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제국을 무너트린 다섯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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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제국을 무너트린 다섯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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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제국을 무너트린 다섯 명
2023.06.01.
“그 다섯 명이야! 고작 다섯 명이서, 이 제국 하나를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다고!”
언제나 평화로울 것만 같은 헬리움 제국이었다. 하지만 근 몇 년간 제국은 완전히 혼돈과 파멸로 물들었다. 황태손이었던 아슈드가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아슈드는 폭군 그 자체였다. 거슬리는 이는 그게 누구든 철저히 짓밟았고, 끊임없이 전쟁을 도모했다. 아슈드가 황제가 된 이후로 제국은 단 한 순간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저택이……!”
“아가씨! 피하셔야 합니다!”
평민이고 귀족이고 할 것 없이 아슈드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귀족들과 백성들의 원성이 물밀듯 몰아쳤다. 하지만 아슈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되레 그런 반발 세력들을 제거해 나갔다. 겁에 질린 귀족들은 황성에 있는 저택과 재산을 정리하고 다른 제국으로 망명하기 시작했다.
목적 없는 살육과 전쟁이었다. 드높은 위상을 자랑하던 헬리움 제국은 그렇게 기울어졌다. 제국의 거리 또한 황폐해졌다.
“저택, 저택이……”
델리나는 활활 불타는 저택을 보며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왔던 추억과 이야기들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야! 정신 차려! 그렇게 얼빠져 있을래?”
그런 델리나의 희뿌옇던 시야를 밝힌 이는, 델리나의 오빠, 기드온이었다.
“빨리 올라타. 고삐 잘 쥐고!”
“오빠, 오빠는?”
“난 저기 오는 놈들 막고 갈 테니까, 먼저 가.”
빠르게 델리나를 말에 올린 기드온이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부랑자들을 보고서 혀를 찼다. 한눈에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수에, 검을 들어 올리는 기드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드온의 옆구리에는 피가 서서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싫어! 오빠도 같이 가!”
“멍청아. 지금 이 말 상태로 둘이 탔다가는 고꾸라지기 십상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평소에 살 좀 빼랬잖아.”
혹 델리나가 도로 내려올세라 기드온은 델리나의 몸을 단단히 붙잡으며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 참. 그렇게 오빠라고 한번 안 불러 주다가 이제야 불러 주네.”
“……”
“이따가 만나면 꼭 그렇게 불러라. 또 이름으로 부르기만 해 봐. 하여간에 끝까지 말을 안 들어.”
“오……”
“이제 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드온이 있는 힘껏 말 엉덩이를 쳤다. 말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고, 말발굽 소리와 함께 델리나의 외침이 들려왔다.
“오빠!”
그 순간 어느새 기드온의 바로 뒤까지 온 부랑자 하나가 기드온의 등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뒤돌아 선 기드온이 부랑자의 칼을 막아 냈지만, 이후로도 곧 수십 명의 부랑자들이 기드온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공격에 기드온이 피를 흘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그대로 부랑자들의 발에 무참히 짓밟혔다. 오빠가 당한 참상에, 델리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
하지만 델리나 또한 그리 멀리 갈 수 없었다. 바람에 튄 불똥이 말의 엉덩이에 튀었고, 놀란 말이 이리저리 몸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아악!”
순식간에 낙마한 델리나가 땅으로 엎어졌고, 곧 제가 탔던 말이 내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로 말을 잡아서 타고 가야 했지만, 뼈가 부서진 듯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숨이, 숨이…….
거리는 불에 활활 타고 있었다. 불길은 델리나 쪽을 향해 오고 있었지만, 델리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마른기침만 내뱉었다.
시야조차 서서히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저 멀리 불길 너머에 서 있는 이들이 보였다.
아슈드 황제…….
아슈드의 타오르는 금발을 본 델리나는, 그 근처에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까지 알 수 있었다.
칼릭스, 노아, 반센트, 젠…….
폭군 아슈드와 아슈드 곁에서 제국을 파멸과 혼돈으로 뒤흔들었던 이들은,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불로 잠식되어 가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보던 델리나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어느새 델리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손안에는 잿더미가 된 플로렌 가문의 인장이 있었다.
그저, 난 그저 내 가문과 사람들을 지키고 싶을 뿐이었는데…….
하지만 현실은, 다 죽어 가는 자신의 몸뚱이와 다 타 버린 가문의 인장이 있을 뿐이었다.
“……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제발.
완전히 잿더미가 된 거리와 사라진 가문. 그것이 델리나가 눈을 감기 직전 보았던 참상이었다.
* * *
“허억!”
화마로 숨조차 쉴 수 없었던 공기의 흐름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달라진 공기에 눈을 번쩍 뜬 델리나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긴, 여긴……”
자리에서 일어나고서야 델리나는 한순간 가뿐해진 제 몸을 바라보았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고 호흡마저 거칠었지만,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조금 전과는 무척 다른 곳이었다.
“내 방……?”
정확히는 어린 시절 자신이 쓰던 방이었다. 그 놀라운 풍경에 델리나는 황급히 침대 위를 빠져나왔다.
“!”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제대로 거리를 가늠하지 못한 델리나의 팔다리는 허공을 가르다 그만 땅으로 추락했다.
“어머, 아가씨! 괜찮으세요?”
방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난 것을 감지한 누군가가 문으로 들어왔다. 그 익숙한 얼굴에, 땅바닥에 엎어져 있던 델리나의 눈이 커졌다.
“…… 릴리?”
“네.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쩜, 세상에.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왜 이렇게 식은땀까지 흘리세요.”
“네가, 네가 왜 여기를……. 너 결혼하고 고향으로 내려간 거 아니었어? 아니, 그나저나 왜 이렇게 키가 커졌어? 얼굴도 어려 보이고…….”
“네?”
무려 10년 넘게 보지 못했던 얼굴에 델리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몸이 안 좋으세요?”
땅에 엎어져 있던 델리나를 일으킨 릴리가 물었다. 그리고 자신을 가뿐히 일으키는 릴리의 행동에, 반사적으로 델리나의 시선이 거울로 향했다.
“이게, 이게……”
릴리만 어려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델리나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봐도 확연히 어려진 제 얼굴을 보고서, 델리나가 손가락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다시금 방을 자세히 둘러보니, 방에 인형들과 장난감들이 가득했다.
설마, 꿈?
죽기 직전에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고는 들었지만 이런 생생한 꿈이라니. 그 즉시 델리나는 제 얼굴을 가만히 꼬집었지만 꿈은 깨지 않았고 볼만 얼얼하게 아팠다.
“역시 의원을 불러야겠죠?”
“아냐, 아냐. 의원은 됐어.”
계속되는 제 주인의 이상 행동에 릴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델리나는 거울에 비친, 꼬집어 빨개진 볼과 어려진 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꿈이 아니야.
지금 느껴지는 감각은, 무척이나 생생했다. 꿈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정말 돌아온 거야? 과거로?
죽기 직전 간절히 바라고 바랐던 기회. 그리고 보란 듯이 주어진 기회에 델리나의 입은 쉬이 닫힐 줄 몰랐다.
“릴리. 지금이 몇 년도야?”
“지금요? 제국력 417년이요.”
그때라면, 내가 12살이었던…….
델리나는 비로소 몸이 어색해진 이유를 깨달았다. 하지만 여전히 생경한 감각에, 델리나는 작은 손으로 주먹을 쥐거나 손발을 이리저리 꾸물거렸다. 그때였다.
“야, 돼지! 뭐하냐?”
거대한 불길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였던 연보랏빛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연보랏빛 머리칼의 주인공은 델리나와 마찬가지로 어린 얼굴을 하고서 씩 웃고 있었다. 기드온이었다.
“오……”
“너 또 자다가 굴러떨어졌어? 그러니까 저택에 지진이 나지! 이 돼……”
“오빠!”
델리나가 그대로 기드온을 와락 껴안았다. 그 모습에 곁에 있던 릴리도 기드온도 입을 쩍 벌렸다.
“너, 너 왜 이래? 미쳤어?”
“오빠, 오빠. 정말 고마워 오빠.”
당황한 기드온이 버둥거렸지만 델리나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기드온을 더더욱 세게 안았다. 델리나의 행동에 릴리가 사색이 된 채 다급히 방을 뛰쳐나갔다.
“역시 아무래도 의원을 불러와야겠어요!”
그렇게 외치면서. 이후 복도 쪽은 릴리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델리나는 울먹거리며 기드온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기드온이 빠져나가길 포기한 듯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너 또 내 물건 망가트렸지?”
“……”
“또 뭐야? 빨리 말해.”
의심스럽다는 듯한 기드온의 목소리를 들으며 델리나는 점차 진정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무척 괴로운 악몽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꿈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었고, 또 생생했다.
무엇보다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키워드 창이 생성됩니다.>
“……오빠. 혹시 이거 보여?”
“뭐? 뭐가 있는데?”
갑자기 제 눈앞에 펼쳐진 글자들을 보며 델리나가 기드온에게 물었지만, 기드온은 눈을 치켜뜬 채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다섯 명이 흑막이 되지 않게 막고, 헬리움 제국의 평화를 가져오십시오.>
“너 일부러 말 돌리는 거지?”
옆에서 들려오는 기드온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델리나는 가만히 그 창을 바라보기만 했다. 동시에 델리나의 굳게 닫힌 입술이 사납게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