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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199화 (199/201)

199화. End of the Night (4)

한 소녀가 있었다.

검은 머리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언젠가 세상을 공포로 지배하게 될, 한 명의 여자아이.

그리고 소년이 있었다.

갈색 눈과 금발, 보살피는 자에서 울부짖는 자로, 다시 부서뜨리는 자로 변모할, 작은 화신化神.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아주 슬픈 일이 있었던 것만 같다.

「괜찮아.」

소년은 소녀를 꼭 안아주었다.

세상에는 그들만이 남아 있었다.

「괜찮을 거야.」

그것은 누군가의 낡고 오래된 기억.

소년과 소녀가 함께하는 수많은 광경들이, 한꺼번에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르륵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사람들을 죽이고…….

……언제나 서로를 구원했다…….

……놓치지 않도록 손을 꼭 잡았으나…….

……끝내는 허무하게 헤어지고 말았다…….

무던히 재생된 기억의 단면들.

그 마지막 장면을 지켜본 순간.

“아.”

불현듯―

리타 스몰필드는 눈을 떴다.

‘여긴…….’

베개와 이불의 감촉이 낯설었다. 적어도 누워 있는 곳이 자기 방의 침대가 아님은 분명했다.

그녀는 천장과 벽면, 그리고 방의 구석구석을 순서대로 살폈다. 전에 와본 적 있는 공간이었다.

‘팀장님네 모텔 방이잖아……?’

유진이 모텔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어제 시내에서 같이 저녁 식사를 한 뒤, 이곳에 왔었던 것까지는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집에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역에서 무슨 폭탄 같은 게 터졌던 것도 같은데.

‘…….’

왜인지 가슴께가 조금 갑갑했다.

뭔가가 짓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

리타 스몰필드는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그녀는 밝은 민트색 머리를 가진 꼬마 여자애와, 어딘가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묻어나는 검은 머리 여자가, 자기랑 같은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어라, 이 사람은…….’

그리고 그중 검은 머리를 가진 여자 쪽은,

방금 전의 꿈에서 보았던 소녀임이 분명했다.

바로 그 순간―

「내 심장을 줄게.」

「안 돼. 안 돼.」

「안 돼!」

꿈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의 비명. 소녀의 죽음. 악몽 같은 기억.

“윽.”

두통이 느껴졌다. 무수한 정보가 한꺼번에 머릿속에 들어왔다. 뒤늦게 모든 것이 이해되려던 찰나.

“깼냐?”

문득.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거참 오래도 디비져 쳐 자네. 누군 침대 자리도 뺏긴 데다 불침번이나 서고 있는데 말이야.”

리타 스몰필드는 화들짝 놀랐다. 부엌 쪽에 누군가 있었다. 째진 눈매를 가진 빨강 머리 여자였다.

“어, 저기, 누구……?”

“내가 누군지 아줌마가 알아서 뭐 하게.”

“아줌?! 이봐요, 나 아직 스물다섯밖에……!”

“난 열두 살이니까 그쪽은 아줌마 맞지. 언니라기엔 쫌. 아니면 뭐, 이모라고 불러 드릴까?”

“…….”

“그보다 당신. ‘뭔가’를 본 표정인데.”

빨강 머리 여자, 스칼렛이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던지며 말했다. 리타 스몰필드는 순간 움찔했다.

“자면서 이상한 꿈 꿨지?”

“……어떻게 알았어?”

“일단, 그거 꿈 아니야.”

“……뭐?”

“거기 침대서 쳐 자고 있는 꼬맹이, 걔 초능력자거든. 그 새끼랑 같이 자면 가끔 그래. 걔가 지 꿈속에서 보고 듣는 죽은 사람의 기억이 옆에 있는 나한테까지 들어오곤 하는 거지. 잘 자고 있는데 갑자기 좆 같은 꿈 꾸게 해서 진짜 개빡친다니까, 그거.”

……죽은 사람의 기억?

……아냐. 내가 본 기억은.

“뭡니까? <부름>의 정체라는 게?”

“일종의 <시간 가속>이다.”

“벡터의 방향을 바꾼다면 <시간 감속>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시간 정지>나 <시간 역행>도 이론상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선물을 줄게.”

“이번에는 실패하지 말아 줘.”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오라버니.”

……그래. 이건.

……팀장님의 기억.

지금도 조금씩 그 기억의 편린이 보이고 있다. 리타 스몰필드는 유진의 기억을 엿보고 있었다.

“저기, 팀장님은, 어디 계셔……?”

“팀장? 오라방 말이야? 나도 몰라. 오늘 밤은 아줌마랑 다 같이 여기 얌전히 있으랬어. 낮에 전국적으로 테러 난 거 알지? 이 모텔은 집주인 할머니 빽 덕분에 그럭저럭 안전하거든.”

순간 끔찍하기 그지없는 상상이 들었다.

설마. 혹시나. 유진은 벌써 죽은 게 아닐까.

“…….”

그럴 리는 없을 테지만.

만약에라도 그렇게 된다면…….

“가야 해.”

리타 스몰필드는 침대 밖으로 나왔다. 부리나케 문밖으로 나가려는 그녀를 스칼렛이 잡아 세웠다.

“잠깐, 잠깐! 어딜 가려는 거야, 아줌마?”

“꿈에서 팀장님 기억을 봤어.”

“……뭐?”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팀장님, 죽은 건 아니겠지? 그렇겠지?”

“시, 시안의 능력은 죽기 직전인 사람들의 기억도 가져오곤 하니까,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어디로 갔는지 알면 말해줘. 부탁이야.”

“나, 난 진짜 몰라. 근데, 아까 전에 가면 챙겨 갔는데, 그럴 때는 보통 노스네스트니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리타 스몰필드는 맨발로 방을 뛰쳐나가 밤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지하철은 끊겼다. 택시는 노스네스트 안까진 들어가지 않았다. 입구에서 내린 뒤 그저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를 유진을 찾아.

이 드넓은 도시 북부의 암흑가에서 아무 단서도 없이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본능이 가리키는 대로. 찾을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는데.

“하아, 하아…….”

숨이 찼다. 뛰는 동안 몇 번씩이고 넘어져 무릎은 몽땅 까졌고, 발바닥은 깨진 유리 조각이 박혀 피로 얼룩져 있다. 허나 아픔은 느낄 새도 없었다.

“하…….”

바보 같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아마도 나는, 그 사람을 정말로 좋아하나 보다.

….

….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각.

노스네스트 8구역. <드래곤 빌리지>.

“앗.”

방황 끝에 리타 스몰필드는 발견했다.

만날 거란 생각조차 못 한 뜻밖의 인물을.

“헬렌!”

어두컴컴한 골목길 안쪽, 만신창이가 된 초록머리 엘프 여자가 벽에 기댄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에, 어어? 리, 리타 선배님?”

리타 스몰필드는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헬렌. 팀장님 지금 어디 있어요?”

“아니, 이게 뭔, 선배님이 왜 여기에…….”

“어디 있는지 아는 거죠? 말해 줘요. 빨리요!”

“에, 저기, 아, 안 되는데여. 지금 거기 가면 백퍼 죽는다구요. 나도 지금 간신히 빠져나온 건데.”

비너스는 모른 척 딴 데를 보았다.

그렇지만 리타 스몰필드는 단호했다.

“부탁이에요. 헬렌.”

“…….”

“제발. 시간이 없어요.”

비너스가 내린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유진이 있는 곳을 알려줘서는 절대 안 됐다. 그곳에 가봤자 이 여자를 기다리는 것은 개죽음일 게 뻔하니까.

그치만―

“아으, 진짜. 끼리끼리 논다니까, 증말.”

그치만 어쩌겠나.

이렇게 빌고 있는데.

“그렇게 죽고 싶으면 가시든가요. 에휴.”

비너스는 결국 길을 알려주었다.

리타 스몰필드는 눈물 섞인 말로 고마움을 표하고는 비너스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다시 달렸다.

“…….”

그렇게―

폐허로 변한 철길 한가운데서.

“다행이다.”

죽음 직전의 문턱에 선,

유진을 만날 수 있었다.

“안 늦었어.”

***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스몰필드 씨……?”

환각 따위도 아니었다. 뺨을 문지르는 그녀의 손결, 그 따스함과 부드러움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래. 스몰필드 씨는 분명히 여기에 있었다. 굉장히 많은 감정이 섞인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다쳤잖아요. 팀장님.”

“미안해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미안해요. 다 내 탓이에요…….”

나는 억지로 웃으며,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전부 망쳤어요.”

그 억지웃음은 몹시 역겨웠다.

나 자신조차도 그 사실을 알았다.

“괜찮아요.”

하지만.

스몰필드 씨는.

“망쳤어도. 수습하면 되잖아요.”

나의 그런 억지마저도.

상냥하게 감싸 주었다.

“그러니까,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째서…….”

“제가 그러고 싶으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스승이니까.”

아아, 맞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스몰필드 씨는, 고물 로봇 타이퍼인 척을 하며, 나한테 마법을 가르쳐줬던, 대단한 사람이었지.

“누구랑 싸운 거예요?”

“엄청나게 나쁜 놈이요.”

“그 사람은 강했나요?”

“예. 말도 안 되게요.”

나는 괴물이 된 유클리드를 떠올렸다.

이길 수 없었다. 제때 반응하지 못했던 것을 고려해도, 도무지 이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부름>을 쓰지 못하는 지금,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는 기껏해야 <빛이 있으라>.

위력만은 남 부러울 게 전혀 없긴 하지만, 실상은 그저 단순히 출력빨에 의존한 파괴 마법이다.

그마저도 최근 있었던 전투에서는 그걸로 콘스탄틴을 일격에 쓰러뜨리지 못했다. 최초 사용 시기에 받은 반작용, 그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 탓이다.

“제힘으론 무리예요.”

무엇보다.

동료들이 죽었다.

“이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요…….”

다시 또 기회가 온다고 해도.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이미 새겨진 과거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아뇨.”

그때.

절망에 빠진 나를 나무라듯이.

“바꿀 수 있어요.”

스몰필드 씨가 그렇게 말했다.

무척이나 맑고 단호한 목소리로.

“제가 항상 말했었죠. 마법에는 왕도가 없다고.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마법사로서 강해지는 방법은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밖에는 없어요. 노력은 언젠가 빛을 발하기 마련이니까.”

“…….”

“그치만 팀장님은 흑마법사잖아요. 애초에 정상적인 방법으로 마법을 익힌 사람이 아니었는데. 근데 저도 참, 쓸데없이 고지식한 철학을 주입한 것 같아요. 아하핫, 이런 말 하면 스승님 실격이려나.”

이런 때에 농담을 뱉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허나 그녀의 농담은 왠지 편안하게 들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가르쳐줄게요.”

그녀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팀장님의 흑마법은 <강화>와 <부름>. 그중 <부름>은 <시간 가속>과 <텔레포트>의 조합이죠.”

“잠깐, 스몰필드 씨가 그걸 어떻게……?”

“원리를 해석하자면 <부름>은 아마 ‘시공간’ 그 자체를 <강화>시키는 마법일 거예요. 과학적인 관점에서 ‘시간’과 ‘공간’은 따로 분리된 게 아닌 서로 연관된 개념이니까, 이는 즉 술식의 매개체인 ‘시공간’의 마법적 형태를 술사의 마력으로써 얼마든지 재량껏 변형시킬 수도 있을 거란 얘기죠.”

스몰필드 씨는 혼자서 긴 이야기를 뱉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틈에도 그녀의 말을 또박또박 들었다.

“팀장님은 마력의 다섯 형질 중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불꽃의 형 ‘테자스’밖에 다루지 못하죠. 아마도 <부름>을 통해 <가속>밖에 쓰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과 관련이 있어요.”

“그럼, 만약 다른 형질을 다룰 수 있다면…….”

“<역행>과 <정지>는 물론. 그 이상의 것도 가능해지겠죠. 어쩌면 ‘시간의 마도사’ 이상으로, 무궁무진한 방향으로 시간을 조작할 수 있을 거예요.”

놀라웠다. 흑마법에 있어 마력의 형질에 중점을 둔 부분은 미르각시조차도 하지 못했던 발상이다.

문제는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는 점이다. 이제 와서는 그걸 훈련할 시간 따위가 내게는 없다.

“원래 형질 단련은 단기간에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재능 있는 마법사라 해도 한 가지 형질을 마스터하는 데 최소 3년 이상은 걸리죠.”

“…….”

“하지만, 팀장님은 흑마법사잖아요?”

스몰필드 씨가 말했다.

왜인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흑마법사가 강해지는 방법, 알고 계시죠?”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 걸까.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읽었던 흑마법에 관련된 서적.

거기에 쓰여 있던, 흑마법사의 각성 방법.

―다른 사람의 심장을 바치는 것.

안 돼. 그것만은 안 된다.

나는 입을 열었다. 쉴 새 없이 말했다. 그러지 말라고. 그것만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고.

“괜찮아요.”

그러나 스몰필드 씨는.

상관없다는 듯이 웃었다.

“믿고 있어요. 전부 바꿔줄 거라고.”

아무도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

모두를 살릴 수 있을 거라는, 의지.

“그러니까.”

그녀의 의지가 나에게 전해졌다.

할 수 있을 거라고. 나에게 전했다.

그렇게―

“제 심장을 드릴게요.”

나의 가장 소중한 존재가.

나를 위해 심장을 바쳤다―.

***

“가장 소중한 존재가.”

“꼭 살아줬으면 하는 순간에.”

“너한테 심장을 가져다 바쳤네.”

텅 빈 공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몇 번이고 들어왔던 목소리가.

“모순이잖아, 이거.”

소녀는 나를 보며 말을 쏘았다.

마치 변명을 해보라는 것 같았다.

“그렇네. 모순이네.”

“인정하는 거야?”

“그래. 계약 불이행이니까. 내 목숨을 가져갈 거면 가져가. 어차피 죽기 직전이었어서 노상관이야.”

나는 그렇게 배 째란 식으로 말했다.

소녀는 그게 맘에 들었는지 피식 웃었다.

“좋은 사람을 곁에 뒀구나. 마지막까지.”

“…….”

“심장을 바치게 한 건 정답이었어. 정말 보고 싶었거든, 네가 절망에 빠진 표정을. 그런데…….”

소녀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왜 웃고 있는 거야, 너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축하해. 심장을 가져왔으니, 이 힘은 이제 네 거야. 덤으로 목숨도 뺏지는 않을게.”

“…….”

“전에 말했듯이, 이건 내가 주는 선물.”

소녀는 빙그레 웃었다.

마치 선심 쓰듯이 말이다.

“이봐.”

유유히 작별을 고하려는 소녀에게,

나는 입을 열어 마음속 말을 던졌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게.”

소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곧 다시 피어난 미소는, 좀 더 아름다웠다.

“응.”

나는 아마 이 미소를 보기 위해,

그동안 싸워 왔던 걸지도 모른다.

“힘내. 오라버니.”

두근―.

느껴진다.

심장의 고동이.

두근. 두근―.

가슴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린다.

지금이라면 악마라도 될 수 있다.

“카인.”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이름을 불렀다―.

“나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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