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Light My Fire (2)
공간의 틈새에, 미약한 떨림이 있었다.
그것은 쉴 새 없이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떨어진 작은 물방울 하나가 일으킨 잔물결.
“호오.”
허나 미르각시는 그 변화를 확실히 느꼈다.
실로 하찮은 반향이었으나 명명백백한 뒤틀림. 이는 곧 결계의 국소적인 붕괴를 암시하는 신호였다.
―침입자가 있다.
둥지의 결계를 이루는 술식망이 훼손된 상태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누군가가 아주 대놓고 앞문을 박차고 이 드래곤의 처소에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당돌한지고.”
이런 망나니짓을 겪는 건,
을미사변 이후로 처음인가.
미르각시는 공간의 결계를 모두 해제시켰다.
그러자 주변을 감싸고 있던 검은 빛이 깨진 유리마냥 산산조각 나며 이내 현실의 모습이 드러났다.
<메이슨 타워> 약 100층 지점.
고층 호텔의 이그제큐티브 라운지.
“거기. 썩 나오지 못할까.”
미르각시가 으름장 놓듯이 말하자, 시에라시티의 야경이 한눈에 비추어 보이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테라스 쪽에서, 자그마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끼릭. 끼릭―.
그림자의 정체는…… 로봇 장난감이었다.
책가방 크기만 한 로봇의 몸체는 도대체 뭐라고 쓰였는지 모를 기괴한 필체의 낙서로 가득했다.
다만 미르각시는 그 낙서가 뭔지 알고 있었다.
아득히 먼 옛적에 존재했던 고대 마족의 문자. 한때 ‘마왕’이라 불렸던 이가 사용했던 사탄의 알파벳.
‘저주받은 룬의 언어.’
그것의 마지막 계승자는 분명히,
‘라스트 오우거’라 불리운 한 계집.
“네놈 짓이렷다. 테르마옌의 찌꺼기.”
<나인서클>의 제7원. 바르베이라 테르마옌.
현대에 살아남은 최후의 마족이자 마왕의 후손.
「정답이야. 다 뒤져가는 도마뱀 화석 씨.」
장난감 로봇은 끼릭거리는 소리를 내며 느슨하게 움직였다. 마치 눈앞에 있는 미르각시를 이유 없이 골려주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남의 집에 흙발로 기어들어 온 것도 모자라 반말지거리라니, 불청객치고도 경우가 지나치구나.”
「무례해서 미안하네. 남한테 좆같이 구는 거는 마족이란 것들 종특이라 어쩔 수가 없어―.」
“그런가? 이상하군. 너희 조상들은 내게 좀 더 예의를 갖췄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지.”
「그야 뭐 그치들은 당신한테 좆발렸으니까.」
“네놈은 좆발리지 않을 것처럼 말하는군.”
「당연하지. 난 그쪽을 조지러 왔거든요.」
로봇이 그렇게 말한 바로 그 직후.
미르각시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하.”
감정의 기복이 드러나지 않는, 순수한 분노.
실제 거기에 있지 않은 바르베이라 테르마옌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 분노의 깊이는 요연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웃어넘겼을 것이다.”
「…….」
“시답잖긴 해도 꽤나 재미있는 농이지 않느냐. 나를 조지겠다 어쩐다 하는 소리를 들어본 것도 벌써 이백몇 년 전의 얘기다. 평소에 그 말을 들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아마 배꼽이 빠져라 웃고 있었을 테지. 성이 나기는커녕 오히려 기분만 좋아졌을 거다.”
진노한 용의 음성에는 탄식이 섞여 있었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어리석은 필멸자를 향한 가증 어린 탄식이.
“네놈은 내가 한창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동안에 들이닥쳐 나를 우롱하고 내 유희를 방해했다.”
“그 죗값의 십분의 일을 치르기에도 네놈의 목숨 따윈 앞으로 열댓 개를 가져온들 턱없이 부족하다.”
“스무 번 죽여 마땅한 네놈을 이 나는 과히 자비롭게도 단 한 번의 죽음으로써 사하여 주겠노니.”
짧은 연설에 가까운 용의 목소리를 듣는 와중에,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천성의 명제에 걸고서.”
―지금. 드래곤을 빡돌게 했다는 사실을.
“네놈을 공멸攻滅하리라.”
공기가 멈췄다.
얼어붙은 것처럼.
‘온다.’
용의 화풀이가 시작되기 직전이다. 장난감 로봇이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둘러 관절을 움직였다.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자, 드래곤을 말살시키기 위한 계획의 첫 단계는 바로…….
….
….
어라.
뭐였지.
“내가 용서치 못하는 부분은.”
사고가 멈췄다. 얼어붙은 것처럼.
마치 누군가 뇌의 퓨즈를 내린 듯했다.
“하잘것없이 옹졸한 네놈의 수법이다.”
미르각시는 성큼성큼 로봇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손을 뻗어 로봇을 꽉 움켜쥐었다. 살짝 쥔 악력만으로 금속제 몸체가 콰직 하고 찌그러졌다.
“내 앞에 제 발로 직접 찾아오는 것이 두려워 고작 이따위 사념체 형태로 잠입한 주제에, 당최 어언 안전이라고 이리도 혓바닥이 긴 게란 말인가.”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은 자신의 사고가 일시적으로 정지한 이유는, 분명히 지금 미르각시가 어떤 강력한 정신 계열의 마법을 구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알게 되었다.
자신은 그저 겁에 질려 뇌가 굳었다는 것을.
“여기 없다면 안전할 것 같았느냐.”
장난감 로봇의 눈 너머로 마주 본 미르각시의 눈동자가,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의 심상을 꿰뚫었다.
숨이 덜컥 막혔다. 눈앞에서 멱살을 붙잡힌 기분이었다. 허나 물론 실제로 그리될 리는 없었다.
그리될 리는,
없었을 터인데…….
“어디. 네놈 얼굴 좀 보자꾸나.”
미르각시의 안광이 붉게 빛나며,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을 노려봤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어두컴컴한 방에서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은,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이 자기 얼굴을 사방팔방에서 짓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
….
그것은 손가락이었다.
무수히 많은 검은 손가락.
“어?”
모니터 속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손가락들이,
그녀의 얼굴을 파리지옥처럼 꽉 잡아 눌렀다.
“어으, 으어어아아?!”
그녀는 그대로 화면 속에 빨려 들어갔다.
저항하려는 노력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쿠웅―!
곧 바닥에 머리부터 내동댕이쳐졌다.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은 목을 부여잡고 캑캑댔다. 목에는 꽉 눌린 손가락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맞대면은 오랜만이구나. 테르마옌의 찌꺼기.”
갑작스러운 상황에 도통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던 그녀를, 청룡 미르각시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흑사자의 갈기처럼 검고 무성한 머리털. 짐승 같은 다리와 꼬리. 전형적인 반인반수의 육체.
인간도 수인종도 아닌.
도깨비 괴물. 오우거Ogre.
“<나인서클> 일원끼리의 분쟁은 금지되어 있을 텐데, 찌꺼기 주제에 제법 맹랑하게도 일을 벌였군.”
“…….”
“네놈이 무얼 하자고 이런 짓거리를 행한 것인지는 궁금하지 않다. 따지고 들어봤자 시간만 아깝지.”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이 분명한 드래곤의 면전에서,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은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이윽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죽음이 코앞에 있었지만, 그녀는 죽을 정도로 침착했다.
……진정해. 이건 실제가 아니야.
……술식 매개조차 없는 이런 강제적 소환술은 제아무리 미르각시라 해도 불가능해. 단순히 사념체를 끄집어내 나에게 환각을 걸어 현혹시키고 있을 뿐.
“자, 그럼. 어떻게 죽여줄꼬.”
아아, 깨닫고 나니.
왠지 웃음이 나온다.
“븅신.”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은 픽 하고 소리 내 웃었다.
그러고 나서는 미르각시를 째진 눈으로 흘겨봤다.
“죽는 건 너야. 썩을 도마뱀 년아.”
그녀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드래곤을 말살시키기 위한 계획.
“널 위해 준비한 선물이다. 곱게 쳐 받아.”
그 계획의 첫 단계는 바로,
지대하고 장엄한 폭발이었다.
***
콰광. 쿠구구구궁―!
건물 바닥을 타고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가까운 곳의 어디선가 폭발이 일어난 듯했다.
“……뭐지……?”
지하라서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폭발이 일어난 방향은 위쪽. <메이슨 타워>의 상층부.
아마도 미르각시가 있는 위치에서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 지금으로선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사실―
내 목숨 간주하기도 버거웠다.
“한눈파네. 새끼가.”
칼날이 내 목 근처를 스쳤다.
피부가 찢겨지며 가느다란 핏줄기가 튀어 올랐다. 1cm만 깊었어도 목젖이 반으로 갈라졌을 터였다.
“큭!”
태세를 정비하고 있을 틈조차 없었다.
후두부를 노렸던 매서운 찌르기 이후, 다시금 도그아이드 킴의 연격이 수도 없이 내게 날아들었다.
빠른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다.
일일이 피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
나는 오른손을 뻗었다. 그다음 곧바로 날린 <폭렬파>의 반동으로 몸을 뒤쪽으로 튕겨내 개눈깔과의 거리를 벌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을 할 틈 따윈 없었다. 전부 거의 척수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몸을 피하기 위해 날린 <폭렬파>는 동시에 반격으로서의 의미도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었지만, 도그아이드 킴은 당연한 것처럼 상처 하나 없어 보였다. 나름대로 풀 파워에 가까운 공격이었음에도 말이다.
“이봐요, 할배. 꼭 이래야겠어요……?”
“난 기회를 줬어. 네가 자초한 일이지.”
“할배 목적은 무라사메를 뽑는 거였잖아요. 어찌 된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원하는 걸 이뤘으니까 이제 된 거 아녜요? 왜 미르각시를 죽이려 하는 겁니까?”
“약속을 지키러 왔을 뿐이라고 말했잖나.”
“그 약속이라는 게, 설마…….”
“어떤 해골빠가지 녀석이 내게 제안하더군. 이 검을 뽑게 해줄 테니, 드래곤을 죽여 달라고 말이야.”
해골빠가지란 건, 기계해골 콘스탄틴인가.
그렇다면 배후에는 당연히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이 있겠군. 김씨 할배를 꼬드긴 것도 그 녀석이겠지.
“혹시나 싶어 오케이 해봤더니, 정말로 녀석이 칼을 뽑아줬어. 어떤 수상쩍은 기계에 넣고 잠깐 두니까, 10초도 안 돼서 칼날이 칼집 속에서 뿅 하고 튀어나왔지. 무슨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린 팝콘처럼.”
“…….”
“웃기지도 않았어. 그때 그 빌어먹을 도공의 말만 믿고 일평생을 바쳤는데……. 도대체 난 지금껏 뭘 한 거냔 말이야. 실은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는데.”
도그아이드 킴의 말투는 사뭇 진지했다.
평소에 내뱉던 엉터리 짬뽕 사투리 따위는 없었다. 그곳에는 그저 공허한 감상에 빠진, 상복 같은 검은 도복을 차려입은 늙은 검객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딱 하나뿐이야. 이 칼, 무라사메로 무엇까지 벨 수 있는가. 확인하는 것.”
“그래서 드래곤을 베려고 하는 겁니까.”
“내 손으로 직접 ‘최강’을 썰어 버렸다고 하면, 어디 가서 끝내주는 삶이었다 할 수 있을 테니까.”
“거, 말년에 기분 좋은 추억 하나 만들겠답시고 나대시는 꼴이 그리 썩 보기 좋지는 않습니다만.”
개눈깔이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입을 연 직후.
검을 휘둘렀다.
“넌 나한테 왈가왈부할 수준이 못 돼.”
나와의 거리는 한참 벌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칼날은 내 코앞에 있었다.
서걱―.
보이지 않는 칼날에,
신체의 어딘가가 베였다.
….
….
어라. 이거.
꽤 깊은 것 같은데.
“봐주는 건 끝났다.”
호흡을 하기가 어려웠다.
내장이 쏟아진 느낌이었다.
“아직 살아있냐? 장하군.”
의식이 몽롱해졌다.
1초도 버티기 어려웠다.
“10초 버티면. 칭찬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