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내 광대, 못 줘 (43/94)


43화 내 광대, 못 줘
2023.07.13.


16892507811366.jpg

 
‘납치?’

황궁 연회장 한복판에서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납치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델리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남색 장발과 은색 눈동자를 가진 이는 그리 흔하지 않았기에.

‘데카르 황제?’

루넨 제국의 데카르 황제. 델리나가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자였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 황궁과 결탁하여 울피림 대공가와 전쟁을 일으킨 황제였기에.

‘그런 사람이 지금, 왜…….’

벨리온을 죽게 만들 뿐 아니라 사실상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끈 전쟁을 일으킨 자였다. 하지만 델리나는 놀란 감정을 추스를 새도 없었다. 서서히 연회장이 밝아지면서 누군가 칼을 빼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

바로, 벨리온이었다.

“오, 뭐야. 대공도 와 있었네?”

벨리온이 연회장 한복판에 나타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델리나는 아이들의 능력을 하나씩 풀었고, 여전히 델리나를 안아 들고 있던 데카르가 씩 웃었다.

“전하!”

“어서 이쪽으로!”

벨리온이 칼을 빼 들자 데카르의 기사들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데카르를 둘러싼 기사들이 벨리온을 노려봤다. 그 반대편으로는 어느새 펠릭과 베티가 벨리온 앞에 서 있었다.

“뭐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러기야?”

여전히 저를 향해 날 선 반응을 보이는 벨리온을 보고서도 데카르는 여유로웠다. 그가 저를 에워싸고 있던 기사들을 헤치고 서서히 벨리온에게 다가갔다.

“전하! 위험합니다!”

“됐어. 어차피 너희들로는 저 둘 못 이겨.”

데카르가 기사들을 헤치고 나오자 벨리온 또한 펠릭과 베티 앞으로 나섰다. 이를 안 펠릭과 베티가 벨리온 뒤로 조금 물러났다.

“게다가 난 당당한데?”

“…….”

“이미 약속받았다고. 내 즉위 선물로 원하는 거 하나 받기로.”

‘즉위 선물?’

즉위 선물이라는 소리에 잠시 상황 파악을 못 하던 델리나가 저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데카르를 보며 깨달았다.

‘내가 즉위 선물이야?’

데카르의 뜻을 알아차린 펠릭과 베티의 얼굴도 굳었다. 벨리온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가면 속으로도 느껴지는 진한 살기에, 델리나조차 긴장 어린 얼굴로 데카르와 벨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그건 맞는 말이지.”

데카르와 벨리온 사이로 끼어든 이는 하이르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데카르 황태자의 황제 즉위 기념 선물로 원하는 것을 주기로 말이야.”

“…….”

“그러니 어쩔 수 없군. 이미 한 약속을 무를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것치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감히 황제의 명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눈이었다. 하지만 벨리온은 여전히 데카르를 노려보기만 했다.

“내려 주십시오.”

마지막 경고인 듯 서늘한 음성으로 벨리온이 말했다. 그러나 데카르는 미소로 화답하며 가볍게 말했다.

“싫다면?”

‘제발, 제발…….’

두 사람의 숨 막히는 분위기에 델리나는 죽을 맛이었다.

펠릭과 베티는 벨리온의 명을 기다리며 전투 태세를 하고 있었다. 벨리온 또한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였고, 그는 데카르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들을 불안한 눈으로 보던 델리나가 결국 외쳤다.

“잠시, 잠시만요!”

델리나의 외침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동시에 저를 바라보는 데카르와 벨리온을 보며 델리나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저희 이러지 말고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지금 여기는 황제 폐하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인데 지금 모습이 영 좋아 보이지 않아서요.”

수많은 귀족들의 눈과 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랬기에 델리나는 간절한 눈으로 여기서 벗어나자는 듯, 신호를 보냈다.

* * *

물론 응접실이라고 대치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데카르는 델리나를 여전히 품에 안아 든 상태였고, 벨리온은 당장에라도 저 팔을 꺾고 델리나를 데려올까 싶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물론 델리나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기에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침착하자. 여기서 어그러지면 진짜 전쟁이다, 전쟁…….’

최악의 상황을 델리나가 떠올리는 사이 펠릭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 아무리 전하라 해도 하실 수 있는 것과 하실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 두셔야 합니다.”

“뭐를?”

“제국법으로 사람을 사고파는 것은 패잔국 노예 외에는 금지라서요. 아무리 약속하셨다지만, 사람은 그 경우에 포함이 안 되는 겁니다.”

펠릭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못했다.

베티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젠을 붙잡고 있었지만, 이미 그녀 또한 여차하면 당장에라도 데카르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그 팽팽한 분위기에, 덩달아 칼릭스도 날을 세우고 그를 경계하는 중이었다.

“응. 그래서 뭐?”

모두가 저를 적대시하고 있었지만 데카르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이었다.

“애초에 그건 헬리움 제국법이잖아. 나랑은 상관없다고.”

“그래도 데려가시려는 분은 헬리움 제국의 귀족 영애입니다. 이곳에 오신 이상 이곳의 법을 따르셔야…….”

“아, 몰라. 아무튼 얘는 내가 데려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젓는 데카르였다. 곧 데카르는 델리나와 눈을 맞췄다.

“너도 좋지?”

“……네?”

“듣자 하니 귀족 영애라던데, 루넨 제국에 가면 더 좋은 가문에 넣어 줄게. 아니다. 너 그냥 황녀 할래? 내 딸이라고 하면 되겠다.”

“예?”

예상치 못한 데카르의 폭탄 같은 말에 응접실의 분위기가 한 번 더 뒤바뀌었다. 벨리온의 눈이 번뜩였다.

“내 광대, 못 줘.”

급기야 터져 나온 벨리온의 하대에 델리나가 경악하는 사이, 데카르가 큭큭댔다.

“언제까지 정중하게 나오는지 한 번 보려고 했더니, 역시는 역시나네.”

“…….”

“게다가 네 광대였어? 그러면 더 흥미가 가는데.”

누구라도 하나 움직이면 깨질 듯 위태로운 분위기였다. 그때 전혀 의외의 인물이 입을 열었다.

“예, 훈훈한 분위기를 깨서 죄송한데요. 이쪽도 할 말은 있습니다.”

바로 에드윈이었다. 그러자 데카르가 옆에 앉아 있던 에드윈과 노아, 그리고 에스텔과 반센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궁금은 하네. 대공은 그렇다 치고, 공작이랑 후작은 왜 여기 있는 거야?”

“…….”

“다른 건 몰라도 디아몬 공작가는 의외인데. 돈 앞에서는 적도 아군도 없다는 게 가문의 방침 아니었던가? 설마 지금 대공가 편을 들려고 왔다든가?”

궁금하다는 듯 데카르가 싱글대며 물었다. 그러자 에드윈이 웃으며 받아쳤다.

“예, 물론 철저한 중립을 유지하긴 하지만요. 이게 돈이랑 얽히면 좀 달라져서 말입니다.”

“돈?”

“다른 건 몰라도, 가문의 채무자가 해외로 망명하는 건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데카르가 델리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몬 공작가에 돈 빌렸어?”

“……어쩌다 보니, 조금…….”

확실히 노아에게 공연의 고용 비용을 빚진 상황이었다. 델리나가 긍정하자 데카르가 시원스레 답했다.

“그래 그럼. 내가 내주면 되지. 얼만데?”

“그건 제가 아니라 아이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아, 공자가? 그래, 얼마지?”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노아에게 쏠렸다. 그러자 델리나를 한 번 본 노아가 눈매를 휘었다.

“루넨 제국 하나 가격인데요.”

‘야, 이……!’

고용 비용으로 제국 하나 값을 부른 노아의 발언에, 순간 델리나는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노아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던 데카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공작. 후계자가 공작이랑 소름 끼치게 비슷한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러면, 후작은 왜 왔어?”

이제 데카르의 시선이 에스텔에게 향했다. 에스텔도 할 말이 많다는 얼굴이었다.

“그야 델리나 영애는 저희 가문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영애니까요. 그렇지, 반센트?”

“네. 소중한 실험체죠.”

“그렇죠. 소중한 실험…… 아니, 반센트. 여기서는 친구라고 해야지!”

말도 못 맞추고 투닥이는 에스텔과 반센트였다. 그들을 델리나가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데카르가 속삭였다.

“너 이 정도면 그냥 몰래 나랑 루넨 제국으로 튈래?”

“…….”

‘나도 살짝 그러고 싶었어…….’

데카르의 말을 바로 거절할 수 없는 델리나였다. 하지만 역시 제가 할 말은 하나였다.

“그, 그래도…… 저는 여기 남아 있고 싶어요.”

“…….”

“죄송합니다.”

비로소 용기 내어 델리나가 데카르에게 제 뜻을 전했다. 그러자 펠릭이 가세했다.

“예 전하. 전하께서 광대를 원하신다면 저희 쪽에서 광대 100명이라도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응. 그건 싫어.”

물론 그를 완강히 거절한 데카르였다.

“난 얘가 제일 재미있으니까.”

“…….”

“그러니까 그냥 데려갈게.”

델리나의 의사는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데카르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러자 벨리온이 칼을 빼 들고 일어나 데카르의 목을 겨누었다.

헉!

일촉즉발의 상황에 델리나가 몸을 움찔 떨었다. 다른 이들도 위험한 분위기를 감지하고서 움직이려고 했다. 그때였다.

“잠시만요.”

응접실이 문이 열리며, 그레이스와 아슈드가 안으로 들어온 것은.

1689250781137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