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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공연 조수 (38/94)


38화 공연 조수
2023.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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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였지, 그건?’

반센트와 헤어지고서 델리나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며칠 동안 고민에 빠졌다.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분명 글자는 붉게 빛나고 있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한순간이지만 보였던 흑막이라는 단어에 델리나는 한 번 더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 제가 만나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델리나는 그때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봤다.

‘부모님 이야기를 했을 때였지.’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반센트를 보고 있는데 글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졌었다. 델리나는 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분명 모두 건강히 살아 계시는 걸로 아는데.’

베논 백작가. 반센트의 원래 가문이었다. 하지만 델리나는 반센트가 부모님과의 관계가 나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작은 일도 그냥 넘기지 않기로 했다.

‘그래, 생각해 보면 다른 아이들도…….’

아이들도 태어날 때부터 흑막인 것은 아닐 터였다. 이번 반센트의 일로 델리나는 좀 더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공연도 공연이지만 자신의 목적은 아이들이 흑막이 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지 않은가.

‘노아는 분명 공작님 사촌 형의 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외에 알려진 것은 없었다. 하나 더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친아버지가 죽었다는 정도일까. 하지만 어머니의 행방은 몰랐다.

‘칼릭스는 반대로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물론 칼릭스의 가정사 또한 그리 알려진 것이 없었다. 칼릭스의 먼 친척인 벨리온이 데려다 키우고 있다는 것 정도만이 알려졌을 뿐.

‘아슈드 쪽은…….’

황태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황궁을 나가고 나서, 고모인 그레이스가 사실상 아슈드의 보호자라고 알고 있었다.

‘진짜, 막상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네.’

죽을 각오로 대공가를 찾아와 이렇게 아이들과 가까이 지내고 있음에도,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마냥 좋지만은 않은 기분에, 단검을 던지던 델리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또야, 또.”

지금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동그란 과녁 위로, 몇 개 꽂혀 있지 않은 단검과 바닥에 떨어진 무수히 많은 단검을 보며 델리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과녁에 꽂힌 것도 중심이 아니라 바깥쪽에 있었다. 며칠이고 연습했지만 실력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끽끽끽!”

“……놀리지 마라. 가뜩이나 기분 별로니까.”

델리나의 실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위쪽에서 원숭이가 키득대며 웃었다. 원숭이를 한 번 째려본 델리나가 다시 과녁을 향해 단검을 던지려던 그때였다.

“그렇게 손목이 흔들리면 이도 저도 안 되는 거지.”

언제 왔는지, 훈련장 문 근처에 서 있던 노아가 델리나에게 걸어왔다. 델리나가 단검을 쥔 채 노아를 쳐다봤다.

“손목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속도감 있게 던지는 게 중요해. 단검도 그렇게 세게 쥐면 안 되고. 가볍게 잡아야지.”

가까이 다가온 노아는 델리나에게 하나하나 조언해 주기 시작했다. 노아의 친절한 설명에 델리나가 미심쩍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이거…… 공짜 맞지? 수업료 이런 건 없지?”

하도 데인 것이 많다 보니 이제는 절로 공짜냐는 소리가 나오는 델리나였다. 그러자 노아가 눈매를 휘며 웃었다.

“응. 공짜.”

“진짜?”

“너랑 내가 지금 같은 후원을 받고 있다고 알려졌는데, 네가 단검 던지는 걸 보고 사람들이 나도 비슷한 실력이라고 오해하면 안 되잖아.”

“……그것참, 눈물 나게 고맙네.”

어차피 가면을 쓰고 공연할 예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노아의 도움을 받아 두는 것이 좋았다. 나름대로 노아가 나이프를 던지는 걸 보고 따라 한 것이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공연 때 단검을 과녁에 던지려고?”

“응. 원래 사람을 묶어 놓고 던지는데 내 실력으로 그렇게 하기는 힘들고.”

“하지만 지금도 가운데에다 못 맞추는데. 황궁 가는 거 내일 아니야?”

“……응.”

델리나가 도망이라도 갈까 싶었는지 하이르는 아예 탄신제 전날에 황궁에 오라고 했다. 델리나가 이를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정 그러면 공연 때 날 고용해도 되는데.”

“……얼만데?”

“음, 좀 비싸긴 한데. 그래도 훈련장에서 같이 뒹굴었던 정이 있으니까 특별히 두 배만 더 받을게.”

“왜 더 비싸지는 건데?”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 자연스러운 노아의 말에 델리나가 어이없다는 듯 외쳤다. 하여튼 방심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델리나와 노아가 대화하는 사이, 또 다른 누군가가 훈련장 문을 열고 들어섰다. 칼릭스였다. 그에게로 두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어, 뭐야? 오늘 훈련하는 날이야?”

“…….”

저를 보러 왔으리라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못한 델리나가 묻자,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내일 황궁 가잖아.”

“응. 그렇지……?”

“……나도 같이 가. 조수로.”

“너도?”

칼릭스가 황궁에 가겠다고 하자 놀란 델리나가 물었지만 칼릭스는 별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의지는 아닌 듯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전하가 같이 가라고 했나 본데. 광대 그냥 보내기는 불안하니까.”

칼릭스의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노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델리나가 다시 칼릭스에게 물었다.
“진짜야? 전하가 가라고 한 거야?”

“응.”

오.

생각지도 않게 공연 조수를 한 명 더 얻었다. 델리나는 앞에 서 있는 칼릭스를 어디에 써먹을까, 하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단검을 손에 쥔 노아가 고개를 까닥였다.

“그래, 그럼. 기왕 조수 하는 거, 저기 과녁에 서 봐.”

노아의 말에 저가 왜 그래야 하냐고 묻듯 칼릭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노아는 여유로웠다.

“최근에 우리 길드가 디저트 사업 쪽으로 많이 확장했는데.”

“…….”

“잘하면 대공가에 신제품을 가져올 수도 있고.”

노아의 말에 칼릭스가 대번에 과녁 쪽으로 걸어가 두 팔을 쫙 펴고 섰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델리나가 칼릭스를 조종하는 노아의 능수능란함에 혀를 내둘렀다.

“잘 봐. 이렇게.”

노아의 손에서 단검들이 날아갔다. 단검은 정확히 칼릭스와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과녁에 차례대로 박혔고, 곧 수십 개의 단검이 칼릭스의 몸을 에워쌌다.

“어때? 고용할 만하지?”

“…….”

“지금이라도 고용한다고 하면 두 배에서 특별히 절반으로 줄여 줄게.”

“……그러면 원래 가격이랑 똑같은 거잖아.”

그 말에 노아는 그저 웃고서 다시 단검을 던졌다.

델리나가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검을 던지는 노아도 노아였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칼릭스도 대단했다. 노아의 단검 던지기에 반응하듯 과녁 위로 올라온 원숭이가 끽끽대기 시작했다.

“원숭이랑은 좀 어때?”

“……보는 바와 같지.”

저는 무시하고 칼릭스 근처를 기웃대는 원숭이의 모습에 델리나가 얼굴을 우그러트렸다. 그러자 노아가 말했다.

“저 원숭이, 공연에 내보내면 딱인데.”

“……그래, 어디 사람 농락 공연 같은 걸 하면 잘하겠지.”

원숭이는 어느새 칼릭스가 던지는 공을 꼬리로 착착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델리나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저렇게 잘하면 뭐해. 날 싫어하는 게 팍팍 보이는데.”

“싫어하는 거 아닐걸. 오히려 널 더 좋아할지도 몰라.”

“뭐?”

예상치 못한 말에 델리나가 되물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서 다시 조사했었거든. 아무리 새끼 혼자 남겨졌어도, 다른 무리가 보살필 텐데 말이야.”

“…….”

“버려진 거였어. 심지어 제 가족한테도.”

“왜?”

“돌연변이로 태어났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노아가 원숭이로 시선을 보내자, 덩달아 델리나도 원숭이를 쳐다봤다. 더 정확히는, 원숭이의 등 뒤로 보이는 털색에 주목했다. 그 등으로는 군데군데 은색의 털이 보였다.

“원래 황금 원숭이는 새끼 때는 은색이다가 털갈이를 하면서 황금색으로 바뀌는데, 저건 반대야.”

“그러면 그 버려진 이유가…….”

“날 때부터 털 색이 저래서 무리에서 기피한 모양이야.”

그 말에 내심 놀라며 델리나가 물었다.

“그런데 그게 날 좋아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가장 가까이 지내던 가족한테 버려졌으니 좋아하는 인간한테는 더 못 다가갈 수 있다는 거지. 한 번 더 버림받을까 봐.”

……진짜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델리나는 칼릭스의 어깨에 붙어 있는 원숭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확실히 처음 보는 사람에게 더욱 잘 달라붙는 아이긴 했다. 델리나는 그러면서도 설마 싶었다.

“원숭이 데리고 온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야?”

“아니. 이건 대충 내가 추측한 거지. 가만 보면 저 원숭이, 매번 너한테 장난치면서도 주변을 벗어나지는 않더라고.”

“…….”

“게다가 가족한테 버림받는 건, 확실히 좀 짜증 나는 일이잖아.”

마지막 말을 내뱉는 노아의 어조는 지극히 평이했다. 하지만 노아의 얼굴을 본 델리나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델리나가 나지막이 물었다.

“괜찮아?”

“응? 뭐가.”

“……아니, 아니야.”

델리나의 물음에 노아는 그저 씩 웃으며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델리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예비 흑막>

마지막 말을 내뱉을 때, 노아의 위에 떠 있던 붉은색 글자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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