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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내 애는 뭔 죄야 (66/94)


66화 내 애는 뭔 죄야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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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주변에 선 이들은 자연스레 물러섰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노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몇 년 전이었다.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 어딘지 낯설게 느껴졌다.

다른 영애들이 홀린 듯 노아를 바라봤다. 아예 넋을 놓고 있던 에일리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제 뺨을 살짝 때리며 친구의 남자다, 친구의 남자다, 하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디아몬 공자.”

노아를 본 머닌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인사했다. 그러는 사이 노아는 두 사람 가까이로 와 섰다.

“멀리서 듣자 하니 약혼장 이야기를 하던데.”

“…….”

“자르버네 영식은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도 연회장 한가운데서 하는 걸 좋아하는 편인가? 보란 듯이 목소리까지 높이는 걸 보면? 아니면 정말 플로렌 영애와 약혼하고 싶어서?”

노아가 등장하자 머닌은 말이 없어졌다. 그 이유는 빠르게 알 수 있었다.

“아, 하긴. 퍽 급하긴 하겠지. 최근에 사업을 너무 무리하게 확장해서 빚이 상당하다고 하던데.”

“……!”

“확실히 울피림 대공가라면 아주 좋은 사업 파트너지. 탐낼 만도 하고. 그러니까 대공가랑 연결되어 있는 플로렌 영애랑 어떻게든 엮여 보려고 이러는 건 잘 알겠는데…….”

말을 부러 흐리며 고개를 기울이던 노아가 눈매를 가늘게 휘었다.

“……라고, 이렇게 개인적인 일을 연회장에서 말하는 걸 좋아하는 건가? 자르버네 영식은?”

노아가 제법 천진난만하게 묻자 머닌의 얼굴이 붉어졌다. 노아가 머닌에게 더 다가가더니 나직이 말했다.

“울피림 대공가에 가서라도 집안이 기울어지는 꼴을 막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다고 제멋대로 울피림 영지에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울피림을 지키고 있는 늑대한테 목이 찢긴 채 죽고 싶지 않으면.”

“!”

그 말에 머닌의 안색이 파래졌다. 주춤대며 물러서던 그의 시야로 어느샌가 저 멀리서 살벌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벨리온의 모습이 들어왔다.

“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더더욱 사색이 된 머닌이 그대로 몸을 돌리고 도망가기 시작했고, 델리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작게 혀를 찼다. 소곤거리는 통에 노아가 머닌에게 무어라 말하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보아하니 좋은 말은 아닌 듯했다.

“그…….”

델리나가 노아에게 말을 건네려는데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식을 알리는 음악에, 모여 있던 영애와 영식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노아가 델리나의 곁을 지나치며 속삭였다.

“재회의 대화는 조금 후에 춤추면서 할까.”

“뭐?”

델리나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노아는 저 멀리로 걸어가 버렸다. 그사이 정신을 차린 듯 에일리가 다가와 델리나를 이끌었다.

“우리도 가야지. 얼른 와.”

“아, 어, 응…….”

성년식의 시작을 알리는 춤은 여느 춤과는 방식이 조금 달랐다. 서로 원하는 상대가 아닌, 무작위로 파트너가 정해지기에 델리나는 자리에서도 계속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

‘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날 구분하려고?’

파트너를 무작위로 정하기 위해 불조차 꺼 버렸으니 얼굴도 볼 수 없었다. 델리나의 의문은 더 깊어졌다. 곧 불이 다시 켜지고, 음악이 바뀌며 춤의 시작을 알렸다.

“……!”

그리고 델리나는 볼 수 있었다. 맞은편에서,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노아를.

“너, 너…….”

“춤추는 건 오랜만인데. 괜찮겠지?”

제게 손 내미는 노아를 보고 놀라면서도, 델리나는 자연스레 그의 손을 잡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델리나가 곧장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불 꺼진 와중에 내가 보였어?”

“신제품의 효과를 좀 봤지.”

“신제품?”

“엘피샤 후작가가 발명하고 디아몬 공작가가 판매하는 물약. 보기에는 투명하지만 어둠 속에서는 밝게 빛을 발합니다. 지금 행사로 열 개를 사면 한 개는 서비스.”

물건을 팔 듯, 물약을 설명하는 노아의 말에 델리나는 깨달았다.

“아까 지나가면서 내 팔에 그거 발랐구나. 그 빛으로 나 찾았고.”

“그렇지.”

그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황당한 듯 웃던 델리나가 다시 물었다.

“수도에는 언제 돌아온 거야?”

“며칠 됐어.”

‘마지막으로 본 게 2년 전이었나, 아니, 3년?’

가까운 곳에 있으니 노아의 얼굴도 더욱 잘 보였다. 확실히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도 훨씬 성숙해진 것 같았다. 노아가 델리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 보니 약혼장이 온 것 같던데.”

“응. 몇 개 왔더라고.”

“만날 거면 제대로 된 놈을 만나야지. 그런 싸구려 보석 주렁주렁 매달고서 허세나 부리는 놈보다는.”

“어련하겠어. 애초에 네 앞에서는 다 싸구려 보석 아니야? 난 지금 네 비싼 신발 밟을까 봐 완전 긴장하고 있는데.”

노아의 신발 하나만 해도 몇몇 영식들의 옷을 모두 합친 것보다 비쌀 터였다. 노아는 부정하는 대신 델리나의 몸을 빙글 돌렸다.

“그런 계산을 다 할 줄 알고. 돈으로 자기를 살 수 없다고 자신하던 플로렌 영애는 어디 가고?”

“그 영애는 이제 없을걸. 그동안 너무 자본에 찌들었거든.”

“왜, 그래도 여전히 내 눈에는 네가 값나가는 보석 같은데.”

“뭐?”

“호박 보석도 보석이지.”

“…….”

세월이 흘러도 한결같은 주둥이에 델리나는 슬며시 노아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지금 모른 척 저 신발을 밟아 버릴까 싶었다.

그런데 그를 눈치챈 듯 노아가 재빠르게 발을 바꿨다.

“어, 음악 끝났다.”

음악이 바뀌며 파트너와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도 노아의 손은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델리나가 머뭇대는 사이, 다른 이들은 어느새 파트너를 모두 바꾼 상태였다.

“뭐야, 나랑 더 추려고?”

춤추는 대열에서 조금 벗어나 있던 탓에 생긴 일이었다. 노아가 태연히 말했다.

“영식들 보석 자랑 듣는 것보다 나랑 이야기하는 게 더 값지지 않겠어?”

“나, 참…….”

그 말에 피식 웃은 델리나가 결국 노아의 손을 잡고서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왔으면 왔다고 편지라도 보내지 그랬어. 그럼 만났을 텐데.”

“그럴까 했는데, 마무리할 사업이 좀 있어서.”

“아, 네가 머물렀던 거기?”

무기와 힘만이 통하는 무법 지대에서 최초로 상거래를 뚫는 데 성공한 것도 대단했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그 안에다 길드를 새로 설립하기까지 한 노아였다. 더더욱 거대해졌을 공작가의 재력을 상상하던 델리나는 혀를 내둘렀다.

“어련하겠어. 돈 쪽으로는 철저하신 디아몬 공자님이신데. 다른 건 몰라도 디아몬 공작가랑 돈으로 얽히는 순간…….”

순간,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디아몬 공작가와 돈으로 진득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떠올린 델리나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것을 본 노아가 싱글싱글 웃었다.

“왜? 너 빚 때문에?”

“이자는…… 이제 얼마니?”

원래 떠나 있는 동안에는 무기한 무이자 대출을 약속했던 노아였다. 그런데 이제 노아가 돌아왔다. 델리나는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내가 없는 동안에는 무기한 무이자였지.”

“…….”

“계속 그렇게 해 줄까? 무기한 무이자로?”

“!”

파격적인 이야기에 델리나의 눈이 번쩍였다. 그러나 곧 델리나는 경계 어린 눈으로 노아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아무 조건 없이 이럴 리가 없었다.

“잠깐만, 설마…… 내가 안 갚으면, 대를 이어서 갚게 하려고?”

노아는 제 손주의 손주까지도 계속 뽑아 먹을 수 있는 인간이었다. 잠시 빚에 허덕이는 후손들을 상상한 델리나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미래의 내 애는 뭔 죄야!”

퍽 거센 델리나의 반응에 재밌다는 듯 노아가 큭큭대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까지 했어?”

“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 아니야?”

“뭐, 아니라고 부정은 못 하겠지만……. 만약 네 말대로 자식들한테 빚이 넘어가도 그걸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있기는 뭐가 있어. 너랑 똑 닮은 네 자식들이 내 자식들한테 빚을 갚으라고 하겠지. 애초에 내 남편이나 내 자식들은 무슨 죄야.”

‘응?’

열을 올리며 말하던 델리나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가만, 가족들이 채무자가 안 되게 하려면 애초에 남편 자체를…….’

“뭔지 알겠어?”

“!”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노아의 얼굴에 델리나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손이 노아에게 잡혀 있는 채였다. 시선 둘 곳을 못 찾고 델리나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자 노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아니. 그게…… 모르겠는데.”

한순간 묘해진 분위기에 고개마저 떨군 델리나가 우물거렸다. 하지만 노아의 집요한 시선이 계속 달라붙었다.

“그래? 진짜 모르겠어?”

“끝! 춤 끝났다!”

그때 절묘하게 끊긴 음악이 화제를 바꾸도록 도와주었다. 노아의 품에서 빠져나오려는 듯 델리나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노아도 별말 하지 않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제, 이제 너랑 대화는 충분한 것 같으니까 마지막 춤은 다른 영식이랑 출게.”

델리나가 허둥대며 춤을 출 다른 영식을 빠르게 찾고 있는데 음악이 바뀌었다. 이어서 들려오는 익숙한 멜로디에 델리나도, 노아도 음악이 들리는 방향을 바라봤다.

“이 음악…… 분명히 예전 데뷔탕트 때…….”

델리나가 중얼거리는데 마침 멀리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를 보며 노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마지막 춤으로 이 음악이라니, 아무리 봐도 권력남용인데.”

“…….”

노아의 말에 대꾸도 않은 그가 델리나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델리나는 자연스레 시선으로 손끝을 따라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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