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광대 데려가려면 나부터 이겨
(58/94)
58화 광대 데려가려면 나부터 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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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광대 데려가려면 나부터 이겨
2023.07.28.
헬리움 제국에서 돌아온 데카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의 자리에 오른 데카르는 언제나 무료하다는 얼굴이었다. 집무실에 앉은 그가 의자를 기울이는데 러비가 나타났다.
“폐하.”
러비의 뒤로 각종 선물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여러 제국과 왕국에서 폐하의 즉위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이건 오엘 왕국에서 온 것이고요, 또 이건…….”
“뭘 또 여기까지 끌고 와서 그런 걸 보여 주고 있어. 그냥 보석이나 옷 같은 건 알아서 잘 분류해 놔.”
“그래도 어느 선물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셔야지요. 그래야 나중에 편하실 거 아닙니까.”
“아니, 내 머리는 이미 편하지 않은데.”
러비의 말에도 데카르는 선물에 아예 관심을 꺼 버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러비가 곧장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렇다면 이건 관심 있게 보실 수 있으시겠군요.”
“뭔데?”
“울피림 대공가에서 보내온 즉위 선물입니다.”
러비의 예상이 적중했다. 울피림이라는 말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데카르가 러비에게서 상자를 받아 들었다.
“울피림 대공가에서 보내왔다는 거지?”
제법 큰 상자에 비해 무게가 가벼웠다. 그러자 영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러비가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제가 먼저 열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아냐. 대공은 이런 상자에 무언가 장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거든. 대놓고 죽이면 몰라도.”
그렇게 말하면서 데카르는 빠르게 상자를 열었다. 잠시 선물을 내려다보던 데카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길래 그러십니까?”
“독약 병. 그것도 아주 익숙한 거.”
“…….”
“산산이 깨트려서 보냈네? 아주 정성스럽게도 말이야.”
그의 말대로 상자 안에는 아주 잘게 부순 독약 병 조각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즉위 선물의 뜻은 명확했다.
“눈치챘나 보네. 내가 보낸 선물을.”
타 제국 황제의 즉위 선물로 깨진 독약 병을 주다니. 경악할 만한 일이었지만 데카르의 태도는 마냥 밝았다.
“못 본 새 아주 성격 있어졌는데? 이렇게 도발에 도발로 응수할 줄도 알고.”
“그런 모양입니다.”
“아, 역시 그 광대를 데려왔었어야 했나?”
벨리온의 반응에 더더욱 아쉽다는 투로 데카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러비는 별다른 대꾸 없이 상자를 받아 땅에 내려놓았다.
“즉위 전까지는 소란스러운 일은 자제하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응. 근데 이제 황제 됐잖아? 그러면 마음대로 해도 되지 않나?”
“…….”
“그런데 웃겨. 내가 황제인데도 뭔가 마음에 드는 건 전부 대공한테 있단 말이지…….”
그 순간 데카르의 눈이 서늘해졌다. 그런 그를 보던 러비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또 선물이라도 보내시겠습니까?”
“이제는 됐어. 그런 걸로는 이제 어림도 없지. 그보다는 좀 더 재미있는 방법으로 광대 영애를 데려와도 좋겠어.”
“참…… 누차 생각하지만 폐하는 유독 대공가와 관련된 이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보이십니다.”
“음, 그러게. 근데 이번에 후계자로 되었다는 그 대공자는 그냥 그래.”
그 말에 러비가 답했다.
“아, 이번에 정식으로 대공자가 되었다는, 그 칼릭스 대공자 말씀이시군요. 울피림 대공가는 워낙에 사람 수가 적어서 누가 후계자가 될까 싶었는데, 결국은 그 대공자가 되었죠.”
“응. 그런데 대공의 가족이 그 소년 한 명만 있던 건 아니던데.”
“예?”
무슨 소리냐는 듯 러비가 되물었지만 데카르는 씩 웃기만 했다.
“하여간에 나중 되면 알겠지. 상황이 더 재미있어질지 아닐지.”
“…….”
“그리고 그 광대 영애도, 나중에 성장해서 또 얼마나 재미있는 걸 보여 줄지도 궁금하고.”
데카르가 발밑에 놓인 상자를 지르밟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다들 그렇게 가는구나. 그것도 몇 년씩이나.
고요한 방 안에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은 델리나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애썼다. 물론 납득은 갔다.
각자 위치와 역할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 수업과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러나 기약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델리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아가씨!”
그때 문이 열리며 펠릭이 들어서자 델리나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들 인사 끝났어?”
“예. 방금 전하와는 인사 끝났고요. 지금은 모두 방에 모여서 대화들을 나누고 계세요.”
“가자, 그러면.”
“조심하세요 아가씨. 그러다 넘어져요.”
벨리온과의 인사가 끝났다는 말에 델리나가 튀어 나가듯 방을 나섰다. 델리나의 적극적인 태도를 보며 펠릭도 싱글싱글 웃었다.
“어디, 어디에 있어? 어디 쪽으로 가야 돼?”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제법 다급해 보이는 델리나를 펠릭이 안내했다. 펠릭을 따라가던 델리나는 퍽 익숙해 보이는 문을 보며 서서히 걸음을 멈췄다.
‘여긴…….’
“안 들어가십니까?”
“……여기 말이야. 혹시 내가 처음에 후원 시험 치렀던, 그 방 아니야?”
그 말에 펠릭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 그랬었죠. 맞네요. 맨 처음에 아가씨가 시험을 봤던 곳이죠. 그때 하도 난장판이 돼서 새로 수리하기는 했지만요.”
“거기 맞구나.”
“그럼요. 저도 다 기억나는데요. 생각해 보면 아가씨는 첫 만남 때부터 온갖 비범한 일들을 많이 하셨지요. 특히 시험이 끝나고 방에 들어갔던 그 순간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거든요. 그때…….”
“그랬지! 얼른 들어가자!”
당시의 대형견남 사건을 떠올린 듯 펠릭의 입꼬리가 씰룩대며 올라가자, 델리나가 그의 회상을 방해하듯 다급히 문을 열었다.
“……!”
문을 열자 다섯 명의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다섯 쌍의 눈이 델리나에게 몰렸고 델리나 또한 잠시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컷 달려와 놓고 왜 그러고 서 있어?”
노아가 웃으며 말하지 않았더라면 델리나는 계속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제야 델리나도 천천히 다가왔다.
“……다들 전하께 인사드리고 온 거야?”
“인사랄 것도 없었어. 그냥 몇 마디 하고 온 정도고. 우리 어디 멀리 간다고 놀라거나 울 사람도 아니니까.”
반센트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와중에도 델리나는 계속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진짜 다들 가는 거야? 그렇게 몇 년 동안? 언제 올지도 알 수 없고?”
“…….”
“나는 그것도 모르고…….”
다섯 아이들이 두렵기만 했던 것이 엊그제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작별을 해야 하다니, 여러모로 마음이 울적해졌다.
“왜, 우리 가는 거 서운해?”
“…….”
“그러면 나랑 같이 갈래?”
노아의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델리나가 물었다.
“……들어 보니 너 간다는 데가 무법 지대라고 하던데.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칼이 날아온다고. 그리고 점심때는 도끼가 날아오고, 저녁때는 낫이 날아오고.”
“응. 맞아. 새벽에는 화살이 날아오고.”
“부디 무사히 잘 다녀오렴.”
그 말에 냉큼 작별 인사를 건네는 델리나였다. 그런데 노아의 말에 아슈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애도 아니고, 뭘 어디를 같이 가자고 해.”
“아, 하긴. 우리 ‘빛나시는’ 황태손 전하께서는 혼자 뭐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지요?”
“진짜 죽고 싶어?”
공연 때의 일을 상기시키며 노아가 이죽대자 아슈드가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래, 너 정도는 확실히 혼자서 없앨 수 있겠는데.”
“그러면 한번 해보든가.”
순식간에 살벌해진 분위기에 이제는 체념하듯 델리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아이들은 익숙하다는 듯 두 사람을 관람했다.
“델리나.”
“응?”
“그러면 나랑 가.”
델리나의 곁으로 온 젠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델리나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음, 그러니까 젠은…… 산에 올라가서 훈련받는다고 했었지?”
“응.”
“그 각종 맹수들이란 맹수들이 다 있는?”
“응, 응.”
대공가를 둘러싼 험준한 산. 일반인이 올랐다가는 짐승들에게 먹혀 뼈도 안 남는다는 말이 돌 정도로 무시무시한 악명을 지닌 곳이었다.
“내가 맛있는 것도 줄게.”
“아니, 아니야. 아마 내가 맛있는 게 될 확률이 높으니까……. 힘들 것 같은데.”
델리나의 말에 이번에는 칼릭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맛있는 건 나랑 같이 먹어야 돼.”
“응. 그래. 근데 네가 가는 설원에는 눈밖에 없어……. 그걸 퍼먹을 수는 없잖니?”
어느새 누군가를 따라가야 할 분위기가 되자 델리나는 진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러자 반센트가 툭 말했다.
“잠도 자고, 밥도 주고. 그러면 아카데미만 한 데가 없지.”
“…….”
“어려울 것 없어. 잠만 세 시간씩 자면서 공부하면 돼.”
“그거참 좋은 정보네. 고마워라.”
정말 없던 눈물도 쏙 들어갈 만한 이야기들에 델리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어떤 의미로는 참 한결같았다.
“어디를 데리고 가.”
그때 델리나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벨리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
“방금 무슨 소리지?”
“아, 별건 아니고요. 그냥 저도 같이 가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델리나의 말에 벨리온이 아이들을 응시했다. 그러자 어느새 소란을 일으키던 아이들이 곧 잠잠해졌다.
“누가.”
“…….”
“누가 광대 데려가려고 하는데.”
한순간 서늘해진 분위기에 델리나가 수습하듯 말했다.
“그냥 다들 농담으로 하는 소리죠. 설마 진짜 저를 데려가고 싶어서 그러겠어요?”
“…….”
하지만 델리나의 말에도 모두가 침묵했다. 이제는 아이들 모두가 벨리온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광대 데려가려면 나부터 이겨.”
“네, 네. 저 여기 계속 있을 거니까요. 아무하고도 같이 안 가요.”
혹여 마지막까지 맞붙을까 싶어 델리나가 재빨리 벨리온의 말을 받았다. 하여간에 이게 이렇게까지 진지해질 일인 건지. 델리나는 고개를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