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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늑대치기 소녀 (26/94)


26화 늑대치기 소녀
202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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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랑 젠을 가르쳐 줄 사람이…… 베티라고?”

델리나가 베티를 보며 재차 물었다. 그러자 펠릭이 긍정했다.

“예. 실은 베티도 귀족 집안 출신입니다.”

“진짜?”

그 말에 놀란 델리나가 베티를 바라보자 베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남작가 출신입니다.”

“…….”

“지금은 망했지만요.”

제 가문에 그리 미련은 없는 듯 베티는 집안이 망했다는 말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그래도 베티 역시 귀족가 집안에서 배운 것들이 있으니까요. 사교계 모임에서 필요한 기본 교양들을 베티가 가르쳐 줄 겁니다.”

“그래. 난 그러면 될 것 같은데……. 그럼 젠은?”

델리나의 방 안을 탐색하듯 돌아다니고 있는 젠을 보며 델리나가 물었다.

“아무래도 인간으로서의 행동에 대해서 가르칠 선생님이 필요하지만, 아가씨도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공부도 공부지만, 돌발 상황이 생겼을 때 그걸 제압할 수 있는 힘도 있어야 하죠.”

하긴…….

펠릭의 말에 델리나는 벨리온과 날뛰었던 젠을 떠올렸다. 델리나의 생각에도 일반인이 젠을 제압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여기 베티는 말입니다. 집안이 기울어져서 양치기 일을 시작했는데 그때 단 한 마리의 양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어째서?”

“양들을 잡아먹기 위해 달려드는 늑대나 들개들을 맨주먹으로 화려하게 제압했기 때문이지요. 오죽하면 양치기 소년이 아니라 늑대치기 소녀라고 불렸습니다.”

“그 치기가 그 치기가 아닌 것 같긴 한데……. 아니, 그러면 설마 젠도 맨주먹으로?”

베티의 맨주먹에 화려하게 날아갈 젠을 떠올리자 델리나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아뇨. 그렇게까지 하면서 가르치지는 않겠지만, 베티가 적어도 돌발 행동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은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젠을 가르치는 동시에 제압을 할 수 있는 교육자는 드물었다. 하지만 그것이 둘 다 가능한 이가 델리나 앞에 있었다.

“베티, 괜찮겠어? 나랑 젠 둘 다 가르쳐도?”

“전 아가씨의 하녀니 아가씨께서만 허락하시면 상관없습니다.”

“그래? 사실 그렇게 해 주면 나야 좋긴 하지만……. 그러면 너무 베티가 힘들지 않을까 해서.”

“괜찮습니다. 저도 교육을 아예 안 해 본 건 아니라서요.”

말하는 베티의 시선이 젠에게 쏠려 있었다. 젠은 여전히 네발로 뛰어다니며 델리나의 방 이곳저곳을 어지럽히는 중이었다.

“일단은 두 발로 걷는 교육부터 다시 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을 향한 베티의 시선을 느꼈는지 젠이 베티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본능적으로 베티가 자신에게 무언가 하리란 걸 알아차렸는지 이빨을 드러내며 베티를 위협했다.

“아냐. 젠! 하지 마.”

위협적으로 이를 드러내는 젠을 보고서도 베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델리나가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서려고 하는데 베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가씨, 잠시 제게 맡겨 주십시오.”

“어쩌려고?”

“짐승의 습성이 있다면 서열 정리부터 하고 교육하는 편이 편합니다.”

“하지만…… 괜찮겠어?”

아무리 예전 이력이 있다 해도, 하녀복을 입은 베티는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맨주먹 상태였다. 젠의 대련을 봤던 델리나는 그런 베티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펠릭은 태연했다.

“베티, 살살해. 여기 아가씨 방이니까.”

“걱정 마십시오.”

천천히 손을 푸는 베티의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뚜두둑 소리가 들려왔다. 베티의 손등 위로 힘줄이 솟자 델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도 걱정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금방 끝날 겁니다.”

“…….”

“이야, 드디어 소문으로만 듣던 늑대치기 소녀 베티의 기술을 보겠네요. 저걸로 온 동네 늑대들이 베티만 지나가면 고개를 숙였다던데.”

펠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부가 났다. 소파에는 베티의 기술을 받고 기절한 젠이 누워 있었다. 베티의 빠른 움직임을 눈으로 간신히 좇은 델리나가 입을 쩍 벌렸다. 베티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툭툭 털고는 델리나에게 다가왔다.

“아가씨께는 사교 모임에 필요한 교양 수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사교 모임에 오는 귀족 가문 여인들의 이름과 얼굴을 알아 두는 것도 하면 좋을 테고요.”

“……네. 그럴까요?”

“왜 갑자기 말씀을 높이십니까, 아가씨?”

“아, 그렇지……. 응.”

순식간에 기절한 젠을 보고서 델리나가 저도 모르게 베티에게 존댓말을 쓰자, 그를 보고 있던 펠릭이 입꼬리를 올리며 즐겁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벨리온의 집무실은 언제나 그렇듯 고요했다. 이따금 적막을 깨고 펜을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전하.”

물론 집무실의 문을 열고 펠릭이 들어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집무실에 들어서는 펠릭을 보면서도 벨리온은 여전히 서류를 들고 있었다.

“보고해도 되겠습니까?”

자신의 주인이 이토록 관심을 가지는 서류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펠릭은 본인의 일을 하겠다는 듯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물었다.

“해.”

“예. 아가씨는 로즈립 후작가의 사교 모임에 간다고 하셨고, 해서 베티에게 교육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두 분 다요.”

두 발로 걷고 말을 하는 젠이나, 유독 집중력을 불태우며 공부하는 델리나를 떠올리며 펠릭이 말했다. 베티 효과 때문인지, 수업의 열기를 생각하던 펠릭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그런데 벨리온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황실에서 존재를 알아 버렸다.”

그 존재가 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펠릭의 눈빛 또한 진중해졌다.

“역시 그런 소문이 나면 황실의 감시를 피할 수 없겠죠.”

물론 세간에는 벨리온이 사적인 용무로 백작가를 방문했던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이르가 플로렌 백작가에 간 벨리온의 행동을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겠지. 플로렌 백작 가문의 영애가 현재 울피림 대공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자 집무실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펠릭이 물었다.

“아가씨는 알고 계십니까? 황실에서 손을 뻗어 올 수도 있다고?”

“그래.”

알고 있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달랐다. 그 사실을 펠릭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그것을 알았을 때 델리나의 반응도 내심 걱정되었다.

“그림자를 붙여야겠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펠릭이 곧바로 답했다. 이후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다른 내용으로 흘러갔다.

“참. 이번에 아가씨께서 로즈립 후작가에 방문하실 때, 동물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하네요.”

“동물?”

“예. 동물이요. 동물. 인간의 언어로 말을 못 하고 글자 같은 걸 못 쓰는, 그런 동물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뭘 그런 당연한 걸 설명하냐는 듯 벨리온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그럼 광대한테 어울리는 걸로 해야지.”

또 어김없이 나온 벨리온의 광대 소리에 펠릭이 싱글싱글 웃었다.

“오랫동안 전하를 모셔 왔지만, 전하께서 이토록 광대를 좋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대공가에 광대 공연단 같은 거라도 만들었을 텐데요.”

울피림 대공가에 광대 공연단이라니. 남들이 들으면 경악할 소리였지만 벨리온은 펠릭의 말에 무언가를 고심하다가 중얼거렸다.

“공연 같은 게 좋은 게 아니라…….”

곧 벨리온의 입술이 도로 다물어졌다. 펠릭은 벨리온의 침묵에 익숙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뭐가 되었든 저는 좋습니다.”

“…….”

“아가씨 덕분에 요즈음 제가 사직서를 열 번 쓸 거 다섯 번만 쓸 정도니까요.”

델리나는 다른 영애들과 다른 면이 좀 많았다. 니엘과 샬롯이 사교 모임에 많이 데려가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행동이나 말투는 그리 정숙하지는 못했고 감정에 따라 표정이 이리저리 바뀌었다.

행동하는 것에도 거침이 없었다. 그래서 펠릭은 델리나가 좋았다. 그녀의 예측할 수 없는 말과 행동들이 펠릭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니까.

“참, 그리고 아가씨 앞으로 오는 편지 말입니다. 물론 아가씨께 가져다드리겠지만, 전하께서도 알아 두셔야 할 편지에 대해서는 따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뭐가 있는데.”

“왜, 그래도 없진 않을 거란 말입니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황궁에서 온 편지라거나, 아니면…… 약혼장 같은 것도 그럴 수 있겠네요.”

약혼장이라는 말에 벨리온의 눈썹이 올라갔다. 반면에 펠릭은 태연했다.

“원래 데뷔탕트를 치르고 나면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도 엄연한 귀족 영애신걸요.”

“광대는 열두 살인데.”

“그러니까 결혼이 아니라 약혼입니다. 약혼. 결혼을 약속하는 일이요.”

“…….”

“가령 이번 사교 모임 때 어떤 영애랑 친해져서 저택에 놀러 갔다가 그 남자 형제들을 만나서 눈이 맞고 이래저래…… 뭐, 그런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그겁니다.”

어디까지나 예시일 뿐이었지만 꽤나 구체적인 설명에 펜을 잡고 있던 벨리온의 손이 점차 느려졌다. 어딘가 불편한 듯, 눈썹을 슬며시 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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