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Sunday Bloody Sunday (7)
하늘에서 불씨가 떨어졌다.
‘업화’의 잔불. 지상에 있는 자들은 머리 위를 올려다보며 곧 세상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곧 끝나겠군.’
허나 미르각시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하늘의 빛은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도시를 침략한 자가 내뿜는 진홍의 불빛.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를 막으려는 자가 비추는 순백의 섬광이다.
번쩌어어억―.
지금.
하얀 섬광이 붉은 불빛을 잡아먹었다.
‘이겼구나.’
구름 위 세계에서 승리의 광채가 쏟아졌다.
멸망의 날은 저 멀리 뒤로 물러났다. 발그무레하게 물들었던 도시의 하늘은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푸름을 되찾게 되리라.
‘역시. 내가 제자 하난 잘 키웠어.’
미르각시는 홀로 키득거리며 웃었다.
사실, 도저히 그럴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쪽은 어찌하면 좋을꼬.’
불타는 거리. 하나둘 무너져 내리는 건물들.
만신창이가 된 어린아이의 몸으로, 그녀는 가까스로 생명줄을 붙잡은 채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도움이 안 돼서 미안해. 용용 선생…….”
유진이 보낸 지원군, 분신술사 지나 드비토의 최후의 분신마저도 사지 어디 하나 멀쩡한 부분이 없었다. 당연하지만 더는 전투가 불능한 상태였다.
“꼼짝없이 죽게 생겼네, 이거. 아하핫.”
“…….”
“보스가 말이지, 끔찍하게 답도 없는 상황이 찾아오면……. 그쪽한테 이렇게 전해 달라고 했어.”
지나 드비토가 말했다.
어린 용을 똑바로 쳐다보며.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
미르각시는 침묵했다.
그녀로선 해줄 말이 없었기에.
“난 분명 전했다. 그럼, 수고해.”
마지막 발악을 위해 당당히 앞으로 나서는 젊은 여전사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는 없었다.
서걱―.
망설임 없이 휘둘러진 무정한 칼날 앞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베여 쓰러졌다.
칼이 걸어온 길에는 시체의 산이 쌓여 있었다. 모두 단 한 사람의 검객이 만든 무덤이었다.
아니.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과거에 사람이었던 자.
한낱 기계의 망령이 되어 버린, 칼자루에 꽂힌 칼을 다뤘던 칼잡이― 도그아이드 킴의 말로였다.
“용을 죽일 뻔한 자가, 꼴이 말이 아니로구나.”
유진의 일격에 육신의 대부분을 잃고, 조금 남은 신체의 잔해만이 어찌어찌 수거되어, 기계해골 콘스탄틴처럼 안드로이드 칼잡이로서 환생한 것인가.
“부드러운 살결 대신에, 단단한 금철이라.”
헌데 그 과정에서 자아를 잃고 만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필요 없다고 판단되어 배제된 것인지, 말 한마디 없는 데다 감정까지 느껴지지 않는구나.
“그곳 안에서, 그대의 영혼은 평안한가?”
“…….”
“혹 부당히 갇혀서 울부짖고 있지는 않은가?”
미르각시는 몸을 일으켰다. 자그마한 팔다리는 가볍게 힘을 준 것만으로 덜덜 떨리며 휘청였다.
“못다 한 일을 끝내러 왔는가.”
그럼에도.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일어섰다.
“미안하지만, 나는 살아야 한다.”
용은 굴복하지 않는다.
결코 좌절하지도 않는다.
“삶을 늘리는 것에 미련은 없으나, 그렇다고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서 말이지. 왜냐하면…….”
변변한 마법조차 제대로 쓰지 못한다.
연약한 몸은 이미 걸레짝이나 다름없다.
“빌어먹을 제자 놈이 믿고 있거든.”
그럼에도 일어선다.
굴복도 좌절도 없다.
미르각시는 깨진 단전에 마력을 끌어모았다.
찢겨진 역린의 틈으로 마나가 줄줄 새어 나갔다. 하지만 괜찮았다. 마법을 쓸 생각은 없었으니까.
억압됐던 마나의 흐름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자, 심장에 봉인한 술식이 과부하 상태로 바뀌었다.
그 결과, 유년기 형태의 폴리모프가 해제되며, 미르각시는 서서히 성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기자기한 연두색 머리카락은,
태산의 숨결을 머금은 청록색으로.
해바라기가 그려진 꽃님반 티셔츠는,
태양의 빛줄기로 짜인 듯한 도복으로.
청룡 미르각시의 붉은 눈동자가― 도그아이드 킴의 이목구비 없는 금속 안면을 향해 번뜩였다.
“흐음.”
도그아이드 킴의 검은 요도 무라사메.
현존하는 도검 중 날카로운 칼날을 지닌 명검이다. 어쭙잖은 무구로는 맞받아치는 것조차 불가능.
“어디, 이거면 되려나.”
미르각시는 송곳니 하나를 쥐어 뽑았다.
오른손에 움켜진 이빨 조각은 붉고 푸른 불꽃에 휩싸여, 순식간에 한 자루의 환도環刀로 변했다.
“칼부림은 500년 만이군.”
그녀는 한차례 검을 휘둘러보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자랑하던 검술 실력은 슬플 정도로 녹이 슬었고, 몸 상태는 전혀 정상이 아니다.
“그대의 칼을 받아주마. 칼잡이여.”
최강으로부터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지금.
청룡의 의지는 여전히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덤비거라.”
죽이고자 하는 자와 살고자 하는 자.
살생의 기로에 선 두 최강이― 격돌했다.
슈와아아악―!
휘두르고 받아친 것만으로, 강풍이 불었다.
한 합에 한 번씩. 공기가 일렁이고 대지가 흔들렸다. 검과 검의 날 끝이 살벌하게 내리 스치며, 서로 주인의 목을 꿰뚫으려 작은 틈 사이를 오갔다.
챙. 챙. 채애앵―!
미르각시는 역사상 최강의 마법사였지만 동시에 최강의 육체를 지닌 드래곤이기도 했다.
날붙이가 세상을 지배하던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그녀는 이따금 심심풀이로 검술을 익혔다.
칼잡이로서 미르각시의 실력은― 똑같이 최강.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드래곤의 신체 능력에 더해, 최고 수준의 전투 센스가 빛을 발했다.
수명을 고작 200년 남짓 남겨 둔 황혼기였으나, 여전히 전성기 수준의 몸놀림을 기억하고 있었다. 과장을 좀 섞자면, 오직 검술만으로도 <나인서클>의 다른 멤버들을 가볍게 압도할 수 있을 듯했다.
허나―
딱 그 정도였다.
‘빡세구나. 이건.’
미르각시의 강함은 부정할 수 없었으나, 상대인 도그아이드 킴은 불합리한 수준으로 ‘더’ 강했다.
칼을 다루는 기술이 완벽하다.
단순한 무력에서도 압도적이다.
‘빈틈이 없다. 가히 소름이 돋을 지경이야.’
‘패기를 제외하고선 발루아의 성녀 이상인가.’
‘과연, 날 죽일 뻔한 게 우연은 아니었던 게군.’
그때는 다구리를 맞는 상황이었다고 핑계라도 댈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지마저 없다. 이 늙은 검객은 적어도 지금의 자신보다는 훨씬 더 강하다.
인간이었던 시절의 신체적 결함이나 약점 따위도 기계의 육신을 얻은 지금은 모두 극복한 상황.
만약 자신이 전성기 상태에 이 자와 일대일로 붙었다 하더라도 승리를 자신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놈은, 나보다 더 강한 걸지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르각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순수한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두근―.
그리고 그 감정이,
심장을 떨리게 했다.
‘재미있구나.’
두근거림의 이유는,
곧 미소로써 드러났다.
‘너무 재미있어서. 죽을 것 같다.’
언제나 모든 것들을 내려다만 보았다.
반만년의 세월 동안. 정점에서 말이다.
이에 자연히 모든 것들이 지루해졌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외로운 오락에 빠졌다.
게임은 참 즐거웠다. 적이 강할수록 그랬다.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에게 역전하는 그 순간의 고양감이 그랬다.
‘내가 더 약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심장이 뛴다. 마구마구 요동친다.
목숨이 딱 한 개 남은 캐릭터를 조종하여, 매우 길쭉한 체력 바를 가진 보스를 상대하는 기분이다.
‘이길 수 있다.’
피캉―!
검과 검이 부딪힌다. 점점 더 격해진다.
미르각시의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다. 칼을 들고 있을 완력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팔을 디디고 철을 울리는 칼의 노래가 이어져 갔다.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더 날카롭게―.
춤사위나 다름없는 칼부림. 뼈와 관절의 관계가 흐릿해진다. 기이한 각도로 팔이 꺾이며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칼날이 휘두른다. 인간이라면 불가능했을 움직임이다. 그런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감사를 표하지. 기계 몸의 칼잡이여.”
수천 번. 수만 번의 부딪힘 끝에.
도그아이드 킴의 자세가 무너졌다.
“말년에 꽤 참신하게 즐길 수 있었다.”
그때 그 순간의 호기를,
미르각시는 놓치지 않았다.
“그대에게 죽을 뻔한 덕이니라.”
흔들린 공간의 틈에 존재하는 단 한 개의 점.
칼을 쭉 뻗어, 바로 그 일점을 찌르고 들어갔다.
푸슉―.
날 끝과 점이 교접하며 붉은 꽃을 피웠다.
아니, 기계의 피는 붉은색이 아니었다. 냉각수와 마나 오일이 머금은 빛깔은 녹진한 까만색이었다.
파카앙―!
칼을 휘둘러 뽑자, 기체의 상반신이 부서졌다.
이윽고 안드로이드의 움직임은 영원히 멈췄다.
“후우.”
미르각시는 검을 내려놓았다.
그러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고 있느냐. 제자 놈아.”
붉은빛이었던 하늘은,
아주 조금 맑아져 있었다.
“나도 이겼다.”
***
「……기분이, 참, 별로군요…….」
「……두 번씩이나, 죽게 되다니…….」
「……그것도, 같은 인간한테, 말이죠…….」
시에라시티 도심. 어느 빌딩의 옥상.
머리 반쪽만 간신히 남은 콘스탄틴의 처참한 잔해가, 건물 옥상 위를 초라하게 구르고 있었다.
“타이퍼. 이 녀석 또 부활하진 않겠지?”
「메인 시스템 모듈이 완파됐습니다. 데이터 백업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현재 시내의 통신 상태로는 AI 데이터를 업로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백업까지 처리해야 끝난다면, 바르베이라의 연구소를 직접 조지는 수밖에는 없겠군.”
나는 콘스탄틴의 부서진 대가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도시를 멸망시키는 게 너희 목표였을 테지?”
「…….」
“미안해서 어쩌나. 너와 네 주인은 멋지게 실패했어. 얌전히 포맷 당할 준비나 하고 있도록 해.”
콘스탄틴의 하나 남은 눈동자가 나를 보았다. 금이 간 안구 카메라가 지잉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우린,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뭐?”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끝까지 단념할 생각이 없는 거냐. 유감이지만 너희 뜻대로는 절대로 안 돼. 이번 일로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으니, 곧 <나인서클>이 나설 거야. 너희 주인님도 너처럼 이제 죽은 목숨이다 이거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요…….」
콘스탄틴이 안면 파츠를 움직였다.
왜인지 나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유감인, 것은, 그쪽…….」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
「……당신은, 막지, 못할 겁니다…….」
그게 녀석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붉은 안구의 빛이 툭 하고 꺼지며 사라졌다. 기계의 죽음. 다른 말로 하자면 시스템 종료였다.
“…….”
끝나지 않았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콘스탄틴은 죽었다. 바르베이라 테르마옌도 그렇게 될 것이다. 로봇들 역시 모두 제압한 뒤다.
‘마왕의 후예’와 ‘기계 제국의 반란’ 에피소드는 이걸로 마무리됐다. 틀림없는 종결이지 않는가.
….
….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애초에 바르베이라는 왜 도시 침공을 저지른 거지?
미르각시 습격을 실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시점에, 굳이 약해진 전력으로 이렇게 서둘러 무대포 짓거리를 저지를 만한 이유가 그녀에게 있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명분은 있어도, 실리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바르베이라는 이득 없이 움직이는 바보가 아니다.
“……설마…….”
왜인지 안 좋은 생각이 든다.
불길한 상상이지만, 현실적이다.
“……범인은, 바르베이라가 아니라…….”
이번 테러 사태로 엄청난 이득을 보는 녀석.
뻔뻔하게 대량 학살을 저지를 수 있는 녀석.
이 모든 일의 주동자가 될 수 있는 건,
분명 이 세상에 그놈밖에는 없을 것이다.
우우웅―.
때마침.
전화가 왔다.
“…….”
받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딸칵―.
결국 전화를 받았다.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이. 친구.」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았다.
나는 또 이놈 손에 놀아났구나.
“유클리드.”
「응. 나야. 어때? 살아 있어?」
“살아 있으니까 전화를 받았겠지.”
「하핫! 그렇네! 다행이야. 걱정했거든.」
“무슨 볼일이지?”
「어. 통신이 복구된 것 같길래. 아, 근데, 실은 이게 전화로 할 만한 얘기가 아니라서 말이지.」
놈이 말했다.
능글맞게 웃으며.
「우리 만나서 얘기하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