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같이 먹자
(51/94)
51화 같이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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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같이 먹자
2023.07.21.
여차하면 능력을 쓰기 위해 델리나가 상황을 주시하는 사이, 디오르가 고개를 돌려 탁자에 놓여 있던 디저트들을 응시했다.
“디저트 먹으려고 했어, 칼릭스?”
“…….”
“디저트. 그래. 맛있지, 디저트……. 그것도 특히 우리 엘리네가 참 좋아했던 건데……. 응, 맞아. 항상 식사 후에는 같이 케이크도 먹었는데…….”
‘엘리네?’
델리나가 디오르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디오르가 무너지듯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디오르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엘리네, 엘리네……. 왜 나만 두고 먼저 간 거야, 응? 결혼할 때 약속했잖아. 영원히 같이 살기로 해 놓고서, 왜, 왜…….”
바닥을 보고 흐느끼던 디오르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앞에 있던 칼릭스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왜 그랬어?”
“…….”
“왜 그렇게 엘리네를 힘들게 하면서 나왔어? 엘리네 배 속에서 네가 그렇게 발버둥 치지만 않았어도, 그러지만 않았어도 엘리네는……!”
점점 격양되어 갔다. 그가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너만 이런 걸 먹고 있어? 우리 엘리네는 먹지도 못하는 디저트를? 네가 이걸 먹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아니었으면 엘리네는……!”
그가 칼릭스의 어깨를 흔들며 다그치는 순간, 갑자기 얼굴로 크림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델리나는 디오르가 잠시 고개를 터는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칼릭스의 몸을 디오르에게서 빼내며 외쳤다.
“정신 차리세요!”
‘제정신이 아니야.’
델리나의 생각대로 술에 잔뜩 취한 디오르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크림을 맞고도 멍하게 있던 디오르가 다시 칼릭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델리나가 빨리 칼릭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
“얼른!”
하지만 칼릭스의 몸은 잔뜩 굳은 채였다. 디오르가 서서히 다가왔다. 디오르와 칼릭스를 번갈아 보던 델리나가 능력을 쓰기 위해 다급히 창을 열던 그때였다.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군.”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디오르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디오르 뒤에는 벨리온이 서 있었다.
“전하!”
디오르를 단숨에 기절시킨 벨리온을, 델리나가 반가운 듯 외쳤다. 벨리온 뒤로 펠릭이 나타났다.
“아이고, 어디로 사라지셨나 했는데 역시나였네요.”
바닥에 쓰러진 디오르를 보며 펠릭이 익숙하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델리나가 펠릭을 쳐다봤다.
그러자 펠릭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델리나에게 다가와 소곤거렸다.
“아가씨도 보셨기 때문에 알려 드리지만…… 사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술만 드셨다 하면 이러시거든요.”
“매번 이랬다고? 칼릭스한테?”
“예. 아내분께서 칼릭스 님을 낳다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계속이요. 문제는 술에서 깨면 그걸 기억 못 하신다는 거라…… 참 애매합니다.”
바닥으로 쓰러져 있는 디오르를 보며 펠릭이 복잡한 얼굴로 제 목뒤를 긁적였다. 그사이 벨리온이 칼릭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벨리온의 말에 담담히 답했지만 칼릭스의 얼굴은 어두웠다.
<예비 흑막>
그리고 칼릭스 머리 위에는 여전히 붉은 글자가 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델리나가 칼릭스에게 다가갔다.
“…….”
벨리온과 펠릭이 누워 있는 디오르를 보며 그를 어찌할까 이야기하는 사이, 델리나가 칼릭스 옆에 서서 가만히 그를 불렀다.
“칼릭스.”
그러나 칼릭스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델리나가 무언가 결심한 듯, 식탁 쪽으로 빠르게 다가가더니 바구니를 들고 다시 칼릭스에게 다가왔다.
“뭐하십니까, 아가씨?”
델리나가 보란 듯이 칼릭스 앞에 접시 열 개를 늘어놓았고, 희한한 행동에 펠릭과 벨리온의 시선이 델리나에게 쏠렸다. 그제야 반응을 한 칼릭스도 제 앞에 놓인 접시를 바라보다가 델리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자, 조금 전에 말한 열 접시 먹기야.”
“…….”
하지만 약간 기대가 서린 듯한 칼릭스의 눈빛은 오래가지는 못했다. 손바닥만 한 케이크를 열 조각으로 잘라 열 접시에 나누어 담는 델리나 때문이었다. 스스로도 찔리는 듯 델리나가 변명했다.
“애초에 얼마만큼 접시에 둔다는 이야기는 없었잖아.”
“…….”
“……그래. 내가 미안. 사실 나 그렇게 많이 못 먹어. 사실 다섯 접시도 간당간당하거든.”
칼릭스의 차디찬 눈빛에 결국 델리나가 실토했다.
“그때, 처음 만났을 때 네가 너무 디저트에 관심이 많아 보이길래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어.”
잠시 칼릭스의 반응을 살핀 델리나가 황급히 말을 보탰다.
“디저트 좋아하는 건 맞아! 실제로도 디저트 많이 먹고 싶어서 그래 본 적도 있고.”
“…….”
“그래도……. 집에서 누군가랑 디저트를 먹으면서 대화해 본 지 오래됐거든. 그래서 처음에 너를 만나고서 내심 반가웠어.”
기드온은 애초에 그런 쪽에 관심이 없었고, 그 외에 다른 식구들도 하하 호호 웃으면서 디저트를 함께 먹을 사이는 못 되었다.
그랬기에 무의식적으로 그런 소리를 하면서 칼릭스의 관심을 끌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다시 한번 누군가와 즐겁게 디저트를 나눠 먹고 싶었기에.
“…….”
델리나의 말을 듣고 있던 칼릭스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디저트, 좋아해?”
“그럼. 좋아하지. 진짜 열 접시 도전해 본 적도 있었어. 중간에 먹다 토하긴 했지만.”
당시를 떠올린 듯 델리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델리나의 모습에 칼릭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때 기절한 듯 누워 있던 디오르가 정신을 차렸다.
“여긴……?”
디오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저를 보고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벨리온? 네가 왜 여기 있어?”
“…….”
“그리고 내가 왜 여기에…….”
술에서 조금 깬 듯, 디오르의 어조나 표정은 델리나가 그를 처음 봤을 때와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델리나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저기, 후작님.”
“응?”
“저 칼릭스랑 같이 디저트 먹을 거예요.”
어느새 디오르와 칼릭스 사이에 선 델리나가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상관없죠?”
“어……. 응. 그래, 상관없지. 그런 걸 왜 나한테 허락받니? 그냥 먹으면 되지.”
그렇게 대답하면서 디오르는 제 얼굴에 묻어 있던 크림을 닦아 냈다. 그러자 디오르를 가만히 보고 있던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너.”
“응?”
“역시 방금 전 일 기억하고 있지.”
‘뭐?’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벨리온과 디오르에게 쏠렸다. 당황한 얼굴로 디오르가 입을 달싹였다.
“그게 무슨…… 무슨 소리야?”
“얼굴에 묻은 크림이 뭔지 물을 법도 한데 묻지도 않고, 사람들이 한방에 모여 있는데도 궁금한 기색도 없고.”
“…….”
“항상 칼릭스를 데려간다고 하면서도 몇 년 동안 이렇게 놔둔 것도…….”
쐐기를 박듯, 칼릭스가 말을 이었다.
“술 먹고 네가 네 아들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걸로 보이는데.”
“아니, 난 그런 게 아니라…….”
“변명할 생각은 집어치우고.”
서늘한 벨리온의 얼굴을 본 디오르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그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아니, 아니야. 내가 아니야.”
“…….”
“내가 칼릭스에게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당연하지. 아무렴, 내가,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급기야 이를 부정하듯 중얼거리던 디오르의 눈이 칼릭스를 향했다.
“그렇지, 칼릭스? 아빠가, 아빠가 너한테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
“그렇지? 빨리 뭐라고 말 좀 해 봐. 아빠가 너한테…….”
“역시 네놈은 더 맞아야겠어.”
벨리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한 타격음과 함께 디오르가 쓰러졌다. 정신을 잃은 디오르를 옮기는 것은 펠릭의 몫이었다.
“어디에 둘까요?”
“내 방 근처에. 깨어나면 할 말이 무척 많을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그 대화가 혹시 주먹의 대화는 아닐까 잠시 생각한 델리나였다. 그 정도로 벨리온의 얼굴은 살벌했다. 그때 벨리온이 두 사람에게 성큼 다가왔다. 정확히는, 칼릭스에게 시선을 보낸 채 말이다.
“버번 후작가에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디저트도 먹고 싶으면 먹어.”
“…….”
“그렇게 해도 돼. 네가 잘못한 일은 없어.”
벨리온의 말에 놀란 듯 서서히 칼릭스의 눈이 커졌다. 벨리온이 이번에는 델리나를 바라보았다.
“광대.”
“네?”
“많이 먹지 말고. 토하니까.”
“아, 네.”
난데없이 저를 불러서 놀랐는데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델리나였다. 잠시 후 벨리온마저 방을 떠나자, 잠시 방 안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
“전하 말씀 들었지?”
델리나가 칼릭스의 팔을 잡으며 델리나가 씩 웃었다.
“같이 먹자. 나도 배고프거든.”
“…….”
“뭐, 지금 방 꼴이 썩 좋지는 않지만……. 아니면 밖에서 먹을래? 나름 날씨도 좋으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델리나의 제안에 칼릭스가 우물쭈물했다.
“……디저트 같이 먹어 본 적 없는데.”
“응?”
“같이는 어떻게 먹는지 몰라.”
“그거? 별거 없어.”
델리나가 곧장 쿠키 하나를 꺼내 그것을 반으로 쪼갰다.
“그냥 이렇게 나눠 먹으면 되는 거야. 같이 대화도 하면서.”
“…….”
“그리고 이게 같이 먹는 사람이랑 잘 맞으면 자기도 모르게 많이 먹게 되거든. 혹시 알아? 둘이 같이 먹으면 진짜 열 접시 먹을지?”
칼릭스에게 쿠키를 건네주며 델리나가 씩 웃었다.
“한번 도전해 볼래?”
“둘이?”
“응. 실패하면 어쩔 수 없고. 어차피 기회는 많으니까. 성공할 때까지 같이 먹지 뭐.”
델리나가 가벼운 어조로 당연하다는 듯 말하자, 그제야 멍하니 있던 칼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델리나는 바구니를 챙겨 들고 다시 칼릭스의 팔을 잡았다.
“좋아. 그러면 갈까? 우리의 첫 번째 디저트 모임을 하러.”
델리나가 환히 웃으며 칼릭스를 잡아당겼다. 칼릭스는 순순히 끌려가며 손에 들린 쿠키를 바라보다가 한입 베어 물었다.
“어때? 맛있지?”
“응.”
그러고는 참 맛있게도 우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