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출장 광대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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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출장 광대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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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출장 광대 쇼?
2023.06.15.
대망의 데뷔탕트 날이 밝았다. 고요하던 대공가도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용인들은 조금씩, 그러나 빠르게 데뷔탕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델리나의 방 안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델리나는 베티가 입혀 준 드레스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이게 그때 그 드레스야?”
“네.”
지난번 드레스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가 입은 드레스는 아름다웠다. 드레스의 놀라운 변화에 델리나가 진심으로 베티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 베티!”
“아닙니다. 시간이 아주 충분하지는 않아서 안에 있는 보석들까지는 다 못 떼어 냈습니다. 다소 무겁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재앙의 드레스는 겉뿐만 아니라 속도 재앙이었던 모양이다. 그제야 델리나는 드레스가 조금은 무겁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도 델리나는 마냥 좋은 듯 방긋 웃었다.
“아가씨! 이제 출발할 겁니다. 준비는 다 하셨나요?”
그러는 사이 펠릭이 델리나의 방을 찾아왔다. 드레스를 입은 델리나의 모습에 펠릭이 작게 손뼉 쳤다.
“세상에! 정말 완벽 그 자체에요 아가씨.”
“고마워. 펠릭도 수고 많았어.”
“제가 디자인하긴 했지만 정말 완벽하네요. 거기에 가발까지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가발은 드레스랑 같이 분홍색으로 준비해 봤어요.”
혹 니엘이나 샬롯이 델리나를 알아볼 것을 대비해 준비한 가발이었다. 가발을 쓴 델리나가 어색한 듯 그것을 몇 번 매만지다가 이내 말했다.
“다녀올게, 베티!”
“잘 다녀오십시오.”
베티의 정중한 인사를 받고서 델리나가 아래로 내려가자 그곳에는 벨리온과 칼릭스가 나란히 서 있었다. 칼릭스 또한 멀쩡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끔찍했던 전 디자인을 떠올리는 듯,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
“광대.”
“…….”
외출복 차림을 한 벨리온은 눈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델리나는 가면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벨리온도 드레스와 가발을 쓴 델리나를 내려다보았다. 펠릭이 그런 둘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어떠십니까, 오늘 아가씨 의상? 귀엽지 않습니까?”
“분홍색이 많은데.”
참 벨리온답다면 벨리온다운 대답이었다. 딱히 델리나도 칭찬을 기대하지는 않았다는 얼굴이었다.
“가자.”
벨리온의 한마디에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과 칼릭스도 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무척 큰 마차 두 대가 떡하니 서 있었다.
‘이야…….’
보통 귀족 마차에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마차를 델리나는 신기한 듯 올려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자연스레 벨리온은 앞의 마차에, 칼릭스는 뒤의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흩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델리나가 두 대의 마차를 번갈아 보았다. 그런 델리나를 부른 것은 벨리온이었다.
“왜 안 타.”
“……제가 전하랑 같이 타나요?”
“광대니까.”
……출장 광대 쇼?
왜인지 마차 안에서 그를 웃겨야 할 것 같은 막중한 부담감을 짊어지고서, 델리나도 마차 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마차 문이 닫히며, 펠릭이 창문 쪽으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아가씨는 대공 전하 마차를 타고 가시다가 수도부터 다른 마차를 타고 이동하실 겁니다.”
“……응.”
플로렌 백작가보다 늦게 가야 했기에 나중에 따로 이동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부터라도 따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델리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곧 마차가 덜컹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벨리온과 단둘이 남은 델리나는 어색한 듯 손을 꼼지락대다가 벨리온의 얼굴을 덮은 가면을 쳐다봤다.
“가면 가지고 싶나?”
“아뇨, 아뇨. 정말 괜찮아요.”
혹시 또 재앙의 가면 같은 것을 줄까 봐 델리나는 빠르게 거절했다. 하지만 벨리온의 가면이 조금 신기하기는 했다. 물론 델리나는 벨리온이 눈을 가리는 가면을 쓰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눈에 심각한 상처가 있어서, 눈을 보이는 것에 극도로 트라우마가 있어서, 눈만 마주쳐도 상대가 죽을 수 있어서 그걸 감추고 다니려고, 등등.
벨리온이 눈을 가리는 이유에 대한 소문은 다양했다. 하지만 펠릭은 무슨 점심 식사 메뉴를 말하듯 지극히도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아, 그거요? 사람들 시선이 귀찮으시대요.]
정말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제법 조심스레 질문했던 자신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진짜?]
[네. 눈 색이 다르니까 너무 쳐다본다고, 그래서 그냥 밖에서는 가리고 다녀요.]
벨리온을 몰랐다면 당연히 믿지 않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벨리온을 알고 있는 델리나는 그 말에 납득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 사람이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그냥 놔두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언젠가 숨 쉬는 것도 귀찮다고 하지 않을까.
가면에 가려졌는데도 벨리온의 무기력한 표정이 보이는 듯해 델리나는 퍽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그 순간, 멀리서 희미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
그 소리에 델리나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서 흙먼지 구름이 피어오르며, 늑대 무리가 등장했다.
‘늑대?’
물론 델리나가 늑대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또 이렇게 늑대를 마주하게 되자 절로 긴장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델리나를 보던 벨리온이 입을 열었다.
“분명 너도 본 적이 있지.”
“네. 처음에 여기 왔을 때요. 가지고 있던 기름 덕에 살았었죠.”
“…….”
“그때는 진짜 죽을 뻔했는데.”
늑대들은 마차를 공격하려는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호위하듯, 마차 주변을 에워싸며 달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익숙하다는 반응이었다.
우와.
물론 그러한 광경을 처음 보는 델리나는 저도 모르게 창문으로 목을 빼고서 그 진풍경을 감상했다. 그런데 창문으로 불쑥 목을 뺀 이가 또 있었다. 벨리온이었다.
“멈춰.”
벨리온의 한마디에 마차가 순식간에 멈춰 섰다. 그러자 자연스레 늑대들도 멈춰 섰고, 그중 가장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벨리온을 향해 다가왔다.
으악.
늑대가 다가오자 델리나가 마차 안으로 몸을 넣으려 했지만, 뒤에 있는 벨리온 탓에 그럴 수 없었다. 벨리온은 늑대 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손 내밀어 봐.”
“네?”
출장 광대가 아니라 알고 보니 출장 도시락인 모양이었다. 앞은 거대한 늑대요, 뒤는 벨리온인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델리나의 귀로, 펠릭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가씨가 오해합니다.”
“…….”
“아가씨. 안 잡아먹을 테니까 손 한번 내밀어 보세요.”
펠릭의 말에 눈을 질끈 감은 델리나가 늑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늑대의 더운 콧김이 느껴졌다. 델리나의 손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늑대는 계속 델리나의 손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았다.
“대장 늑대에게 아가씨의 냄새를 각인시키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더 이상 늑대들이 아가씨를 공격하지 않거든요.”
“그렇구나……. 그것참 좋네…….”
공격이고 뭐고, 이런 식이면 심장 마비로 죽지 않을까 싶었다. 이윽고 손을 뺀 델리나는 슬며시 제 손가락의 유무를 확인하고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황궁으로 마차가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처럼의 거대한 연회에 사용인들은 바삐 몸을 움직였고, 귀족들도 저마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바라보는 한 쌍의 푸른 눈동자가 있었다. 바로 황제, 하이르였다.
“슬슬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 곧 연회가 시작할 시간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제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하이르는 여전히 저 멀리서 다가오는 마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피림 대공가는 왔는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직도?”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하이르의 눈이 불쾌한 듯 일그러졌다. 그의 눈치를 보던 시종장이 급히 고개를 숙이고서 방 안을 빠져나갔다.
“울피림 대공가는 타 귀족들보다 영지가 더 먼 곳에 있으니 늦을 수도 있죠. 게다가 아직은 시간이 있고요.”
옆에 있던 그레이스 황녀가 말했다.
“몰라서 하는 소리. 내 앞에서도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놈이 또 무슨 꿍꿍이일 줄 알고,”
그레이스의 말에도 하이르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대공이 무언가를 할 수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오늘은 아슈드의 데뷔탕트이기도 하니 오늘만큼은 조금 여유를 가지시는 게…….”
“데뷔탕트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어차피 때 되면 다 하는 것을.”
여전히 날 선 하이르의 답에 아슈드가 긴장한 듯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런 아슈드를 보고서 마뜩잖다는 듯 혀를 찬 하이르가 아슈드 앞을 지나쳤다.
“하여간에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으니.”
하이르의 중얼거림을 들은 아슈드가 어깨를 작게 떨었다. 그러나 그 또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하이르의 말이 이어졌다.
“네놈도 명심해. 그 음흉한 놈들하고는 가까이 지내지도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아슈드는 하이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이르는 곧 사라졌지만,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아슈드의 얼굴에는, 우울한 그늘이 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