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196화 (196/201)

196화. End of the Night (1)

이스트포레스트 6구역.

<카르마 코퍼레이션> 사옥.

‘성공한 인생’이라 하면 으레 떠오르는 이미지. 고층 빌딩의 널찍한 개인실. 통유리로 만들어진 벽.

이곳 역시나 그러했다. 예전에 <윌슨앤코 인터내셔널>의 실세였던 렘브란트의 방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허나 조금 더 넓었고, 아주 많이 휑했다.

“어때? 제법 괜찮은 경치지 않나?”

유클리드는 유리로 된 벽 앞에 서서 바깥 풍경을 즐기듯 감상했다. 나는 멀리 떨어진 소파에 앉아 있었기에 놈이 보고 있는 풍경을 볼 수는 없었다.

“여기 동부 6구역은 ‘구시가지’라 불리는 낡은 지역이지. 번영기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외곽 동네인 주제에, 어째 땅값만은 그때랑 달라진 게 없어서 참 드럽게도 비싸더라고.”

“그런데 왜 사옥을 하필 이런 데다 지었지?”

“오오, 좋은 질문이야. 이유는 단순해. 방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여긴 경치가 굉장히 좋거든.”

해가 저물어 가는 시에라시티, 황혼이 비추는 노란 빛이 유클리드의 얼굴 한쪽을 진하게 물들였다.

“지리상으로 6구역은 노스네스트와 맞닿아 있잖아? 여기선 북부의 저 높고 두꺼운 벽, <메이슨 월> 너머 빈민촌의 풍경이 생생히 다 보여. 죽고 죽이고 죽어가는 쓰레기들이 살아보려 발버둥 치는, 그 안타까울 정도로 치열한 삶의 현장이 말이야.”

“…….”

“난 이런 게 좋더라. 하늘 위에서 땅 밑을 감상하는 느낌이랄까. 불행한 인간들 나오는 다큐멘터리나 유니세프 광고를 재밌게 보는 거랑 비슷해.”

“악취미군.”

“하핫, 부정은 안 할게. 내 비서도 나한테 미친놈이란 소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은 뱉으니까.”

유클리드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곧 놈의 시선이 뱀의 혀와 같이 나를 훑었다.

“만나자고 부른 건 나지만, 아무래도 나보다는 그쪽이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아닌가?”

“…….”

“내 생각이 맞다면 먼저 말 꺼내도 좋아, 친구. 무슨 얘기든 들어줄게. 진지하게.”

이번에도 뱀의 혀가 넘실거리며 춤을 췄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원래 그러기로 했을 뿐이니, 놈이 말한 것처럼 먼저 말을 꺼냈다.

“제안을 했었지. 전에 네가 나한테.”

유클리드 진과 처음 만난 날.

놈은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암귀란 이름을 넘기라고. 네가 나 대신에 암귀가 되어서, 그 역할을 이어 가게 해달라고 말이야.”

“아아, 그랬었지. 그땐 거절하지 않았던가?”

“맞아. 근데 생각이 바뀌었어.”

놈의 눈동자가 흠칫 떨며 반응했다.

“그 말은, 혹시……?”

“제안을 받아들일게. 이제부터 너는 암귀 행세를 하고 다녀도 돼. 원한다면 <헬터 스켈터>를 네 밑으로 흡수해도 좋아. 네가 앞으로 뭘 하든 간에 신경 안 쓸 거야. 나는 뒷세계에서 멀어질 거니까.”

헤픈 미소가 번지는 것도 잠시.

유클리드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달콤한 얘기긴 한데. 그쪽은 뭘 원하지?”

“물론, 이건 거래야. 조건이 두 가지 있어.”

“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조건이면 좋겠는데.”

“생각만큼 어렵진 않을 거야. 우선, 내 주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건드리지 마. 절대로.”

“그거야 당연히 보장할 수 있지. 안 그래도 우리 첫인상이 서로에게 아주 별로였잖아? 아직까지 개인적인 감정이 있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해. 응.”

“…….”

“그때 일은 내가 반성하고 있어. 정말이야.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할게. 혼을 걸고 맹세하지.”

가볍기 짝이 없는 어조였으나, 유클리드가 뱉는 말에는 어딘가 묘하게 진중한 무게감이 엿보였다.

“……됐어. 말했다시피 이건 어디까지나 거래니까. 그쪽 말마따나 개인적인 감정은 접어 두자고.”

“상냥하기 그지없는 태도군. 정말 고마워.”

카리스마에서 묻어 나오는 신실성인가. 놈의 실체를 알고 있는 나조차도 순간 헷갈릴 정도였다.

“두 번째 조건은?”

“오늘 있었던 일의 뒷감당.”

바르베이라의 로봇들이 일으킨 무차별 테러.

허나 그 실상은 분명 유클리드의 짓일 것이다. 적어도 나는 알 수 있다. 물론 증거는 없다.

“표면상으로나마 너는 바르베이라와 동맹 관계였어. 그런데도 책임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

“후우, 알고 있어. 그녀의 정신 나간 계획을 직전까지 눈치채지 못한 건 확실히 크나큰 미스야.”

놈은 뼈저린 고갯짓으로 반성심을 표출했다.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줄게.”

“기회?”

“오늘 밤, 테러의 주동자인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을 사살하기 위한 정부의 비밀 작전이 실행될 예정이야. <나인서클>도 참여하는 대규모 작전이지.”

이곳까지 오는 길에 제퍼슨 브리즈로부터 연락을 받아 해당 작전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테러로 인하여 군과 경찰 병력 등이 상당수 소모된 탓에, 이번 작전에는 전투 용병을 비롯한 민간의 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나랑 <카르마 코퍼레이션>도 이 바르베이라 사살 작전에 동참해 달라는 얘기로군?”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대외적으로는 플랫폼 사업으로 흥한 스타트업이지만, 뒷세계에서는 만능 심부름 서비스, 즉 용병 파견으로 유명하지. 그것도 대표가 직접 발로 뛰며 해결한다고 들었어.”

“아하, 내가 그쪽 분야에서 좀 유명하긴 해.”

“용병으로서 네 실력은 잘 알고 있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직접 붙어 봤으니까. 웬만한 A급 프리랜서 용병들과도 아예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해.”

“넘치는 고평가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유클리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잠깐이나마 그녀와 동맹이었던 나를 끌어들인다면, 정보전에서도 앞서는 셈이 되겠네. 그렇지?”

나는 침묵으로 놈의 말을 긍정했다.

“바르베이라가 현재 위치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총 세 군데야. 그중 하나는 군수기업 <카이젠> 본사. 만약 네가 거래를 받아들인다면 오늘 밤 그곳을 공격하는 부대에 선봉으로 투입될 거야.”

“…….”

“자, 네 대답은?”

누군가 자신에게 유리한 제안을 할 때.

우리는 보통 그 제안의 저의를 의심한다.

“물어볼 것도 없어.”

하지만.

유클리드는 다르다.

“그야 물론 ‘YES’지.”

놈은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이라면 그저 한사코 그것을 수락해 받아들인다.

“아아, 좋은 일이야. 진심으로 기뻐. 지금 이 자리에서 한바탕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상대가 자신을 속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전제를 애초에 깔아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거를 청산하고.”

상관없기 때문이다.

속고 있든 그렇지 않든.

“미래로 나아가세.”

놈은―

언제나 우릴 속이고 있으니까.

***

“……방금 놈이 마지막인가.”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각.

노스네스트 8구역의 한 폐건물.

“빌어먹을 카이젠 자식들, 드래곤 빌리지까지 쫓아와서 이리 엉덩이 밑을 쑤셔 올 줄이야.”

“하핫, 그러게. 따돌렸다고 생각할 때마다 반대 방향에서 추격이 붙더군. 놈들의 물량을 얕봤어.”

“졸지에 2차 중일전쟁을 치러 버렸으니, 원. 사실은 우리가 이간질한 꼴이었지만 말이지.”

밤이 지배하는 어둠 속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한 두 남자가 오랜만에 여유롭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파괴 마법과 총알 세례가 빗발치던 거리를 빠져나온 지, 이제 갓 몇 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젠장, 총알이 딱 한 발 남았었잖아.”

“좋겠네. 이쪽은 한참 전부터 엥꼬였어.”

“까딱했으면 진짜로 여기서 그냥 뒤질 뻔했구만 그래. 휘유! 살아있는 게 기적이야.”

오크 남성, 도살자 잭 린든이 맨팔로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땀을 닦는 게 목적이었지만 오히려 그의 녹색 피부가 물기에 한참 적셔질 뿐이었다.

“자네는 어떤가? 다친 곳은 없나?”

잭 린든이 물었다.

남자는 씨익 웃었다.

“멀쩡해.”

“크하핫! 역시나 터프하군!”

“그쪽에 비하면 덜하지. 도살자 형씨.”

“야, 겸손하기까지 하구만. 그동안 자네가 홀몸으로 페르골리치 패밀리를 절멸시켰단 얘기, 그냥 근본 없이 튀어나온 뜬소문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부터는 믿기로 했네. 난 내가 본 것만 믿거든!”

남자는 기분 좋은 미소를 유지했다.

유진이 그간 ‘암귀 카이트’로서 벌인 일들의 일부는 자신의 업적인 것처럼 되어 있었다. 물론 그가 의도한 부분이 없잖아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여간에 고맙네, 유클리드.”

“고맙긴 뭘.”

“자네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어.”

잭 린든의 칭찬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번 작전에서 <카이젠>에 쳐들어간 B팀의 대부분은 친親정부 용병 단체의 새파란 햇병아리들.

손발도 맞지 않는 조무래기들끼리 거의 반쯤 인해전술만으로 치고 들어가는 사이, 유클리드의 존재는 모르는 사람이 봐도 반짝일 정도로 빛났다.

지금도 팀의 복귀를 돕기 위해 유클리드와 잭 린든 둘이서 적의 병력을 몽땅 끌고 온 것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B팀은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참, 잊을 뻔했군.”

그 무렵.

잭 린든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뭐야?”

“이번 일의 보수일세.”

“얼레? 보수가 있었어?”

“그럼. 공짜로 일하는 게 어디 있나? 카이트 그 친구는 절대 무급으로 부려먹는 일이 없거든.”

그러고 보니 잭 린든은 유진과 같은 편이었지.

자기를 감시하기 위해 붙여 놓은 것일지. 아니면 동료를 보호하기 위함일지. 어쩌면 둘 다려나.

“아무튼 주는 돈이니까 그냥 받도록 해.

“뭐, 그래.”

“원래는 반반이지만, 자네 쪽 주머니에 좀 더 챙겨 넣었어.”

“그거참 고맙네.”

잭 린든은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유클리드에게 돈주머니를 던졌다.

“앞으로도 종종 같이 일하자고.”

툭―.

유클리드는 던져진 주머니를 낚아챘다.

“……?”

그때.

무언가 어색함을 느꼈다.

“이거, 돈치고는 좀 무거운데?”

지폐가 아니라 동전이라도 들은 걸까.

주머니의 겉면은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고, 한 손으로 들면 그 무게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으래? 어럽쇼? 내가 잘못 줬나?”

“…….”

“이상하네. 돈주머니랑 헷갈릴 거는…….”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잭 린든은 웃었다. 비열한 미소였다.

“폭탄 주머니밖에 없는데.”

그리고.

그 순간.

삐. 삐. 삐이이―.

손에 들고 있는 주머니 안쪽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유클리드는 주머니를 던져 버리려 했다.

그러나 눈치챈 순간엔 이미 늦어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성대한 폭음이 울려 터졌다.

그 폭발의 현장은, 바로 코앞.

“큭!?”

피하긴 어려웠다. 방호 마법으로 무마하려 했으나 타이밍이 늦어 데미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폭발에 이어 찾아온 것은,

잭 린든의 집중 연발 사격.

타앙. 타앙. 타앙. 타아아앙―!

사제 폭탄이 뱉어낸 거뭇거뭇한 연기 사이를, 산탄 구슬들이 거칠게 뚫고 들어왔다.

유클리드는 공중제비를 뛰며 몸을 뒤로 피했다. 탄환의 일부가 피부를 스치고 살점에 박혔다.

“잠깐, 잠깐, 타임! 이봐! 갑자기 무슨…….”

그가 다급하게 소리를 칠 동안,

등 뒤에 다가온 그림자가 있었다.

“연환권連環拳.”

그 존재를 눈치채자마자, 티타늄 너클을 장착한 철권의 연격이 유클리드의 배면을 마구 강타했다.

퍼버버버벅―!

고통스러운 충격이 피부 안쪽을 사납게 울리며 허파를 비롯한 내장에까지 여실히 전해졌다.

‘이놈은…… <헬터 스켈터>의 행동대장?’

‘매복인가? 처음부터 여기서 기다렸다고?’

‘이동 루트는 전부 내가 정했는데. 어떻게?’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는 유클리드에게, 운석처럼 폐건물의 천장을 부수며 날아든 것이 있었다.

「목표를 제압합니다.」

안드로이드였다. 합금으로 이뤄진 바디의 무시무시한 악력과 질량이 그대로 유클리드를 덮쳤다. 빠져나가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윌슨앤코>의 메이드 로봇?’

‘슐츠 4세대 PRO급 배틀기어에다, 아르카나 기반 위저드리 모듈로 움직이는 에테르 엔진?’

‘이건 뭐 핵무기급 전쟁 병기잖아?’

쿠구구구구궁―!

짓누른 힘에 의해 유클리드가 서 있던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결국 중심을 잃고 추락했다.

‘…….’

그렇게 떨어지는 와중에도,

유클리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아, 그렇군.’

어찌 된 영문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통수 쳤구나. 이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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