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이미 아가씨는 최고의 광대시라고요 (37/94)


37화 이미 아가씨는 최고의 광대시라고요
202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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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공연을 하셔야 된다고요?”

“응…….”

“연회장 한가운데에서?”

“응…….”

황궁에 다녀온 직후 바로 벨리온의 집무실로 향해야 했던 델리나는 황궁에서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말했다. 물론 난데없이 광대 공연을 하게 된 것에 대해서도. 델리나의 이야기를 듣던 펠릭이 황당한 듯 말했다.

“아무리 광대라는 게 이상해도 연회장 한가운데에서 공연이라뇨. 이건 단순한 거리 공연이 아닙니다. 탄신일 연회이니 더 어마어마한 규모 아닙니까.”

“맞아. 그런데 그걸 내가 해야 한대!”

“게다가 아가씨는 그런 걸 안 하셔도 이미 최고의 광대시라고요!”

“그런 칭찬은 필요 없어!”

펠릭과 델리나가 요란하게 대화하는 동안 벨리온은 계속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 펠릭이 물었다.

“아무래도 아가씨를 끌어들이면서 전하까지 탄신제에 부를 목적인 것 같긴 합니다만……. 어쩌시겠습니까?”

“…….”

잠시 가만히 있던 벨리온이 델리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광대.”

“네.”

“어쩌고 싶지?”

“…….”

델리나는 알고 있었다. 벨리온이라면, 정말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하지 말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델리나는 어떻게 해서든 황가와 대공가의 다툼을 막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딱히 어떤 공연을 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적당히 제가 할 수 있는 선 내에서 해 볼까 해요.”

“…….”

“그리고 가면도 쓰고요.”

정체를 드러낸 채 공연을 하기는 죽어도 싫었던 델리나가 곧 제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타협안을 냈다. 눈물겨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 그렇게 해.”

델리나의 말에 대번에 답한 벨리온이 펠릭을 바라보며 말했다.

“탄신제에는 나도 간다.”

“예, 그럼 그렇게 답장을 보내겠습니다.”

탄신제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은 시간을 가만히 계산하던 델리나가 곧장 몸을 돌렸다.

“저도 이만 가 볼게요. 공연 준비를 바로 시작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델리나가 바쁜 걸음으로 집무실을 떠났다. 델리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펠릭이 물었다.

“전하.”

“…….”

“은근히 아가씨 공연을 기대하시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괜히 벨리온의 최측근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었다. 펠릭은 발견했다. 탄신제에 가겠다고 말할 때, 묘하게 기대감에 젖어 있던 벨리온의 눈빛을.

“하겠다는데 봐야지.”

“예, 물론 응원하시는 거야 좋습니다만, 그 속마음은 전하께서만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도 기대하시는 걸 아가씨가 알게 되면 가뜩이나 긴장하신 아가씨가 더 긴장할 겁니다.”

물론 델리나의 공연은 벨리온만 기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충실히 벨리온을 따라 탄신제에 갈 것을 다짐한 펠릭 또한 눈을 빛내며 웃고 있었다.

* * *

“자, 젠. 내 말 잘 알아들었지?”

“응.”

“그러니까 내가 이제부터 광대 기술을 너한테 연습할 건데 뭔가 인체에 해롭거나 그런 건 아니거든?”

“응.”

“아니다. 만에 하나 인체에 해로운 게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면 바로 기술 멈출 테니까. 괜찮겠어?”

“응.”

“……너 나한테 백만 골드만 줄래?”

“응.”

알아들은 건지 아닌 건지 마냥 해맑은 젠의 모습에 델리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연에 쓸 만한 능력을 좀 확인해 보려고 젠에게 연습 상대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눈앞의 젠은 뭐든 좋다는 듯 웃고만 있었다.

“정말 할 수 있겠어? 내 공연 조수?”

“응, 응.”

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설명을 덧붙였다.

“조수 뭔지 알아.”

“뭔데?”

“델리나 도와주는 거.”

“아주 잘 배웠네.”

“나 잘했어?”

“응, 잘했어.”

델리나의 말에 칭찬해 달라는 듯 젠이 머리를 내밀었고 그를 연신 신나게 쓰다듬는 델리나였다. 그때 둘 사이를 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말만 조수지, 그냥 주인님과 꼬리치는 강아지인데.”

정원의 수풀 너머에서 나온 이는 반센트였다. 그의 말에 델리나가 반박했다.

“주인님 아니라고 했지!”

“그래, 가끔은 정원에서 산책도 시켜야지.”

델리나가 그러거나 말거나 반센트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상자를 본 델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그건?”

“총.”

“총?”

물론 총이 뭔지는 델리나도 잘 알았다. 하지만 총은 지금보다 몇 년 후에나 급속도로 퍼지는 무기였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데다가, 제대로만 맞으면 상대를 바로 사살할 수 있는 무기였기에, 전쟁 당시 가장 많이 보급된 물건이기도 했다.

‘그런데 크기가…….’

“본 적 있어?”

“전에 책에선가, 이런 게 발명됐다고 본 것 같거든. 그런데 왜 이렇게 작아?”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반센트가 가져온 총은 델리나가 알고 있던 총보다도 훨씬 작았다. 한 손으로 쥐기 딱 좋은 크기의 총을 들고 이리저리 보던 반센트가 답했다.

“최근에 개발하고 있는 거. 작으면 숨기고 있다가 쏘기 좋잖아.”

“아, 진짜?”

아직 총이 제대로 보급되기도 전인데 저렇게 작은 총을 개발하고 있다니, 새삼 반센트의 천재성을 느낀 델리나가 대단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탄을 장전한 반센트가 총을 델리나한테 넘겼다.

“한번 쏴 봐.”

“진짜?”

“너같이 약골이 쏴야 무기가 얼마나 센지 가늠할 수 있으니까.”

“……나 지금 손에 총 들었다.”

내심 위협하듯 총을 까딱이던 델리나가 곧 신기하다는 듯 총을 매만졌다. 사실 일반 총도 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토록 작은 총이라니. 델리나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 그런데 이거 어떻게 사용하는 거야?”

“저기 허수아비 있는 데로 총구 조준하고 걸고 있는 손가락을 당겨.”

“이렇게?”

그 말에 델리나가 총을 움직여 허수아비를 겨눈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소음과 함께 델리나의 몸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

탄환이 발사되며 생긴 강한 반동에 델리나는 총을 놓쳤다. 큰 소리에 놀란 젠은 펄쩍 뛰며 떨어진 총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 반센트만이 덤덤했다.

“역시 반동에 비해서 힘은 약하군. 조준점도 이상한 건가.”

총알은 허수아비가 아닌 옆에 있던 나무에 적중했다. 나무가 갈라진 것을 본 델리나는 주저앉은 채 입을 떡 벌렸다.

“……방금 이거 때문에 부서진 거야?”

“그렇지.”

‘이거, 이거 진짜…….’

꼴사납게 넘어지기는 했지만 이거라면 분명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좋을 듯했다. 델리나가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물었다.
“이거 혹시, 나 공연 때 쓰면 안 돼?”

“…….”

“이걸 또 썼다가는 나가떨어질 것 같고, 여기서 위력이랑 소리만 좀 줄이면 될 것 같은데……. 아, 역시 공연 전까지 그렇게 만들기는 힘든가?”

“충분히 가능한데.”

델리나의 말에 발끈했는지, 눈썹을 치켜올린 반센트가 총을 집어 들었다.

“뭐, 그래도 공짜로 해 주긴 어렵고.”

“……그러면?”

“대신 후작가에 한번 와.”

여차하면 임시 실험체가 될 각오까지 하고 있었던 델리나는 예상과 다른 반센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나가 자꾸 데려오라고 난리라서. 상당히 귀찮거든.”

“아, 후작님이?”

시간이 나면 한번 오라고 했던 에스텔의 말은 빈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델리나로서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래, 알았어. 한번 갈게.”

‘엘피샤 후작가라.’

명성이 자자한 것에 비해 델리나는 그 집안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알고 있는 건 반센트의 사촌 누나이자 후작인 에스텔 역시 실험과 연구를 좋아한다는 것 정도였다. 델리나는 문득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후작님도 사람 상대로 실험하고…… 그러나?”

“안 해.”

“아, 역시 그렇지?”

“공식적으로는.”

“……응?”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반센트의 중얼거림에 굳어 버린 델리나였다. 말을 끝내고 총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반센트가 다시 총알을 장전하고서 허수아비에 총구를 겨누었다.

“!”

반사적으로 귀를 막은 델리나와 젠이었다. 또 한 번의 굉음과 함께 총알이 나갔고, 순식간에 허수아비의 머리가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이야…….’

“조준점에는 문제없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신속한 반센트의 실력에 델리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작게 벌렸다. 그것으로 실험을 다 마친 듯 총을 도로 상자에 넣고서 반센트가 몸을 일으켰다.

“공연 때 나도 가니까 그 전까지 해 줄 수 있어.”

“……아냐. 총 전해 주는 거만 하고, 공연은 굳이 안 봐도 되는데.”

“단체 실험은 처음이지만 보여 주기로는 나쁘지 않지.”

반센트에게 탄신제는 제 발명품을 선보이는 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양이었다. 델리나는 익숙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 후작님이랑 같이 와?”

“그렇지.”

후작가에 사는 이상 에스텔과 같이 오는 것이 당연했다. 델리나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부모님도 함께 오시겠네?”

“…….”

“?”

가족인 에스텔이 오니 자연스레 생각나 한 질문이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델리나가 반센트를 바라보았다.

“같이 안 가.”

“……아, ……그래?”

반센트는 돌아서 있었기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이후로 반센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델리나 또한 그런 반센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델리나는 볼 수 있었다.

<예비 흑막>

반센트의 머리 위로 ‘예비 흑막’이라는 글자가 붉게 떠오르다 사라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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