소곤댔다.

“솔직히 방금 건 주관적으로 멋있긴 하네.”

“당연한 소리를.”

아슈드의 태연한 대꾸에 델리나가 미소 지었고, 그를 본 아슈드가 가만히 웃었다. 그렇게 성년식의 춤이 마무리되었다.

* * *

“전하!”

춤이 끝나자마자 델리나는 벨리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주변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에 한눈에 찾을 수 있었다. 벨리온이 델리나와 눈을 마주했다.

“보셨어요? 저 춤추는 거?”

“그래.”

“많이 연습했는데, 괜찮았죠?”

성년식 춤을 누구와 추게 될지 알 수 없었기에 더더욱 연습에 박차를 가한 델리나였다. 정작 무척 익숙한 이들과 춤을 추기는 했지만.

“물론 어쩌다 보니까 저보다 훨씬 잘 추는 애들이랑 추기는 했지만요. 그래도 이 정도면 다른 영식들이랑 춰도 문제없어요.”

“굳이 춰야 하나?”

“물론 가서 추자고 하지는 않겠지만, 만일을 대비하는 거죠.”

델리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때 꽃 한 송이가 델리나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이건……?”

놀란 델리나가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가족끼리 한데 모여 저마다 꽃을 주고받고 있었다. 다시 델리나가 벨리온을 보며 물었다.

“알고 계셨어요? 성년식에서 꽃 주는 거.”

성년식을 치르는 영애에게 부모나 가족들이 꽃을 달아 주는 것이 관례였다. 델리나는 벨리온이 내미는 꽃을 받았다.

“얼마 전에 펠릭한테 들었었지. 무조건 좋은 꽃으로 줘야 한다고 성화던데.”

“그러셨구나. 그래서 꽃을…….”

티 내지 않고 연회장 안까지 꽃을 들고 왔을 벨리온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슴에 꽃을 단 델리나가 미소 지었다.

“감사해요. 잘 받을게요.”

부모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족도 아니었다. 그랬기에 꽃을 받는 건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막상 꽃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럼 이제 성인 광대지.”

“그렇죠. 그런데 성인이 되어도 제 호칭은 그대로고요.”

몇 년이 지났는데도 참 한결같은 호칭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름으로 부르면 더 어색할 것 같았다.

“춤이 끝났으니 이제 자유롭게 오고 가도 되기는 하거든요. 어쩔까요? 대공가로 돌아갈까요?”

“네 마음대로 해.”

“아니면 전하 먼저 가셔도 괜찮고요.”

“아니. 그냥 같이 가.”

단호한 벨리온의 말에 델리나도 더는 먼저 돌아가기를 권유하지 않았다. 벨리온은 주변에 있던 영식들을 한 번씩 훑어볼 뿐이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영식들이 움찔거리며 슬슬 물러났다.

“델리나!”

물론 벨리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인물은 있었다. 멀리서 해맑게 다가오는 에일리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후 고개를 꾸벅 숙이는 기드온까지 본 벨리온이 뒤로 물러섰다.

“갈 때 되면 이야기해.”

“아, 네.”

특히 에일리를 보자 슬그머니 사라지려고 하는 벨리온이었다. 가까이 온 에일리가 델리나 가슴에 있는 꽃을 발견했다.

“뭐야, 설마 대공 전하가 주신 거야?”

“응. 선물로 주시더라고.”

“진짜? 잘됐네!”

그 말에 반색한 에일리가 기드온을 바라보았다.

“근데 기드온도 너한테 줄 꽃 준비했다는데?”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어 델리나가 돌아보자, 기드온이 정말로 꽃을 들고 서 있었다. 경악할 만한 광경에 델리나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혹시 흰 국화 같은 거야? 내 미래의 장례식?”

“미쳤다고 그러겠냐.”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기드온이 델리나에게 꽃을 내밀었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챙겨 주는 거지.”

“…….”
“기왕 이렇게 된 거 두 개 달면 되겠네.”

“……고마워. 잘 달게.”

예상치 못한 기드온의 꽃 선물을 델리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받아 들었다. 곁에 있던 에일리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내가 살다 살다 여기 남매의 훈훈한 모습을 다 보네.”

“실은 나도 어색해.”

당사자인 델리나도 얼떨떨한데 보는 에일리야 오죽할까 싶었다. 꽃을 단 델리나가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왜 둘이 같이 와?”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마지막에 같이 춤췄어. 무려 기드온이랑.”

“말은 바로 해야지. 따지자면 내가 피해자야.”

듣자 하니 두 사람은 함께 춤을 춘 모양이었다. 절망하듯 제 머리를 감싸 쥐던 에일리가 중얼거렸다.

“안 돼. 다른 영식들이랑 최대한 많이 춰도 모자랄 판에 기드온이랑 춤이라니……. 아니야, 그래도 많이 추기는 췄잖아. 로덴 백작가 영식하고도 췄었고, 스멜닌 남작가 영식이랑도 췄었고, 그리고 또…….”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어?”

“당연하지! 그게 지금 얼마나 중요한데!”

“왜?”

“아, 하긴. 너도 잘 모르겠구나. 나도 최근에 안 거라서.”

에일리가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렸다.

“요즘 영애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돌고 있거든. 성년식 춤을 함께 춘 영식 중 한 명이랑 무조건 이어진다고.”

“뭐? 진짜?”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니까? 너 레제라 부인 알지? 그분도 남편분이랑 성년식 춤출 때 처음 만났고, 아, 그리고 사엘라 부인도! 그분도 남편분이랑 성년식 춤을 같이 췄대.”

“…….”

“그래서 나도 이번에 완전히 벼르고 나왔다고. 그래도 기드온 빼면 다들 좋은 상대들이었는데…….”

이어지는 에일리의 말에도 델리나는 침묵했다. 에일리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고, 연회장 안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성년식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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