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The Next Day (3)
“그동안 계약직이라서 마음 불편하셨잖아요. 이제부터 스몰필드 씨는 <윌슨앤코> 정규직이고, 거기에 승진도 겸해서 대리 직급 달게 되실 거예요.”
“…….”
“원래는 월요일에 사무실에서 다 같이 있을 때 발표하려 했는데, 너무 떠들썩하게 박수 치고 그러면 스몰필드 씨가 싫어할까 봐, 개인적인 축하의 의미까지 곁들여서 이렇게 따로 불러 식사 대접해드린 겁니다.”
리타 스몰필드는 허무함 속에 침묵했다.
유진이 준 선물 포장을 뜯어보니, 안에는 준명품 브랜드의 여성용 손목시계와 ‘어시스턴트 매니저’라는 직함이 새겨진 명함 박스가 들어 있었다.
“…….”
시계였구나. 반지가 아니라.
하긴 그렇겠지. 뭘 기대한 거람.
지금은 직장 상사와 부하.
한때는 마법 선생과 제자.
작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을 뿐.
우리는 아직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사실은.
지금의 관계에 만족한다.
바로 옆에서 걷는 게 아닐지라도.
살짝 뒤쪽에 있다고 해도. 괜찮다.
“정말로. 기뻐요.”
이 사람과 같이.
걸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도 못 했어요. 승진 같은 거.”
“뭘요. 능력을 생각하면 여태까지 계약직이었던 게 이상하죠. 회사 입장에서 당연한 조치입니다.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스몰필드 씨 같은 사람.”
유진이 웃었고, 리타 스몰필드도 따라 웃었다.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은 누가 뭐래도 진짜였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여기서 더 나아갈 수는 없더라도.
뒷걸음질만은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뭐어, 밥도 엄청 맛있으니까.’
리타 스몰필드는 다시 기분 좋게 식기를 들었다.
유진은 그런 그녀를 보고 사뿐히 웃음 지으며 말없이 와인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웨이터가 아닌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라?”
유진의 등 뒤쪽을 스쳐 지나가던 한 남자.
그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유진 연 씨?”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유진은 움찔했다.
그 남자의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은 적 있었다.
“맞군요!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
“저 누군지 아시죠? 기억 못 하시면 섭섭한데.”
아무렴.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쪽은 여자친구분이신가요?”
“네, 네에? 아뇨, 저는…….”
“혹시 그냥 직장 동료 사이일 뿐인데 제가 오해했나요? 넘겨짚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 아름다우신 분이셔서 하마터면 질투가 날 뻔했네요. 아 참, 그보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고개를 스윽 돌려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 거울을 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어쩐지 자신과 매우 흡사한 분위기의 인상.
“유클리드입니다. 유클리드 진.”
남자는 반대편의 리타 스몰필드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악수를 청했다. 둘이 서로 손을 섞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유진은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받으세요.”
“……우왓, 대표? 사장님이셨네요.”
“하하. 그냥 조그만 구멍가게입니다.”
“저기, <카르마 코퍼레이션>이라면, 예전에 <아세아물산> 산하에 있던 그 종합상사 아닌가요?”
“아아, 맞습니다. 근데 지금은 무역 쪽보다도 문어발로 이런저런 사업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이죠. 그래서 신생 스타트업이나 다를 바 없어요.”
“아하…….”
“식사는 즐기고 계신가요? 이 가게는 메인보다도 디저트가 최고니까 배불러도 참고 버텨 보세요.”
“아, 네에.”
“그럼, 좋은 밤 보내시길.”
남자는 젠틀한 미소와 함께 사라졌다.
태풍이 잠시 왔다 간 것 같은 시간이었다.
“저분, 팀장님이랑 아는 사이세요?”
“지인입니다.”
“형제인 줄 알았어요. 엄청 닮아서…….”
유진은 그녀의 말을 침묵으로 웃어넘겼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아, 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웨이터가 그를 화장실로 안내하려 했으나, 유진은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다며 정중히 거부했다.
쏴아아―.
유진은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조금 오래.
이어 잠시 후. 누군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
“…….”
유클리드였다. 유진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두 남자는 세면대 앞에 나란히 서서 묵묵히 거울을 마주 보았다. 시선은 각자 자신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너랑 내가 마주친 건, 우연인가?”
먼저 입을 연 쪽은― 유클리드.
“우연치곤 기묘하지. 아무래도.”
“…….”
“인연이라기엔 너무 작위적이고 말이야.”
유진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결론은 이래. 이건 우연도 뭣도 아닌, 어떤 계획의 일부다. 그리고 거기에 꼼짝없이 걸린 거다.”
유클리드는 손을 닦았다.
닦을 필요라곤 없었는데도.
“말해 봐. 유진 연.”
그제야 그의 시선이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유진 쪽을 향했다.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매섭게 날려 보낸 물음표.
유진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난 그냥 밥 먹으러 온 건데.”
“틀렸어. 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서 온 거야. 당당하게 여자친구까지 데리고서 말이지.”
“직장 동료야. 여친 같은 거 아니고.”
“알아. 다 안다고. 나는 네 주변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어. 네가 내 단골 레스토랑을 아는 것처럼.”
유클리드는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협박하러 온 건가? 아니면 복수?”
“…….”
“어느 쪽이든 권장할 바는 못 되는데. 나도 그렇지만 그쪽도 밝은 데서 일 벌이는 거 싫어하잖아. 그러니까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어조는 내내 평탄했지만 날카로웠다.
필히 자신의 의중을 떠보고 있으리라.
“제안을 하러 왔어.”
“뭐?”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이 미르각시를 공격하도록 부추긴 게 그쪽이지. 며칠 전에 스트로베리 시장의 자택에다 폭탄 테러를 감행한 범인도 그쪽이고.”
“흐음, 무슨 증거로 그런 말을 하나?”
“동기가 명확해. 바르베이라의 쿠데타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녀가 소유한 군사기업 <카이젠>의 대외적 입지는 불안해지겠지. 경쟁사인 그쪽의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반사 이익을 얻을 수 있어.”
“그게 단가?”
“<나인서클>에 내부 분열이 일어나게 되면 앞으로 무슨 일을 벌이든 조금 더 대담해질 수 있겠지. 뒷세계에서의 영향력을 늘리기도 쉬워질 거고.”
유클리드는 침묵했다.
유진은 계속해서 말했다.
“스트로베리 시장은 시에라시티를 주무르는 뒷세계의 집단들을 깡그리 없애 버리고 싶어 하지. 그래서 그쪽은 일부러 테러를 저질러서 시장에게 구실을 줬어. 그녀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범죄와의 전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만한 구실을 말이야.”
“…….”
“너는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있어. 이 도시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네가 그 중심에 설 셈이지.”
“그래서 뭐? 방해하려고?”
“아니.”
유클리드가 물었고,
유진은 곧장 답했다.
“나도 좀 껴주라.”
….
….
정적.
침묵이 흘렀다.
“뭐라고?”
“정부와 공권력을 상대로 대규모 맞짱을 뜰 셈이라면 적잖은 힘이 필요하겠지. 암귀 카이트와 <헬터 스켈터>. 이 정도면 전력으로 충분하지 않나?”
“지금 설마 나랑 팀을 맺겠다 이건가?”
“그러는 편이 나한테 이득이 되니까.”
유클리드는 피식 웃었다.
“의외군. 날 무척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줄을 설 거면 이길 것 같은 쪽에 서야지. 나는 그쪽이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거든.”
유진의 눈빛은 매우 진지했다.
적어도 마지막 부분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의 유클리드를 향한 평가만큼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하핫.”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손을 잡자고 제안하는 녀석이라니.
“재밌네. 너란 인간.”
“…….”
“좋아. 평화적인 화친에 동맹까지 맺을 수 있다면 나야 감사하지. 일단은 훗날에 다시 천천히 얘기해 보자고. 여기다 번호 좀 찍어 줄래?”
유클리드는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유진은 그에게서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자기 연락처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이 된 것을 확인하고는 도로 전화를 돌려주려는데…….
미끌―.
그만 그것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떨어진 전화기는 바닥에 부딪혀 액정이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웁스.”
“이런, 미안.”
“아냐.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사소한 해프닝이었다. 곧 그들은 헤어졌다.
“나중에 연락할게.”
유클리드는 그 말을 남기고서 자리를 떠났다.
유진은 약간의 텀을 둔 뒤 화장실을 나와 리타 스몰필드가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로 돌아갔다.
“……으음? 팀장님, 팀장님! 이거 와인이랑 같이 드셔 보세요. 진짜 거짓말 아니고 엄청 맛있어요!”
“오, 그렇네요. 소스 풍미가 확 살아나네.”
“와아, 신세계다. 이게 페어링이란 거구나.”
이곳에 온 원래 목적이 뭐였든 간에.
지금은,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으헤헤, 기분 조탕~.”
오후 10시 30분.
인적이 드물어지기 시작한 밤거리를 리타 스몰필드가 해롱해롱한 걸음걸이로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저기, 스몰필드 씨, 조금 취한 것 같은데…….”
“안니여? 안 치햇는대여? 팀장넴 왜 사람을 주정뱅이로 모라가여? 으에? 나 안 치했어어어어!”
아무리 봐도 꽐라가 된 꼬락서니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술에 약하단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예전에 회식했을 때도 맥주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인사불성이 됐었지.
“택시 부를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택씨? 지끔 택씨 불러서 어디 가게여?”
“어딜 가긴요. 집에 들어가셔야죠.”
“에헤에, 그짓말! 내가 기억 모탈 줄 알고! 또 그때처럼 나 데리꼬 모텔 갈라는 거 다 알거등여!”
“아니, 그거는…….”
“그래도 갠차나여. 팀장넴 어차피 모텔 가도 나한테 아무 짓또 안 할 그니까. 헤헤헤. 그쳐?”
“아무튼 집에 보내드릴 테니까 여기 좀 있어요.”
“으에, 근데, 아직 못 먹은 게 잇는데에…….”
“라면은 댁에 가서 끓여 드세요.”
유진은 리타 스몰필드를 데리고 택시에 탔다.
그녀의 주소는 6구역 잭슨 빌리지 아파트. 먼저 들러서 그녀를 바래다주고서 돌아갈 생각이었다.
“스몰필드 씨. 거의 다 왔어요.”
“…….”
“스몰필드 씨?”
반응이 없었다. 곯아떨어졌군.
리타 스몰필드는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누구랑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힘 빠진 손아귀에 위태롭게 들려있던 전화기를 유진이 꺼내 그녀의 가방에 돌려놓으려던 와중. 화면에 비친 문자 메시지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 야
▷ 잘하고 있냐
▶ 이ㅣㅓ눼ᅟᅮᇁㅅㅓㅆ
▷ 뭐라는 거야 미친년이
▷ 하여튼 오늘은 갈 데까지 가는 거야
▷ 문 잠갔다 집에 들어올 생각하지 마라
▷ 참고로 니 어차피 집에 못 들어옴
▷ 아까 내가 가방서 열쇠 빼놨거든
▷ 그리고 난 오늘 외박임 ㅅㄱ
문자를 보낸 친구는 룸메이트 폴리 보일.
둘이서 계획적인 밀담을 주고받은 모양이군.
“…….”
혹시나 싶어 가방을 열었다. 리타 스몰필드의 가방에는 정말로 열쇠가 없었다. 다만 콘돔은 있었다.
“하아…….”
유진은 한숨을 지었다.
선택지가 없기는 했다.
“기사님, 저기. 죄송한데요.”
뭐, 괜찮겠지.
아무 일도 없을 거다.
“7구역 에덴 파크 모텔로 가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