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186화 (186/201)

186화. The Next Day (2)

“주말에 식사, 요……?”

“예. 지인이 예약해 둔 레스토랑이 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간다는 모양이더라고요. 거기가 워낙 유명한 데라 예약 경쟁이 빡세서, 취소하기 아깝다고 저한테 같이 갈 사람 있으면 자기 대신 가라고 해서요.”

어째서일까.

고작 식사 권유에 이리도 긴장을 하다니.

같이 밥을 먹는 것 자체는 예사로운 일이었다. 인턴사원 헬렌이 들어오기 전까지 사무실 식구는 사실상 유진과 그녀뿐이었기에. 점심 식사는 꽤 예전부터 둘이 함께 먹는 것이 일상적인 루틴이었다.

그치만―

“어떠세요? 스몰필드 씨?”

그치만 지금 이거는.

아무리 봐도 그거잖아.

“아, 저어, 저는…….”

주말에 따로 만난다니,

완전히 데이트 권유잖아!

“토요일 저녁 타임인데 괜찮으실까요?”

“에, 그게…….”

“별로 안 내키시면 어쩔 수 없지만요.”

리타 스몰필드는 한동안 어버버했다.

입을 벌렸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가, 갈게요!”

그 말을 하려고 했던 거였나.

모르겠다. 그냥 막 튀어나왔다.

“갈게요!”

어쨌든 굳이 두 번 말할 정도로.

용기 내서 힘껏 던진 한마디였다.

***

“……대충 그렇게 된 거야.”

늦은 저녁의 아파트 거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리타 스몰필드는 룸메이트 폴리 보일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몽땅 털어놓았다.

“쯧, 난 또 뭐라고. 하루 종일 헤벌쭉해 있길래 드디어 사귀기 시작한 줄 알았네. 야, 겨우 밥 한 끼 가지고 난리냐? 평소에도 점심 같이 먹는다며?”

“그, 그치만, 주말에 따로 만난 적은 없단 말이야! 이거 완전 데, 데이트잖아! 나 어떡해……!”

“뭘 빨개지고 있어. 중학생이냐.”

“그리고, 심지어는 있지, 밥 먹자고 한 그 바로 다음 날이, 내 생일이라구! 봐봐, 이거 우연 아니지? 그치? 뭔가 미리 알고서 그런 거 아니야? 일부러 내 생일에 서프라이즈로 뭔가 팍! 하고 안겨 주려고, 예를 들면, 그래! 고백! 프러포즈 같은!!”

“그럴 거면 일요일에 만나자 했겠지. 애초에 그놈이 니 생일을 어떻게 아는데? 알려준 적 있어?”

“내, 내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 이력서라든가, 그런 거 보면 생년월일 같은 거 다 쓰여 있잖아?”

“야 이 등신아, 니가 그놈보다 먼저 입사했다며. 근데 그놈이 니 이력서를 대체 어떻게 보냐?”

“아…….”

“행복회로 왕창 돌리자면 그놈도 너를 좋아해 가지고 너 몰래 니 생일을 알아냈다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는데, 지금 상황에 그럴 리가 있겠냐고.”

폴리 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옛날에 그 팀장이란 놈이 어디 호텔 뷔페 데려간 적 있었다며. 본사에서 깽판 치는 것 좀 도와 달라면서.”

“으응.”

“그때 너한테 비싼 밥 먹였던 것도, 결국 너를 이용하려고 그랬던 거 아니야. 이번에도 그런 거면 어쩔 건데?”

리타 스몰필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확실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기보다도 상대가 유진이니 그쪽이 좀 더 신빙성이 있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난 그놈 별로 맘에 안 들어. 그런 놈은 평소에 남 배려하고 챙겨주는 것처럼 보여도 그게 다 자기한테 이득으로 돌아오니까 그러는 거야.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이기적인 거지.”

“…….”

“게다가, 바로 옆에 지 좋다고 이렇게 대놓고 티 내는 애가 있는데 모르는 척하는 것도 역겹잖아.”

말은 그렇게 했으나, 폴리 보일― 알리시아 벨카폴리아는 알고 있었다. 리타 스몰필드를 향한 유진의 행동이 단순한 어장 관리 따위가 아니란 것을.

유진의 진짜 정체는 암귀 카이트.

최근 1년 동안에 사람들 입에서 가장 자주 오르락내리락한 시에라시티 뒷세계의 거물 악당이다.

리타 스몰필드와의 관계를 지금보다 더 깊게 만들려 하지 않는 것은, 자기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자신과 연관되어 험한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몇 번이고 말하겠지만. 난 그놈이 싫어.”

아마도. 그는 정말로 좋은 사람일 것이다.

그렇기에 리타 스몰필드와는 어울리게 하고 싶지 않다. 제일 친한 친구이자 하나뿐인 가족이, 어떤 식으로든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는 어떤데?”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일 뿐.

당사자의 마음이 어떨지는 미지수다.

“나는…….”

우물쭈물하던 끝에.

리타 스몰필드는 말했다.

“팀장님이 좋아.”

지금 이대로도 행복한 듯이.

그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면서.

“그냥. 그거면 된 것 같아.”

이제 툴툴대는 말에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 대관절 무어라 하리오.

“에휴, 답도 없는 낭만쟁이구만.”

폴리 보일은 다시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손뼉을 짝 소리가 나도록 쳤다.

“오케이. 쓸데없는 잡담은 여기까지. 리타 이등병은 지금부터 전투태세에 돌입하도록 합니다.”

“저, 전투태세……?”

“물론. 싸움을 걸어왔으면 이쪽도 제대로 맞짱에 임해줘야 하는 게 당연지사니까. 설마 밥만 먹고 쫑낼 생각은 아니잖아? 밥 다 먹고 나면…….”

폴리 보일은 씩 웃었다.

“그놈을 먹어야지.”

리타 스몰필드의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

토요일 오후 8시.

이스트포레스트 7구역.

하얀 입김이 살짝 불어져 나오는 12월의 밤.

북적이는 인파가 오가는 거리의 가로등 아래서, 유진은 까만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팀장님!”

그때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늦어서 죄송해요, 오다가 길을 헤매서…….”

“아녜요. 예약 시간까진 아직 남았는걸요.”

저만치서 헐레벌떡 뛰어와 숨찬 소리로 말하는 리타 스몰필드를 유진은 상냥한 미소로 맞이했다. 곧 그의 눈길이 다가온 그녀의 전신을 훑었다.

사랑스럽게 웨이브 진 황갈색 머리.

평소보다 좀 더 힘을 준 귀여운 화장.

롱코트 사이로 검은 스타킹에 감싸인 허벅지 밑 부분을 자신만만하게 드러낸 니트 원피스 복장.

“예쁘게 하고 오셨네요.”

“아, 아하하…….”

리타 스몰필드는 부끄러워 웃기만 했다.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어쨌거나 성공이었다. 오늘 낮에 폴리 보일이랑 같이 미용실에 백화점에 하루 종일 미친 듯이 돌아다닌 보람이 있구나.

“가게는 요 앞이니까 바로 들어가죠.”

“아, 네.”

유진이 앞장섰고, 리타 스몰필드가 그의 뒤를 쫓았다. 잠깐의 망설임 뒤에, 그녀는 용기를 내어 한 발짝 더 앞으로 움직여 그의 옆에 비스듬히 섰다.

“어서 오십시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유진 연입니다. Y로 시작하는 유진이요.”

“두 분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이쪽입니다.”

두 사람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레스토랑 안쪽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오라에 리타 스몰필드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저희 레스토랑을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 저녁은 두 가지 코스가 준비되어 있으며…….”

자리에 앉자, 웨이터는 긴 사족을 곁들여 가며 메뉴를 설명했다. 살짝 패닉에 빠진 리타 스몰필드와 달리 유진은 능숙하게 와인 주문까지 마쳤다.

리타 스몰필드는 크리스털 잔에 담긴 탄산수를 홀짝이며 가게 내부를 구경했다. 미니멀리즘하면서도 풍성한 인테리어에서 모던한 부르주아 감각이 느껴졌다. 앉아 있는 손님들도 모두 부자처럼 보였다.

“이, 이런 데 자주 오시나 봐요……?”

“그렇지도 않아요. 딱히 같이 올 사람도 없고요. 스몰필드 씨는 파인 다이닝 느낌은 별로 안 좋아하시나요?”

“아, 아뇨! 저는 이런 데 와보고 싶어도 와볼 일이 없거든요. 저도 뭐 같이 올 사람도 없고, 어, 저번에 그 팀장님 친척 아이, 아리엘이었나? 그 애랑 셋이 갔던 그 프렌치 가게도 진짜 좋았어요.”

“그랬군요.”

“저기, 아리엘은 잘 지내죠? 다음에 또 놀자고 했는데, 그날 이후로 못 만났네요. 저는 진심이니까 나중에 팀장님 시간 되실 때 한번 물어봐 주세요.”

유진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웃어 보였다.

잠시 후, 웰컴 푸드가 나왔다. 아뮤즈 부쉬라 하여 전채 요리에 앞서 나오는 한입거리들이었다.

손가락만 한 크기의 조그마한 과자들은 마치 예쁜 장난감 같아 먹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맛있다.”

먹어본 적 없는 맛. 허나 묘하게 익숙한 맛.

비가 그친 뒤 도시의 하늘에 나타난 무지개처럼, 가끔씩 겪는 일상 속의 비일상 같은 맛이었다.

“우와,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봐요!”

“다행이네요. 양이 적어서 싫어할 줄 알았어요.”

“으으음, 조금씩밖에 안 나오는 건 아쉽기는 한데, 그래도 그걸 상쇄할 만큼 맛이 만족스러우니까 괜찮아요! 나중에 라면 끓여 먹으면 돼요!”

리타 스몰필드의 표정이 밝아졌다. 맛있는 게 입안에 들어가자 긴장 따위는 금세 스르륵 녹아내렸다. 어느새 그녀는 맛의 향락에 푹 빠지게 되었다.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은 채.

“스몰필드 씨.”

두 번째 전채 요리를 거의 다 먹었을 무렵.

행복한 얼굴로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는 그녀에게, 문득 유진이 말을 붙였다.

“회사 다니는 건 어때요? 다닐 만한가요?”

난데없이 던져진 질문.

리타 스몰필드는 갸우뚱했다.

“어, 글쎄요…….”

“근무에 있어 불편한 부분은 없나요? 환경이라든가. 조건이라든가. 종합적인 대우 면에서요.”

“아뇨, 뭐, 특별히 불만 같은 건 없는데요.”

“그렇습니까.”

고개는 여전히 갸우뚱한 채였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걸까.

“오늘은요. 스몰필드 씨한테 드릴 게 있어요.”

“네?”

“선물이라고 해야 하나. 뭐 일단 그런 건데요.”

……선물이라니? 혹시 생일 선물인가?

……내일이 생일인 걸 알고 있었다고?

그때. 웨이터가 유진의 가방을 들고 왔다.

유진은 자연스럽게 그걸 건네받았다. 그는 가방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하얀 포장지로 감싸져 빨간 리본이 묶인 정사각형 모양의 선물 상자였다.

‘잠깐만.’

포장된 상자의 사이즈는 대략.

손바닥만 한 정도의 작은 크기.

‘뭐야, 이거.’

크기와 모양만 본다면 딱.

반지 하나가 들어갈 것 같다.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뭐야!’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잖아.

“조금 부끄럽지만, 저는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개인적으로 문제가 좀 많았어요. 낙하산이기도 했고, 적응하기도 어려워서, 괜히 스몰필드 씨한테도 막 까칠하게 굴고 그랬던 것 같아요.”

“…….”

“죄송하고 또 감사하고 있어요. 스몰필드 씨가 없었으면 저희 회사는 애저녁에 무너졌을 거예요. 저도 그렇고요. 그러니까 스몰필드 씨는 우리 회사에, 그리고 저한테 꼭 필요한 사람이라 생각해요.”

아니야. 이건 분명 착각이야.

그냥 그렇게 들릴 뿐인 거라고.

“스몰필드 씨. 듣고 계신가요?”

“ㄴ, 녮!”

“저는 말이죠. 앞으로도 스몰필드 씨랑, 가능한 한 오래오래, 계속 옆에서 이렇게 함께하고 싶어요.”

….

….

착각이지?

그런 거겠지?

“스몰필드 씨.”

리타 스몰필드는 입을 꽉 물었다.

심장이 두근대서 터져 버릴 듯했다.

마침내―

유진이 입을 열었다.

“정규직 전환을 축하드려요!”

시팔.

그럼 그렇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