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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널 절대 버리지 않는다고 (39/94)


39화 널 절대 버리지 않는다고
202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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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마차는 탄신제 전날에 대공가를 찾아왔다. 마차 앞에 가만히 서 있던 아슈드는, 델리나의 주변에 우글거리는 이들을 보고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얘는 뭐야?”

“제 공연 조수요.”

“……쟤는?”

“공연 조수 2요.”

델리나 뒤에 서 있는 젠과 칼릭스를 보며 아슈드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때 델리나의 머리 위로 원숭이가 턱 모습을 드러냈다.

“아, 얘도 공연 도와줄 아이고요.”

“끽끽!”

“……조금 제어가 안 되지만요.”

델리나 머리 위에서 난동을 피우는 원숭이를 다급히 뒤로 숨긴 델리나가 변명했다.

“그래, 조수나 원숭이나, 이해는 되는데…….”

아슈드의 시선이 뒤에 있는 베티에게 옮겨졌다. 또 델리나가 입을 열었다.

“제가 워낙에 예민해서 이제는 잠잘 때 베티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되는 지경이거든요? 그래서 꼭 데려가야 해요. 그래야 보다 더 좋은 공연을 보여 줄 수 있어요.”

벨리온은 황궁에서 자는 것에 대해 무어라 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을 많이 붙여 보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슈드도 딱히 그들을 데려가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 그저 한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하녀 신분으로 가는 거면 무기 소지는 금지야.”

“그럼요. 애초에 베티는 무기 같은 게 없는데요.”

그리고 델리나는 발견했다. 조용히 옷 속에서 각종 단검이며 무기들을 꺼내고 있는 베티를 말이다.

“……물론 아주 작은 호신 무기가 몇 개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가장 뒤에 서 있는 이들은 벨리온과 펠릭이었다. 황궁으로 가는 델리나를 배웅하듯 서 있던 벨리온이 델리나에게 다가와 짧게 인사를 건넸다.

“광대.”

“네.”

“내일 보지.”

‘안 와도 되긴 하는데…….’

여전히 제 공연을 아는 사람에게 보이기는 싫은 델리나였다. 그사이에도 벨리온의 곁에 서 있던 펠릭도 내일 보자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델리나는 어색한 미소로 두 사람에게 화답했다.

“…….”

이어 벨리온의 시선이 칼릭스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칼릭스도 벨리온을 올려다보았다.

“……”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울피림 대공가는 독심술을 쓰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별말 없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둘의 무언의 대화는 칼릭스의 답변으로 마무리되었다. 느낌상 잘 부탁한다는 내용인 듯 했다. 마지막으로 벨리온의 시선이 아슈드에게 향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사방을 황궁의 기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랬기에 벨리온은 아슈드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아슈드 또한 벨리온의 인사에 고개만 끄덕이고 마차에 올라탔다.

황궁에서 온 마차는 한 대였으나, 델리나 쪽 사람들이 많아진 탓에 두 대로 나눠 탈 수밖에 없었다. 아슈드와 단둘이 마차에 타게 된 델리나는 어색한 공기에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무려 황족이 직접 데리러 올 줄은…….’

저를 옥죄어 오는 하이르의 관심에 하지도 않던 마차 멀미가 날 정도였다. 델리나의 상태를 알아차린 아슈드가 창가 쪽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토할 거면 밖에서 해. 내 앞에서 하지 말고.”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요.”

‘확 무릎에다 모른 척해 버려?’

공연이 있는 내일까지는 그런 짓을 해도 살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델리나가 아슈드의 무릎을 노려보고 있는데 아슈드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공연은 어떻게 할 거야?”

“일단 준비는 했지만 잘될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그간 능력을 사용해 연습하고, 몸을 이리저리 굴려 보기야 했지만 결과는 장담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기술 하나 없는 제가 황궁 연회 한복판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의 명이었다. 그리고 저의 불복종으로 인해 황가와 대공가의 대립이 첨예해지게 만들 수도 없었다.

“연회 때, 전하도 보시죠?”

“어.”

“……그러면요, 혹시 전하. 제가 공연할 때, 잠깐 도움을…….”

“안 해.”

“예, 그렇겠지요.”

‘그러면 그렇지 뭐…….’

내일 제 공연을 보고 비웃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델리나는 앞에 가만히 앉아 있는 아슈드를 흘끗 쳐다봤다.

‘이 사람이 폭군이 될 만한 이유…….’

저번에 노아를 보고서 확신했다. 분명 글자가 붉어지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 이들이 제국을 망하게 하는 원인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델리나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아슈드도 글자가 붉게 떠오르는 때가 있겠지?’

아슈드는 좀 더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델리나는 아직 아무것도 뜨지 않는 아슈드의 머리 위쪽을 유심히 쳐다봤다.

“……뭐 하냐?”

물론 그런 델리나를 눈치 못 챌 아슈드가 아니었다. 유달리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델리나의 모습에 아슈드가 황당한 듯 물었다.

“죄송합니다. 전하의 외모가 빼어난 탓에 저도 모르게 눈을 뗄 수가 없어서요.”

“……그래, 나도 너한테서 눈을 못 떼긴 하긴 해.”

“정말요?”

“너같이 기이한 행동만 골라서 하는 영애는 본 적이 없거든.”

“…….”

델리나는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침묵하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마차는 서서히 황궁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 일단은 당장 다가온 문제부터 해치우자.’

공연이 내일임을 실감하며 델리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 * *

“끽!”

“안 돼! 여긴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니까?”

황궁에서 방까지 제공받고 잠을 자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지만, 자꾸만 답답한 듯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원숭이로 인해 델리나는 때아닌 밤 산책에 나섰다.

‘뭐, 잠이 안 오는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내일 있을 공연 때문에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델리나는 고요한 황궁 정원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너 여기서는 진짜 막 돌아다니면 안 돼. 전하야 네가 어디를 가든지 신경 안 쓰지만 여기는 그런 거 없단 말이야. 응?”

“끽끽!”

델리나의 말을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원숭이는 나무를 타며 놀기 바빴다. 잠시 원숭이를 보던 델리나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혹시 너, 나랑 친해지고 싶어?”

델리나는 지난번 노아의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았다. 델리나가 나무 위를 올려다보고 말을 이었다.

“네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 그……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도 들었고.”

“…….”

“만약에 네가 나를 피하는 이유가 정말 나를 싫어해서가 아니라면, 내가 약속할게. 널 절대 버리지 않는다고.”

“…….”

“그러니까 우리 앞으로 잘해 보자.”

감옥에서의 첫 만남과 똑같이, 델리나가 한 번 더 원숭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원숭이가 가만히 델리나의 손을 바라보다가 나무 위에서 폴짝 내려왔다.

“!”

비로소 델리나의 손 위로 작은 손 하나가 겹쳐졌다. 따스한 온기에 델리나가 가까이에 있는 원숭이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래. 우리 같이 잘…… 아악!”

“끽끽.”

델리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레 한 마리가 델리나의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러자 꼬리에 벌레를 달고 있던 원숭이가 킥킥대며 웃었다. 분노한 델리나가 성을 냈지만 원숭이는 델리나의 어깨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야, 야……! 올라오는 건 좋은데 벌레는 떼고 와!”

“끽끽끽.”

끝끝내 훈훈했던 화합의 장마저 장난으로 승화시키는 원숭이에, 델리나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바탕 델리나가 원숭이와 벌레로 달밤에 체조를 하는 사이, 풀숲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가 있습니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베티가 빠르게 델리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델리나 또한 알아차렸다. 수풀 너머로 있는 이는,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수풀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저쪽에서도 델리나의 기척을 느낀 듯했다. 수풀이 요란하게 움직이더니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궁 기사?’

기사의 옷에 새겨진 문양으로 델리나는 단번에 기사의 소속을 알아차렸다. 델리나를 본 기사도 놀란 듯 눈을 잠시 깜빡였다.

“……소속과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델리나의 옷차림으로 귀족 영애임을 알아차린 듯 기사가 정중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의 경계 어린 태도는 여전했다. 그때 베티가 답했다.

“오늘 황궁에 머물게 된 델리나 플로렌 아가씨입니다. 저는 아가씨를 모시고 있는 하녀고요.”

“그러십니까. 죄송하지만 정원에서 이만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지금 이곳을 쓰시는 다른 분이 계십니다.”

황궁의 기사였으니 그가 말하는 다른 이의 신분이 짐작이 갔다. 델리나가 수긍하고 돌아서려던 그때, 풀숲 너머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

그를 본 델리나의 눈이 점차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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