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11/94)
11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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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2023.06.11.
모든 아이들이 한꺼번에 저택에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개 한 명씩 저택을 찾았다.
매번 다 함께 오는 줄 알았던 델리나에게 그 이야기를 해 준 것은, 베티였다. 지난번 시험 때가 드문 경우였다고. 대부분은 한 명씩 오거나 했기에 같은 저택에 있어도 만나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극히 드문 경우에 걸려 네 사람 앞에서 시험을 쳤고?’
물론 한 명씩이랑 싸운다고 승산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상황은 확실히 아찔했다.
그날을 떠올리면서, 델리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반센트가 또 지난번처럼 장치로 장난을 쳤을까 봐.
“아가씨!”
하지만 복도로 나타난 이는 펠릭이었다. 펠릭이 델리나를 보자마자 반갑다는 듯 다가왔다.
“이제는 베티 없이도 잘 다니시네요?”
“응.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어쩌다 보니 복습도 좀 했고.”
“그래 보여요. 이 정도면 이제 바깥에서도 잘 다니시겠어요!”
“아니. 아직 바깥은 좀…… 일러.”
지난번에도 정원 공중 쇼를 선보였던 터라 아직까지는 밖에 나가려면 베티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 장면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던 펠릭이 큭큭대며 웃었다. 이내 웃음을 멈춘 펠릭이 말했다.
“참, 아가씨. 아가씨한테 할 말이 있는데요.”
“뭔데?”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고, 이따 제가 아가씨 방으로 갈게요. 아직 저도 업무 중이라서요. 하여간에 전하께서 절 가만두시지를 않는다니까요.”
보란 듯이 펠릭이 손에 든 묵직한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참, 지금 따로 가시는 데가 있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구조 좀 익히는 거야.”
“그러시면 놀이방은 어떠세요? 거기에 아가씨가 놀 만한 게 많을 텐데. 어딘지는 알고 계시죠?”
“알고는 있지만 사용 안 하는 곳인 줄 알았는데…….”
“네. 대공가 아이들이 노는 목적으로 지어졌는데 관리는 늘 잘되고 있거든요. 괜찮으시면 한 번 둘러보세요.”
“그래?”
울피림 대공가에 놀이방이라니, 좀 궁금하기도 했다.
“알았어. 그러면 이따 방으로 와 줘! 수고해!”
“네 아가씨. 또 공중으로 날아가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펠릭의 말을 뒤로하고 델리나가 놀이방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델리나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펠릭이 무언가 떠올린 듯 델리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 아가씨. 지금 거기 놀이방에…….”
하지만 어느새 델리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델리나가 사라진 방향을 가만히 보던 펠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괜찮겠지.”
* * *
“진짜 있네. 놀이방이?”
놀이방에는 얼핏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장난감과 놀이 기구가 있었지만, 정작 아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놈들이 여기서 하하 호호 놀 것도 아니고…….
거대한 놀이방에 혼자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델리나는 천천히 놀이 기구를 향해 다가갔다.
장치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기다시피 해서 괜스레 미끄럼틀 밑을 발로 밟아 보고, 공도 이리저리 굴려 보던 델리나는 문득 놀이방 구석에 놓인 거대한 거울을 발견했다.
‘거울?’
벽에 딱 달라붙은 거울은, 딱 델리나의 키 정도였다.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던 델리나가 눈썹 끝을 올렸다.
……보통 아이들이 노는 데 이렇게 손 닿는 곳에 거울을 배치해 두나?
가뜩이나 사고가 많이 생기는 놀이방에, 딱 깨지기 쉽게 놓인 거울을 보며 델리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거울을 손가락을 쓸어 보기도 하고, 거울 양옆을 살펴보기도 했다. 뒤쪽을 보려고 거울을 떼어 내려 했지만, 거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델리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울 이곳저곳을 손바닥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
순간 델리나가 손을 대고 있던 거울이 회전문처럼 빙글 움직였고, 그대로 델리나의 몸도 돌아갔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중심을 잃은 델리나가 그대로 바닥으로 엎어졌다.
‘뭐야?’
너무 놀라 잠시 바닥에 누워 눈만 깜빡거리던 델리나가 곧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확인했다. 그러자 회전문처럼 돌아가던 거울은 원래 자리로 돌아갔고, 거울 뒤쪽으로 들어온 델리나의 눈에는 거울 너머에 있는 놀이방의 모습이 들어왔다.
‘비밀 통로?’
놀이방 쪽에서는 거울로 보이고, 그 안쪽에서는 유리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진 듯했다. 그리고 또 발견해 낸 통로에 델리나가 멍하니 있는 사이,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동시에 델리나의 머리 바로 위에서 은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델리나는 그 아이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렸다.
‘노아…….’
“……안녕?”
델라나의 인사에 노아는 말없이 눈매를 휘며 웃었다. 노아의 예쁜 눈웃음에, 잠시 델리나가 멍하니 노아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델리나라고 하던데.”
“아, 응.”
‘얘는 좀 멀쩡한데?’
반센트를 만났을 때하고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 델리나가 눈을 깜빡였다.
“난 또. 하도 거울에 달라붙어서 원숭이처럼 움직이길래 이름이 원숭이인 줄 알았네.”
응. 취소.
물론 그런 델리나의 생각은 채 3초도 가지 못했다.
“……원숭이가 아니라 델리나야.”
확실히 여기서 보면 거울에 달라붙어 있던 제 모습이 제법 가관일 듯했다. 델리나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너 이름은 뭐야?”
“내 이름?”
“응. 나도 알려 줬으니까 너도 알려 줘야지.”
지금 델리나는 노아의 이름을 몰라야 했다. 그래서 델리나는 자연스레 통성명을 하려고 했지만, 노아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알려 줄래.”
“뭐? 왜?”
“내 이름 엄청 비싸거든. 알고 싶으면 돈 내.”
“…….”
그래. 잠시 잊을 뻔했다. 반센트가 장치나 실험에 미친 놈이었다면, 이놈은…….
돈에 미친 놈이었지.
“돈 말고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그냥 또 독심술을 할 줄 안다고 하고 이름을 부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어쩐지 저리 안 알려 주려고 하니 오기가 스멀스멀 생겼다.
“비싼 물건도 돼.”
“아니. 그런 물질적인 거 말고. 세상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잖아.”
“돈으로 뭘 못 사는데?”
“음. 가령…….”
그러게. 뭘 못 사지.
어떻게든 노아를 이겨 보려고 델리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대답했다.
“사람 마음 같은 거? 그런 건 돈으로도 못 사잖아.”
나름대로 고민을 하고서 낸 답이었지만, 노아가 웃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못 사. 돈으로 살 수 있어.”
“뭐?”
“지금 당장 눈앞에 1억 골드만 쥐여 주면, 바로 심장이 뛸걸.”
전혀 뜻밖의 말에 순간 델리나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이 자식. 벌써부터 그런 세상의 이치를…… 아니, 아니, 아니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릴 뻔한 델리나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아냐. 그건 처음에만 좋고, 계속 좋지는 않잖아.”
“그럼 좋을 때마다 계속 1억씩 주면 되지.”
“……아니, 아니다. 그거 말고 못 사는 거 있어.”
이대로라면 제가 말릴 것 같아서 델리나는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
“나는 돈으로 못 사.”
당당히 자신을 가리키는 델리나의 태도에 노아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진짜 안 두근거려? 1억 줘도?”
“그럼.”
“10억 줘도?”
“당, 당연하지.”
“100억은?”
“…….”
진정해, 심장아.
상상만 해도 두근거리는 액수에 델리나는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런 델리나의 얼굴에 노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것 치고는 표정이 너무 좋잖아.”
“아니. 이건 그냥 좀 좋은 일이 생겨서 그래.”
“그러면 내 이름 알려 주면, 네가 돈 대신에 나한테 오는 거야?”
“……?”
노아의 발언에 델리나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거울에 몸을 붙였다.
“왜,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
“그야 네가 돈으로도 못 사는 값어치 있는 사람이라니까, 내 이름 값으로 네가 와야지.”
순식간에 팔려 갈 위기에 처한 델리나가 빠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생각해 보니까 너 이름 안 궁금해. 그냥 내가 지어서 부를게.”
“무슨 이름으로?”
“뭐…… 딕이나 제임스나, 이런 거?”
그렇게 델리나가 말을 잇는 사이, 노아가 시계를 보더니 이내 눈매를 휘었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제 가 봐야 해서. 너도 그만 가 봐.”
“어, 그래.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이거 네가 만든 통로야?”
“응. 돈 주고 만들었지. 나만의 공간으로.”
……울피림 대공가에 비밀 통로를 만들려면 도대체 얼마를 지불해야 되는 거지.
돈 씀씀이의 차원이 다른 노아의 행동에 델리나는 머릿속으로 그 액수를 가만히 짐작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널 찾아가려고 했는데.”
“…….”
“도대체 그날 시험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대체 모르겠단 말이야. 그렇다고 목격자들이 돈으로 매수당할 사람들도 아니고.”
노아의 말에 델리나는 재빠르게 시선을 피했다.
“얼마 주면 네가 대신 알려 줄래?”
“……못 알려 줘. 가문의 평생 비밀이라.”
“그래. 뭐, 어차피 그럴 거라 예상했어.”
아무리 돈이 좋아도 목숨보다는 아니었다. 단호한 델리나의 말에 노아가 피식 웃었다.
“내 이름, 노아야.”
그러고는 제 이름을 밝혔다. 순순히 알려 주는 그의 태도에 델리나가 눈을 깜빡였다.
“그냥 알려 주는거야?”
“응. 네가 말한 이름, 완전 별로거든.”
“…….”
“내 이름 값은 나중에 천천히 받지 뭐.”
황당한지 델리나가 무어라 입을 달싹거리던 찰나였다. 델리나가 몸을 기댔던 거울이 회전하며, 그대로 튕기듯 델리나는 놀이방으로 엎어졌다.
“잠깐……!”
이름 값이 얼만데?
다급해진 델리나가 벌떡 일어나 손으로 거울을 쳤다.
“잠깐, 잠깐만! 나 사실 너 이름 알고 있었거든? 독심술이라고, 며느리도 모르고 사위도 모르는 가문의 비법인데……! 진짜야!”
델리나가 거울에 찰싹 달라붙어 이리저리 손을 움직였지만, 거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