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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대공과 다섯 명의 아이들 (24/94)


24화 대공과 다섯 명의 아이들
202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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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젠의 주인님이라는 한마디에 복도가 적막으로 물들었다. 델리나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입을 달싹이다가 빠르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벨리온을 보며 부정했다.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이제는 다른 아이들과 펠릭의 시선도 델리나에게 쏠렸다. 델리나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애초에 얘한테 주인님이라는 말을……. 아, 예전에 한번 말해 준 적이 있기는 한데, 아무튼 그게 아니라……. 내가 가르친 건 내 이름이라고.”

“아가씨.”

“응?”

“걱정 마세요. 다른 데서는 말 안 할게요.”

안심하라는 듯 펠릭이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델리나가 울 듯한 얼굴로 젠에게 말했다.

“젠. 내 이름 그거 아니잖아. 응? 분명히 내가 가르쳐 준 이름 있잖아.”

억울함을 풀기 위해 델리나는 필사적이었다. 급기야 젠에게 얼굴을 바짝 붙인 델리나가 거의 유도 심문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델자로 시작하는 거였는데. 응?”

“델리나.”

“그래, 맞아. 바로 그거!”

“주인님.”

아주 쐐기를 박듯 한층 더 정확해진 발음으로 젠이 말했다. 그러자 반센트가 중얼거렸다.

“제대로 학습시켰나 본데.”

반센트의 말에 델리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노아가 큭큭대며 웃었다.

“높이뛰기는 잘 봤고, 앉아랑 엎드려는 언제 보여 줘?”

“……그런 거 없어.”

도대체 왜 능력은 하루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것일까. 또 터진 저 입들을 이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플 뿐이었다.

상황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벨리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뭘 그렇게 흐뭇한 얼굴을 하시나요…….

이제는 저 무심한 얼굴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델리나였다. 물론 그러면서도 몸은 착실히 벨리온에게 달라붙어 있는 상태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눈에 불을 켜고 저를 바라보는 아슈드가 있었기에.

“젠이 시험 보는 거, 저도 따라가도 되나요?”

혹시라도 벨리온이 여기다 저를 살포시 두고 갈까 싶어 델리나가 벨리온의 팔을 붙들며 물었다.

“상관없다.”

“그럼 저도 갈래요.”

그러자 칼릭스가 물었다.

“저희도 갑니까?”

“그래. 대련도 하고.”

대련이라는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델리나도 눈을 크게 뜨고 깜빡였다.

‘나도 하나?’

물론 벨리온이 손가락만 튕겨도 날아갈 수준이긴 했지만, 혹시나 싶어 델리나는 벨리온의 품 안에서 몸 이곳저곳을 꾸물대며 풀기 시작했다.

* * *

“일단 시험 먼저 보고, 대련은 그 후에.”

대공가의 실내 훈련장은 일반 귀족가의 몇 배나 큰 규모를 자랑했다. 델리나가 넓은 규모에 놀라며 훈련장을 구경하는 사이 아이들은 저마다 각자의 자리로 가고 있었다. 그때 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는요?”

그 말에 잠시 침묵하던 벨리온이 무언가를 하나 가져와 델리나 앞에 내려놓았다. 거대한 오뚝이 인형이었다.

“이거 쳐.”

“?”

한눈에 봐도 푹신해 보이는, 눈앞에 버젓이 선 거대한 오뚝이 인형을 델리나가 이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벨리온은 젠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

다른 아이들은 각종 무기를 들고 있는 와중에, 제 앞에 인형이 놓이자 상당한 자괴감이 든 델리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쪽에 끼었다가는 팔다리 하나쯤은 내어 줄 각오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델리나는 결국 오뚝이 인형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는 그냥 쉽게…… 아악!’

오뚝이 인형은 델리나의 주먹을 맞고 반대편으로 기울어졌다가 반동으로 퉁 올라왔다.

순식간에 인형과 몸통 박치기를 한 델리나는 그대로 뒤로 데굴데굴 구르다가 바닥에 엎어졌다. 순간 훈련장 안이 침묵에 휩싸였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델리나가 수치스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 아가씨. 주무시는 거예요?”

그런 델리나에게 펠릭이 다가왔다. 때마침 훈련장 문을 열고 들어오던 펠릭은 누워 있는 델리나와 그 옆에 있는 오뚝이 인형을 쳐다봤다.

“세상에. 거대 오뚝이 인형 진짜 오랜만에 보네요. 저도 다섯 살 땐가 여섯 살 때 가지고 놀았던 건데.”

“…….”

“그런데 이게 왜 여기 있죠?”

“……그러게. 이게 왜 여기 있을까.”

시치미를 뚝 떼고 자리에서 일어난 델리나가 슬며시 오뚝이 인형을 외면했다. 그러는 사이, 훈련장 저쪽 편이 소란스러워졌다.

“아, 시험 시작했군요.”

소리가 꽤 요란했지만 익숙한 일인 듯 펠릭이 벨리온과 젠의 대련을 바라보았다. 델리나도 이에 주목하다 작게 감탄했다.

‘무슨 몸놀림들이…….’

벨리온이야 굉장하리라 예상했지만 젠은 정말 의외였다. 그간 감옥에 갇혀 있던 답답함을 발산하기라도 하듯 젠은 빠르게 날아들어 벨리온을 공격했다.

꽤 흥분한 듯 이빨까지 드러낸 젠이 사납게 벨리온에게 달려들었지만 벨리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젠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고는 점점 더 사나워지는 젠을 본 벨리온이 그의 목덜미를 쳐 기절시켰다.

“아직도 짐승 같은 게 있군.”

젠을 내려다보며 벨리온이 중얼거렸다. 곧 그가 펠릭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데려가.”

“아, 그렇다면…….”

“합격이다.”

펠릭이 쓰러진 젠에게 다가갔다. 델리나도 걱정스러운 듯 눈을 감고 있던 젠에게 다가갔다.

“젠은 어때?”

“전하께서 아주 깔끔하게 기절시키셔서 별다른 외상은 없습니다.”

펠릭이 젠을 제대로 눕히며 감탄했다.

“전하께서 데려오셨을 때는 설마 싶었지만 역시 대단하긴 하네요. 이렇게 마른 체격으로 그런 움직임이 가능하다니.”

“그러니까, 대단해.”

회복 중이긴 했지만 여전히 젠의 몸은 델리나보다도 작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신체 능력만큼은, 델리나를 넘어 또래 아이들보다도 월등했다. 젠의 미래를 아는 델리나가 펠릭의 말에 바로 수긍했다.

“근데 담요는 왜 이리 많이 가져와?”

“또 쓰러지는 사람이 있으면 눕혀야 하니까요. 대비용이죠.”

펠릭이 담요를 내려놓기 무섭게 다시 대련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네 명의 아이들과 벨리온의 대련이었다. 담요를 펴고 있던 펠릭이 씩 웃었다.

“어차피 아가씨도 얼굴 다 아시게 되었는데 궁금하시지는 않으세요? 왜 이분들이 전하의 후원을 받는지?”

“응. 궁금해. 이유가 뭔데?”

단순히 그들이 벨리온 밑에서 후원을 받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구체적인 이유는 몰랐기에 델리나는 곧바로 답했다.

“일단 반센트 님 경우는요. 만드시는 장치를 전하께 실험해 보고 싶어서라고 하시더라고요.”

……누가 실험에 미친 애 아니랄까 봐, 하다 하다 여기까지…….

아니나 다를까 각종 장치를 손에 쥐고서 벨리온에게 쏘아 대는 반센트가 보였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에 델리나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노아 님 같은 경우는 전하의 후원을 받으면 대공가를 마음껏 탐방할 수 있어서라고 했고요.”

충분히 이해가 갔다. 제국에서 가장 베일에 싸여 있는 울피림 대공가니까. 그 누구보다 정보와 돈에 진심인 노아라면 관심을 가질 만한 곳이었다. 이제 델리나의 눈에 벨리온을 향해 나이프를 던지고 있는 노아가 들어왔다.

……나이프에도 진심인가.

“칼릭스 님은 아무래도 대공가에서 사시는 분이시기도 하고 훈련하는 걸 좋아하시기도 하셔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경우예요. 아, 그리고 운동을 하면 더 많이 먹을 수 있다고도 하시던데요.”

디저트다, 더 많이 먹는 건 분명 디저트일 거야.

대련 한 번에 케이크 한 조각. 그런 느낌인 듯했다. 검으로 벨리온을 내리치는 칼릭스를 보며 델리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황태손 전하는 제국 내에서 가장 강한 이의 훈련을 받고 싶어서라고 했고요.”

제일 사정이 복잡한 이는 단연 아슈드였다. 모든 면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훈련 또한 가장 강한 자에게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모양이었다.

‘근데 다들 목적들이 영 순수한 것 같진 않은데.’

뭔가 하하 호호 웃으며 후원을 받는 건 아닐 거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검은 속내들에 델리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쯤 되니 왜 자기가 후원을 받으려고 하는지 벨리온이 딱히 궁금해하지 않는 것도 이해됐다.

“근데 왜 전하는 이렇게까지 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거야?”

“아, 그건 저도 한번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요.”

“응.”

“심심해서라고 하시더라고요.”

“음. 그렇구나.”

울피림 대공이 아이들을 후원하는 목적이 심심해서라니, 만약 벨리온을 보지 않았다면 델리나도 절대 믿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의 델리나는 납득하고도 남았다.

“앗! 끝났나 보네요.”

펠릭의 말대로 대련은 끝이 났다. 벨리온 주변으로 아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펠릭은 쓰러진 아이들을 옮기 시작했고 델리나는 옮겨지는 아이들을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벨리온이 엄청나게 강했다 뿐이지 아이들의 실력 또한 발군이었다. 과연 벨리온의 밑에서 훈련을 받을 만 했다.

‘제국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저런 애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 말이지…….’

한 명 제어하기도 벅찬데 무려 다섯 명이었다. 게다가 가지고 있는 능력도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최소한 이 키워드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만 알아도 좋을 텐데…….’

로맨스 소설 한번 안 읽어 본 델리나가 키워드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리기는 어려웠다. 이에 가만히 고민하던 와중, 어느새 델리나의 앞으로 걸어온 벨리온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편지가 왔던데.”

“……저한테요?”

예상치 못한 편지 이야기에 델리나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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