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아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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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아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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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아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2023.07.26.
그것은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벨리온이 델리나를 데려가기 위해 백작가에 찾아갔던 날 생긴 일이었다.
“제가 이렇게 전하와 독대하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델리나를 먼저 방에서 내보내고 루튼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벨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래, 나도 몰랐지.”
확실히 저가 이렇게 행동할 줄은, 벨리온조차 예상치 못했다. 저가 백작가에 온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델리나를 다시 마주하는 순간, 꽤나 잘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 것 또한 놀라웠다.
“말한 대로 영애를 내가 후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보호자로 나서려면 백작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정말 그러신 거였군요. 그래서 직접 이렇게 오셔서…….”
말하면서도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던 루튼이 벨리온을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아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허락하는 건가?”
벨리온 또한 제 가문을 둘러싼 악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흔쾌히 델리나를 보내 주는 루튼의 모습에, 벨리온이 재차 물었다.
“예. 제가 안 된다 해도 그 아이의 눈은 이미 갈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번 결심하면 몰래라도 갈 아이이지요.”
그 말에 차마 부정은 못 하겠다는 듯 벨리온이 침묵했다.
“제가 전하의 가문을 에워싼 소문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
“하지만 소문이라는 것은 때로는 왜곡되고 때로는 부풀려지는 법이지요. 해서 저 또한 항상 스스로 겪어 보기 전까지는 편견을 갖지 않도록 조심하는 편입니다.”
이윽고 루튼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러니 저는 오늘 제가 본 전하의 모습을 믿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지지해 주기로도 결심했고요.”
이어 루튼의 마른기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다시피 이렇게 몸이 좋지 못해 델리나와 기드온에게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부끄럽지만, 집안 꼴도 엉망이고요.”
“집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고 있는 건가?”
“니엘이 아이들의 보호자로 저택에 남아 있겠다고 번지르르하게 말해도 저는 그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아들의 거짓된 얼굴을 자연스레 알게 되지요. 하지만 제 몸이 이러니, 또 함부로 나서지도 못하지요.”
“……수십 년을 같이 산 아들보다 처음 본 나를 더 신뢰하는 건가.”
“피로 이어져 있다 해도 그것을 이용해 더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해서…… 정말 염치없지만, 전하께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루튼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한 명 더 후원을 해 달라는, 그런 염치없는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기드온, 그 아이 한 명에게 아주 조금만 관심을 갖고 계셔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손자에게 무슨 짓을 할까 싶어, 노인은 성치 못한 몸으로 허리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그런 루튼을 가만히 바라보던 벨리온이 입을 열었다.
“손자 쪽에 그림자를 붙여 주지.”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그 말에 루튼이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러자 볼일이 끝났다는 듯 벨리온이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때 루튼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제 손녀를, 델리나를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벨리온은 도로 몸을 돌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이건 누군가의 음모입니다!”
“네! 맞아요!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재판장 한가운데에서 니엘과 샬롯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수군거렸고, 모두를 진정시키듯 재판장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시오. 이미 증거가 모든 일을 명명백백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듯 재판장이 손에 든 서류를 흔들었다.
“사람을 고용해 플로렌 백작을 암살하려 했던 증거들이 모두 여기에 있소.”
“제가 어떻게 아버지를 죽이라 의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정말 모함입니다!”
재판장이 증거를 내밀어도 니엘은 계속 부정했다. 그러자 재판장은 또 다른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렇다면 이것도 부정할 참인가? 붙잡힌 암살자가 고용했던 이의 이름을 밝혔었는데?”
“그건, 그건……!”
“그 외에도 암살자를 매수하는 걸 목격한 증인들과, 살인 의뢰 비용으로 받았던 돈의 출처까지 전부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계속되는 재판장의 말에 니엘과 샬롯이 어깨를 벌벌 떨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증거들을 찾았나 하는 눈치였다. 델리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제 오빠와 할아버지한테 그림자를 붙여 주시고 계셨다고요?”
“그래.”
“……그래서 암살자가 할아버지한테 들이닥치자마자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거군요.”
벨리온은 루튼과의 약속을 지켰다. 게다가 기드온뿐만 아니라 루튼에게도 그림자를 붙였던 벨리온의 판단은 정확했다.
‘분명 초조했던 거야. 내가 대공가의 후원을 받는다는 걸 알게 된 시점부터…….’
델리나 뒤에 대공가가 있다는 것을 안 두 사람은 백작가를 차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초조함에 이성을 잃고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할아버지를…….’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면서까지 백작이라는 자리를 가지고 싶었나 싶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델리나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하, 하지만! 저희가 없으면 아이들은 누가 돌본단 말입니까!”
변명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거라 판단한 니엘이 이번에는 동정심에 호소했다. 그가 근처에 앉아 있던 기드온을 가리켰다.
“정말, 정말 이번 일은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예, 그렇고 말고요. 저희도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없으면 플로렌 백작가에는 저 아이를 돌볼 보호자가 없습니다!”
“…….”
“그러니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부디 저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니엘이 퍽 애처로운 표정을 짓자 재판장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의 플로렌 백작인 루튼은 너무 늙은 데다 병약해서 제대로 된 업무를 볼 수 없었고, 그 후계자인 기드온은 아직 너무 어렸다. 게다가 기드온을 돌볼 다른 친척이 없었다.
“웃기지 마!”
그런데 그때 분노 어린 외침이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기드온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할아버지한테 그런 짓을……! 그러고도 당신들이 내 보호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내가 싫어!”
‘오빠…….’
니엘과 샬롯의 원래 성정을 알고 있던 자신조차 이리 충격에 빠져 화가 나는데 기드온은 오죽할까 싶었다. 분노 때문인지 충격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기드온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태도는 완강했다.
“……!”
기드온을 본 델리나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그 순간 벨리온이 한 손으로 델리나를 막았다. 놀란 델리나가 벨리온을 올려다보자, 벨리온은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까딱이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거라면 제가 도움을 좀 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벨리온이 가리킨 쪽에서 누군가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델리나의 눈이 커졌다.
“……디아몬 공작?”
델리나와 마찬가지로 에드윈을 알아본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에드윈은 태연한 얼굴로 재판장 가까이로 다가가더니 싱긋 웃었다.
“플로렌 영식의 보호자를 찾고 계신 거라면, 제가 하고 싶습니다.”
“……?”
에드윈의 말에 모두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재판장 또한 벙찐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벨리온만이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디아몬 공작이 여기 플로렌 영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자가 되어 주겠다, 이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재판장 앞에서 한 말은 번복할 수 없네.”
“그럼요. 원하신다면 서류로 증거를 남겨도 좋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무려 디아몬 공작가였다. 에드윈이 나서자 한 번 더 그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본 재판장이 이내 정신을 차린 듯 헛기침을 했다.
“……그래, 그렇다면야 상관은 없지만……. 다만 다른 가문 사람이 아이를 후원코자 한다면 증인이 필요하네. 그것도 알고 있겠지?”
“그 증인은 제가 하고 싶습니다!”
상황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재판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한 명의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더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바로 에스텔이었다.
“엘피샤 후작가에서……?”
“네. 제가 증인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괜찮은 것이겠지요?”
디아몬 공작가에 이어 엘피샤 후작가까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에서 플로렌 백작가를 지원하겠다고 나서자 장내가 술렁였다.
니엘과 샬롯의 안색은 더더욱 나빠졌다. 급기야 두 사람은 이에서 딱딱 소리가 날 만큼 덜덜 떨었다. 그러다가 니엘이 기드온을 향해 달려 나갔다.
“기드온! 기드온! 작은아버지가 잘못했다! 응?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되겠니? 그래도 가족인데, 가족인데……. 기드온!”
그러나 니엘은 기사들에게 가로막혀 기드온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버둥거렸다.
“끌어내.”
그 소란에 결국 재판장이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결국 니엘과 샬롯은 기사들에게 결박당한 채 끌려 나갔다. 그 이후로도 얼마간 니엘과 샬롯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지만, 누구 하나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