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대공가의 남다른 훈련법
(18/94)
18화 대공가의 남다른 훈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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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대공가의 남다른 훈련법
2023.06.18.
델리나와 아슈드의 춤을 보고 있던 것은 영식 영애들만이 아니었다. 위쪽에서 이들의 춤을 보고 있던 벨리온과 펠릭은 잠시 침묵했다.
“큽…….”
물론 침묵을 유지하는 건 벨리온뿐이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애써 웃음을 참아 내려는 듯, 고개를 내리고 어깨를 연신 들썩이던 펠릭이 눈물을 닦으며 벨리온을 바라보았다. 벨리온은 별말이 없었지만, 시선은 저 멀리 달려가는 델리나를 좇고 있었다.
“전하.”
“…….”
“제가 그렇게 크게 전하를 부러워해 본 적이 없는데, 이건, 정말…….”
난데없이 침실의 비밀 통로를 이용한 것도 모자라 자신을 후원해 달라 청한 당돌한 소녀도 소녀였지만, 이런 상황에서 웃지 않는 제 주인도 주인이었다.
눈앞의 델리나의 상황과 벨리온의 얼굴은 참으로 대조되었지만, 그럼에도 펠릭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저도 조만간 아이들 모아서 후원이나 할까 싶습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긴. 후원한다 해도 아가씨만 한 분을 보기는 힘들겠지요.”
진짜 당분간은 계속 보좌관 해야지.
최근 들어 지독하게 바빠진 업무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제 주인의 일을 수습하기도 벅찬 상황에서, 진지하게 은퇴를 여러 번 고민하던 펠릭에게 델리나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가 대공가에서 지낸 지난 몇십 년의 나날보다, 델리나가 들어오고 난 다음인 지금이 더더욱 재미있기에.
펠릭의 말에도 벨리온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그랬기에 펠릭은 더더욱 벨리온의 속마음이 궁금해졌다. 아무리 후원을 명목으로 데리고 있다 하더라도 델리나는 다른 아이들과 결이 달랐기에.
“여기 있었나, 대공.”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그들 곁으로 하이르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군.”
갑자기 등장한 하이르를 향해 서서히 고개를 돌린 벨리온이 잠시 그를 마주하다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모습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긴장 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데뷔탕트에서 함께 있던 영식은 잘 봤지. 이름이 칼릭스라 했던가.”
“…….”
“자네가 이렇게 데리고 온 걸 보면 대공가의 후계자로 키울 생각이고?”
칼릭스는 벨리온의 먼 친척뻘이었기에 가문의 후계자가 되기에는 위치가 조금 애매했다. 하이르는 대공가의 변화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벨리온을 주시했다.
“그 아이가 원한다면 그리할 겁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결혼 생각이 없는 건가?”
“…….”
“원한다면 내가 좋은 영애들을 알아봐 줄 수도 있는데.”
하이르가 추천할 영애들이야 뻔했다. 친황제파거나, 혹은 황족이거나. 어떻게 해서든 벨리온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선점하려고 하는 그였기에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벨리온의 답도 뻔했다.
“아직은 생각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울피림 대공가의 대공이 결혼을 안 한다는 건 퍽 좋은 일은 아닌 듯해서 말이지.”
“…….”
“아니면, 그대가 후원하고 있다는 아이들한테 더 정을 쏟으려고 그러는 건가?”
벨리온이 후원하는 아이들.
사실 귀족들도 모르지 않았다. 벨리온이 재능 있는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중 몇몇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것까지 말이다.
벨리온이 재능 있는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다는 것도 무척 신경에 거슬리는데, 아이들의 신원이 전부 파악되지 않는 것도 너무나 거슬렸다. 현재 제대로 파악이 되고 있는 이들은 칼릭스와 반센트 말고는 없었기에.
“나도 좀 궁금해서 말이야. 대공이 후원하고 있다는, 그 재능 넘치는 아이들이.”
“…….”
“재밌지 않나. 분명 소문은 이것저것 들려오는데, 보이는 아이들이 없으니. 평민 아이들이면 굳이 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혹시…….”
하이르의 눈이 번뜩였다.
“오늘 이곳에 온 영식이나 영애들 중에 있는 걸까?”
* * *
‘봤나? 못 봤나?’
춤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분명 기드온이 근처에 오기 전에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기드온이 제 얼굴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왔다는 건, 설마…….’
과거에 데뷔탕트는커녕 타 귀족들과의 만남도 자제시켰던 니엘과 샬롯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기드온을 데려왔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웠던 건 조금 전에 본 기드온의 태도였다. 기드온은 분명 춤도 추지 않고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가 찾는 이는 뻔했다.
‘황궁에는 다양한 귀족들이 오니까, 분명 내가 있을까 찾으러 온 거야.’
편지를 통해 납치가 아니라는 건 알아차렸지만,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기에 혹시나 싶은 마음에 황궁에 온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델리나의 입장에서 하필이면 그것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고.
‘일단 연회장에 더 있기는 힘들 것 같고…….’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기드온은 위험했다. 기드온은 분명 자신을 알아볼 것이었다. 그래서 델리나는 다시 가발을 고쳐 썼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근처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기드온이었다.
“……!”
기드온과 눈이 마주친 델리나가 다급히 기둥 뒤로 몸을 숨겼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급하게 뒤따라온 듯 숨을 거칠게 내쉬던 기드온이 델리나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델리나?”
“…….”
“델리나 맞지?”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고서 체념한 델리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바로 보이는 델리나의 모습에 기드온이 경악한 얼굴로 말했다.
“너……!”
“……어떻게 알았어? 나인 거.”
“처음에 얼굴만 보고는 긴가민가했는데, 너 그건 몰랐지? 도망칠 때 꼭 정원 있는 방향으로 가는 거.”
기드온의 말대로 근처에 정원이 있었다. 델리나의 버릇을 의기양양한 얼굴로 이야기하던 기드온이 곧 정신을 차리고서 델리나에게 바짝 다가왔다.
“너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그 편지는 뭔데? 또 왜 그런 차림이고?”
“…….”
“가발은 또 뭐야?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건데?”
그간 쌓인 것이 많은 듯 기드온의 질문이 한바탕 쏟아졌다. 잠시 가만히 듣고 있던 델리나가 답했다.
“일단 그렇게 별말 없이 떠나서 미안해. 하지만 거기에 오빠까지 데려갈 수는 없었어. 너무 위험했으니까.”
“거기? 거기는 또 어디야? 왜 위험한데?”
“울피림 대공가.”
“뭐?”
그 이름에 기드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울피림 대공가? 내가 아는 거기?”
“맞아. 오빠가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떤 곳.”
“야, 그건 어렸을 때 일이고……! 아니, 아니, 아무튼. 네가 거기를 갔다고? 그 울피림 대공가에?”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기드온이 델리나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응. 그리고 거기서 후원받고 있어.”
“후원? 네가?”
후원이라는 말에 더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기드온이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거기는 많이 먹기도 재능으로 쳐주냐?”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네가 무슨 수로? 미치지 않고서야 대공이 왜 너를 후원해?”
“그러니까, 광…….”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델리나가 우물대자 기드온의 눈썹이 올라갔다.
“광, 뭐?”
“……사실 맞아. 많이 먹기 재능.”
제 친오빠한테 곧 죽어도 광대로 들어갔다는 말은 할 수 없는 델리나였다. 물론 그 말에 기드온도 그리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래, 그게 아니고서야 그럴 수가 없지. 내가 너 새벽부터 부엌 들락거릴 때부터 알아보긴 했어. 근데 확실히 대공가라 다르긴 한가 보네. 뭘 얼마나 착실히 먹었으면 파트너가 널 못 드냐.”
“그건……! 암튼 내가 무거워서가 아니야!”
졸지에 대공가에서 먹기 훈련까지 한 셈이 되었지만 차마 더 말하지 못하고 델리나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난 지금 대공가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내 차림 보면 알겠지만 다들 잘해 주고 있어. 과분할 정도로.”
“뭐? 너 설마 이러고 다시 대공가로 가는 거야? 작은아빠나 작은엄마도 안 보고?”
“응. 안 봐. 그리고 이건 오빠만 알고 있어. 내가 대공가에서 후원받는 거나, 나 봤다는 말도 하지 말고.”
“그래도 얼굴은 봐야지. 두 분이 널 얼마나 걱정하면서 찾는 줄 알아?”
니엘과 샬롯이 눈에 불을 켜며 찾는 이유야 쉽게 짐작이 갔다.
아직은 어린 기드온과 델리나를 돌보겠다는 명목으로 백작가에 머물고 있는 것이었는데, 델리나가 사라지니. 그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워했을지 상상이 갔다. 기드온의 말에도 델리나는 단호했다.
“응. 안 보고 갈 거고. 말하지도 마.”
“……도대체 왜?”
물론 기드온은 그런 델리나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결국 델리나가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사실 좀 어이없는 소리일 건 잘 아는데, 오빠. 그 두 사람 있잖아…….”
“난 이미 두 분한테 너 있는 것까지 말하고 왔는데?”
“뭐?”
“저기 분홍 드레스 입은 애가 너 같다고, 그러고 나 먼저 뛰어온 거야.”
“내가, 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을 했다고?”
니엘과 샬롯이 제 존재를 자각했을 거라는 사실에, 델리나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델리나!”
저 멀리서 니엘과 샬롯이 다가오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