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The Next Day (1)
월요일 오전.
<윌슨앤코 사무실>.
“좋은 아침입니다. 사장님.”
“오오, 유진 군! 오랜만이구만!”
“예. 금일부로 업무 복귀했습니다.”
“자네 어떻게, 컨디션은 좀 회복됐나?”
“배려해 주신 덕분에 요 며칠 잘 쉬었습니다.”
“그래, 그래. 될 수 있으면 앞으로도 일 좀 쉬엄쉬엄 쉬어 가면서 하게나. 자넨 우리 회사의 대들보니깐. 대들보가 무너지면 회사가 무너지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윌슨앤코> 대표로서 아주 올바른 자세로군!”
“저희 회사 대표는 사장님이신데요.”
“아냐, 그런 중책은 나한테 안 어울려.”
길었던 휴가가 끝이 났다.
실제로 휴식을 가진 기간은 보름 정도였지만, 체감상으로는 거의 석 달쯤 회사를 쉰 기분이었다.
미르각시에게 훈련을 받는 동안은 그녀 거처에 있는 결계 안에서 지냈는데, 그곳은 시간의 흐름이 바깥보다 느렸다. 더욱이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라는 말도 안 되는 체험까지 하고 온 터라, 어째 최근 들어 시간 감각이 좀 흐리멍덩해지기는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스몰필드 씨.”
“앗, 팀장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전에요. 사장님한테 먼저 인사드리고 왔어요. 스몰필드 씨는 오늘도 일찍 출근하셨네요.”
“네에. 어제 대충 마무리하고 간 게 좀 있어서요. 메일 보내기 전에 다시 한번 확인하려구요.”
“그렇군요. 인턴 친구는 정시 되면 오겠죠?”
“어, 그게, 헬렌 씨가 사실, 요즘 팀장님 안 계신다고 가끔 쪼끔씩 지각하고 있기는 한데요…….”
“확인했습니다. 고마워요, 스몰필드 씨.”
“아뇨, 그, 딱히 고자질하려는 건 아니고…….”
“일단 급한 일 다 마치고 나면 최근 업무 진척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보고 좀 부탁드릴게요.”
“아, 넵.”
“그리고 또, 이따 신입 사원 한 명 올 거니까, 친하게 지낼 준비해 두시고요.”
“네? 신입이요?”
회사에 나오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출결의서라거나, 아니면 세금계산서라거나, 이런 일상적인 걱정거리들에 파묻혀 있다 보면, 잠시나마 평범하게 살아가는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이쪽은 체스터 브리즈. 단기 아르바이트로 간단한 서류 작업이나 사내 서무를 도와줄 겁니다.”
“아, 안녕핫, 앗, 안녕하십니깟, 체스터입니다! 그게, 어, 그, 자, 자자, 잘 부탁드립, 니다…….”
“오올. 이 몸 드디어 막내 탈출?”
“필수 교육은 스몰필드 씨가 해 주시고, 그 외에 자잘한 것들은 헬렌이 챙겨 줘요. 옆자리니까.”
“제가 사수인 거죠? 후후후, 걱정일랑 붙들어 매세요, 아주 확실하게 교육시켜 놓을 테니! 어이, 알바야! 이 누나만 믿고 따라 와!”
“헬렌, 나대지 말고 출근 카드나 갖고 와요.”
“어엥? 왜여?”
“왜긴 왜야. 지각 체크하고 시급에서 뺄라 그러지.”
“꼑.”
이제는 우리 사무실도 꽤 북적거리게 됐다.
사무실은 초라해도 사람들이 오가고 말 섞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회사’라는 느낌이다.
「주인님.」
“오, 타이퍼. 충전 다 끝났어?”
「아니요. 시스템 점검 중이었습니다. 파워 시스템을 교체하여 마나공명축퇴압 기반 하이브리드 전지를 장착하게 된 후로는 일반 EV 규격에 30분 충전만으로 3000시간 이상 사용이 가능합니다.」
“그러냐. 되게 편리해졌네.”
「맞습니다. 저는 이제 조루가 아닙니다.」
“아, 그래. 축하한다…….”
「주인님. 방금 그 표현은 유머였습니다.」
“뭐?”
「저는 생식 기관이 달려 있지 않기 때문에 조루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조루라는 표현은 배터리 용량과 관련되어 은유적인 해학성을 지닙니다.」
“어…….”
「웃음이 발생하기를 유도한 것입니다만. 주인님께서는 웃지 않으셨습니다.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혹시 유머의 방향성이 적절하지 않았던 것입니까?」
“글쎄다, 헛웃음까진 나올 만한데…….”
「죄송합니다. 주인님의 기운을 북돋아 드리기 위해 유머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것 같습니다.」
“내가 그렇게 힘이 없어 보였냐?”
「예. 발기 부전처럼 보였습니다.」
“……너 왜 아까부터 자꾸 그렇게 민망한 단어만 쓰는 거야?”
「저 같은 무표정 금발 미소녀 메이드 로봇이 안 어울리게 천박한 단어를 사용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수요가 높은 유머라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왜 그런 부분만 날카로운 건데.”
어쨌거나―
나는 이 일상을 지키고 싶다.
바쁘고. 힘들고. 지치고. 멍해지는.
별 볼 일 하나 없는 나의 소중한 일상.
“스몰필드 씨, 패킹리스트는요?”
“아, 네. 지금 거의 다 끝나 가요.”
“알겠어요. 이따 와서 체크할게요.”
나는 오늘도 살아남아야 한다.
이 하찮은 일상을 지키기 위해.
살기 위해.
죽을 각오로―.
“그럼, 출장 다녀오겠습니다.”
***
이스트포레스트 9구역.
샌제이비어 국립마법대학교.
“오셨군요. 유진 연 씨.”
<나인서클>의 제6원 ‘시간의 마도사’ 제퍼슨 브리즈가 교수실에서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동생을 취직시켜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그냥 낙하산으로 알바 자리 하나 꽂아줬을 뿐입니다. 저희도 인력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사회생활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녀석인지라, 고생 좀 하시겠지만 부디 잘 챙겨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머리는 비상하니 시키면 뭐든 잘할 거예요.”
불과 며칠 전 이 젊은 대마법사가 나를 진심으로 죽이려고 했던 시기가 잠깐 있었으나, 쿨한 우리들은 그런 사소한 해프닝 따윈 잊어버리기로 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알고 있습니다. <시간 역행> 결계 말씀이시죠. <윌슨앤코> 주변은 물론, 사원 분들의 각 거주지까지 결계 영역을 충분히 확장시켜 놓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안심이 좀 되겠네요.”
왜냐하면―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나인서클> 쪽 상황은 어떤가요?”
“솔직히 그리 좋지만은 않습니다. 다들 판단을 유보하고 있어요. 뭐 아무래도, 일원끼리의 직접적 충돌과 더불어 민간을 대상으로 한 테러까지 일어난 것은 <나인서클> 역사상 초유의 사태니까요.”
<나인서클>의 제2원. ‘청룡’ 미르각시.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절대적 존재였던 드래곤이 습격을 당했다. 범인은 같은 <나인서클>의 제7원. ‘라스트 오우거’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이었다.
“그리고 제4원 콘스탄틴 역시 그녀의 진영에 있었죠. 아무래도 그 둘은 이번 사건을 일으키면서 그 사실을 숨길 생각조차도 없었던 듯하군요.”
“놈들은 회의 때 모습을 드러냈나요?”
“그럴 리가요. 둘 다 불참했습니다. 각시님도 공식적으로 실종 상태에 있어서, 그날 이후 회의에는 저를 포함해 4명밖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제대로 된 논의가 이루어졌을 리 만무했죠.”
일단 제퍼슨 브리즈는 미르각시의 편. 제5원 알리시아 벨카폴리아도 이쪽의 사정을 대충 알고 있으니 바르베이라에게 책임을 묻자는 쪽에 섰을 터.
다만 제8원 구로사와 미호의 경우, 바르베이라의 산하에 있는 대형 군사기업 <카이젠>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솔직한 의견을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인서클>의 의장인 제3원 귄터 사지타리우스는 강경파에 가깝지만 행동 방향은 보수적.
미르각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섣불리 일을 키우고 싶지는 않았을 테지.
“결국 근 2주 동안 다섯 번의 긴급 회의를 거쳤지만, 그동안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러다 내년까지 끌고 가겠네요.”
“바르베이라는 틀림없이 그전에 다시 또 일을 저지를 겁니다. 차별적인 말이지만, 예전부터 마족들이란 항상 그래 왔지 않습니까. 그들은 싸움에 미쳐 있습니다. 팔다리 중 어느 한쪽이라도 붙어 있는 한 몇 번이고 미친 것처럼 전쟁을 걸어 오죠. 죽음의 굴레를 멈추려면, 죽이는 수밖엔 없습니다.”
나는 제퍼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은 게임 스토리에서도 독보적인 악역 캐릭터로 취급된다. 특히 메인 시나리오 후반부에 시작되는 ‘마왕의 후예’ 에피소드가 그녀의 잔혹성과 위험성을 매우 잘 보여주기로 유명하다.
“어떻게 생각해? 화면 너머에서 건너온 너는.”
….
….
문득.
꿈속의 일이 떠올랐다.
“유진 연 씨? 왜 그러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처음부터 ‘유진 연’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과거의 기억은 떠오른 적이 거의 없다. 설마 애초부터 그 기억 자체가 가짜였던 걸까.
뭐, 지금은 상관없는 일이다.
진짜든 가짜든. 중요치 않으니까.
“아무튼, 당장은 각시님의 건강 회복을 최우선으로 하되,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야만 합니다.”
“그렇겠죠.”
“계획은 있습니까?”
12월.
게임 스토리 상으로는 아직 ‘마왕의 후예’ 에피소드가 시작되기 전. 6개월 정도 유예가 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곧 시작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처음에는 그동안 내가 벌였던 행동들이 이 세계의 원래 흐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당면한 모든 것은 그 나비 효과로 벌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최근에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확실히 내가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허나 도시 전체의 안위가 요동칠 정도의 이 지대한 변혁은 나 혼자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내가 진짜 암귀였다고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가 있다.
음흉한 날갯짓으로 세계의 흐름을 망치고 있는. 다른 한 마리의 나비가. 분명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리고 확신은 못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계획은 있습니다.”
***
월요일 오후 7시.
<윌슨앤코> 사무실.
“끄으응. 다 했다아.”
저녁, 홀로 자리에 남아 잔업을 하고 있던 리타 스몰필드가 드디어 일을 끝냈는지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오랜만에 꽤 바빴다. 유진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그녀는 꼼짝없이 밤까지 야근할 뻔했다.
“수고했어요. 스몰필드 씨.”
그때.
반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팀장님? 퇴근 안 하셨어요?”
“출장 갔다 왔죠. 일할 거 딱 조금 남았는데 괜히 남겨 놓고 그대로 집에 가기도 뭐해서요.”
유진은 싱긋 웃어 보이며 리타 스몰필드에게 뭔가를 건넸다. 그녀가 좋아하는 레몬 맛 알사탕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고생 많았어요. 이제 퇴근하실 거죠?”
“네. 팀장님은요?”
“말했다시피 일거리가 남아 가지고, 저는 한두 시간만 더 있다 가려고요. 먼저 들어가 보세요.”
“…….”
리타 스몰필드는 잠시 망설였다.
망설이다가, 큰맘 먹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도 남을게요.”
“예?”
“저도 아직 남았거든요. 일할 거.”
그녀는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오랜만에 만난 거니까.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었다. 그 맘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자발적 야근이 시작됐다.
“스몰필드 씨.”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유진이 불현듯 말을 걸었다.
“이번 주말에 시간 되세요?”
리타 스몰필드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곧 진정하고서 차분해졌다.
―아아, 또 이 패턴인가.
하여간에 저 착각하게 만드는 대사.
일부러 그러는 건지. 이젠 익숙하다.
“네에. 토요일 일요일 완전 비어 있어요.”
보나 마나 주말 출근 권유겠지. 아까 전에 갔던 출장지에서 일거리를 잔뜩 안아온 모양이다.
뭐, 상관없었다. 어차피 주말에 할 일도 없었고. 월급쟁이 인생이 이런 법이지. 일하다 죽자. 죽어.
“그럼.”
유진이 말했다.
“같이 식사하러 가실래요?”
리타 스몰필드는 눈을 끔뻑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