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The Devil In I (4)
“수고했다.”
문득 정신을 차린 순간.
나는 소파에 앉아있었다.
19세기 유럽풍의 응접실 같은 아늑한 방 안에 놓인 손님용 소파. 무릎 앞의 티 테이블에는 찻잔과 다과가 준비돼 있었고, 그 건너편의 1인용 소파에 고풍스러운 한복 차림의 미르각시가 있었다.
“3일 차에 스테이지 1 클리어라니, 예상보다 상당히 빠르구나. 솔직히 일주일 정도는 걸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커리큘럼을 약간 수정해야겠어.”
“…….”
“뭐어, 지금은 잠깐 숨 좀 돌리도록 해라.”
후릅―.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색깔로 미루어 보아 찻잔에 들어 있는 것은 아마 콜라 같았다.
“…….”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얼어붙은 정글 속에 있었거늘. 어느새 생판 다른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마치 서너 개씩 겹쳐 꾸고 있던 꿈속에서 가까스로 깨어난 직후와도 같은 나른함이 느껴졌다.
“저기, 청룡님…….”
“선생님이라고 불러라.”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 돌돌이는 괜찮은 거죠?”
“오호, 이거 참 스윗한 남자로고. 죽다 살아나자마자 제일 처음 한다는 게 아녀자 걱정인가?”
“……말도 안 되게 강력한 마법을 써 버렸잖습니까. 3일 내내 손대중으로 상대해주고 있었던 거 뻔히 아는데, 이쪽은 무슨 <스카디의 분노> 같은 걸 써서 그 친구를 냉동 치킨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후훗. 걱정 마라. 돌로레스는 아직 젖내 날 정도로 어린 아가씨긴 하지만 그래도 어엿한 용족이다. 그 정도 공격에 중상을 입을 일은 없을뿐더러, 자기 방에 노크도 없이 쳐들어와 어지럽힌 행위도 필히 바다처럼 너른 맘으로 용서해줄 것이다.”
“……그렇습니까.”
“게다가 그 아이, 그새 그대에게 정분이 든 모양이라. 다음에 마주치면 기필코 덮쳐 버리겠다고 다짐하더군. 조만간 발정기니까 조심해야 할 게야.”
미르각시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며 찻잔 속 음료를 홀짝였다. 그러고는 나를 슥 쳐다보았다.
“용언 마법은 슬슬 손에 익었는가?”
나는 고개를 앞뒤로 끄덕였다.
“어떻게 쓰는 건지 감은 좀 잡힌 것 같습니다.”
“그래?”
“처음으로 길이 보였어요. 흑마법 따위를 쓰지 않고도 제대로 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이 느낌을, 절대로 그냥 없던 걸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음음. 학생으로서 굉장히 좋은 자세구먼.”
“부탁드립니다. 제게 더 가르쳐주십시오.”
내가 진지한 태도로 그렇게 말하자,
미르각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아니? 안 가르쳐줄 건데?”
….
….
정적.
침묵이 흘렀다.
“……예에……?”
“어차피 여기서 뭘 더 가르쳐줘 봤자 소용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용언 마법을 쓸 수 없으니까.”
나는 올해 추석 연휴가 이틀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처럼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뭘 그리 놀라는가? 용언 마법이라는 건 본디 용족에게만 허락된 고유의 비술이다. 그대는 요 3일 동안 돌로레스와 서로 용언을 주고받았다 생각했겠지만, 그건 진짜 용언이 아닌 ‘용언을 흉내 냈을 뿐인 말장난’에 불과하다. 애초에 한낱 인간이 드래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으냐.”
“……그럼…….”
“그대가 쓴 용언 마법은 전부 가짜였다. 실제로는 반지에 미리 구축시켜 둔 술식이 그대의 영창에 맞추어 그때그때 알맞게 출력됐을 뿐. 반지의 도움 없이 그대 힘으로 직접 구사한 마법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지.”
“……그렇다는 건, 여태까지는 그저 단순한 ‘용언 체험’에 불과했다, 라는 겁니까…….”
한순간에 기운이 몽땅 다 빠졌다. 3일 내내 했던 그 뼈 빠지는 고생은 도대체 뭐였단 말인가.
“의미 없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나?”
한숨을 쉬는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미르각시가 넌지시 의표를 찌르고 들어왔다.
“지금 이 자리서 분명히 말하건대, 그대에게는 마법에 대한 재능이 터럭만큼도 없다. 허나 그 부분은 마법사로서 그대의 가장 큰 단점이 아니다.”
“…….”
“그대는 생각이 너무 많다. 마법을 쓰기 전에도, 쓰는 순간에도, 쓰고 난 후에도, 끊임없이 생각에 몰두하지. 무작정 이론만을 추구하다 생겨 버린 나쁜 버릇이랄까. 아무렴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게야. 마법이란 것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니거늘.”
그녀는 웃으며 말했고, 나는 의아한 와중에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자세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한번 말해 봐라. 돌로레스에게 쓴 마지막 용언 마법, 그걸 쓰면서 그대는 무슨 생각을 했지?”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머리를 비웠었지. 그 마법의 위력이 상정 이상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야구에서도 투수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타자는 아무 생각 없이 붕붕 휘둘러 대는 타입이라고 하지. 마법도 마찬가지다. 머리보다 가슴. 생각이 아닌 감각으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대가 가장 먼저 터득해야 마땅했던 덕목이니라.”
어째서일까. 예전에 타이퍼(인 척했던 스몰필드 씨)에게서 처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주인님은 너무 구조적으로 접근했습니다. 마법이란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게 아닙니다.」
「이론을 만물에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인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구조 이해보다 사물과의 교감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기계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십시오.」
사물과의 교감이라거나.
기계의 마음을 헤아리라거나.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만도 같았다.
마법은 과학적 방법론에 의거하지만 동시에 과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요술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아닌 감각. 마법 그 자체와의 교감. 두뇌 대신에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매트릭○’에서 모피○스가 네○에게 말한 대로다. ‘생각하지 말고, 알아내라.’ 그대에게 용언 마법을 체험케 한 것은 그걸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다.”
“…….”
“물론 수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말했지 않는가. 그대를 최강의 마법사로 만들어 주겠다고. 진도는 꽤 빠른 편이긴 하나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다. 모쪼록 이대로 계속 정진해 줬으면 좋겠군.”
미르각시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디, 머리는 충분히 비웠는가?”
어쩐지 알게 모르게.
사악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럼 이제, 다음 수업을 시작해 볼까―.”
그 순간.
시야가 암전됐다.
풍덩―!
문득 정신을 차린 순간.
나는 물속에 빠져 있었다.
“……?!”
갑작스러운 사태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잠수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슬슬 헤엄쳐 나와 고개를 수면 위로 내밀어 보니, 그곳은 수영장이었다. 콧속을 은근히 괴롭히는 구릿한 염소 냄새로 가득한, 넓고 평범한 실내 수영장.
“시원해 보이는구나.”
풀pool 옆에는 미르각시가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일본 만화에나 나올 법한 학교 수영복 차림이었다.
“보아하니 수영은 곧잘 하는 편인 것 같군. 뭐어, 이번 수업과는 딱히 상관은 없겠지만 말이야.”
“…….”
“일단 물 밖으로 나오려무나.”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풀장 밖까지 나왔다. 물에 푹 젖은 바지를 수영장 바닥에 대고 질질 끌면서.
“혹시 쉬는 시간이 더 필요했느냐?”
“아뇨. 괜찮습니다. 빨리 시작하시죠.”
내가 머리에 적셔진 물을 손으로 대충 털며 말하자, 미르각시는 맘에 들었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선지자의 일곱 마술’을 알고 있느냐?”
나는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세주 메시아, 곧 신의 아들이라 불린 한 선지자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일곱 종류의 고대 마법.
“그중 하나가 바로 <소생술>이죠.”
“잘 아는군.”
“제 목적이 그거니까요.”
미르각시는 따라 고개를 까딱댔다.
잊어먹지 않았다는 시늉처럼 보였다.
“그 시대에는 마법이란 개념이 희박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더러 ‘기적’이라 불렀다. 그리고 지금, 마법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 당시 메시아의 마법들은 정말로 기적에 가깝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수준이 매우 높았지.”
“…….”
“지금부터 그대는 ‘선지자의 일곱 마술’ 중 하나를 오로지 그대의 힘만으로 재현해야 하느니라.”
그녀는 손가락을 내밀어 나를 가리켰다.
“<강화>를 써서 말이지.”
그즈음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강화>를 쓴다고요……?”
“그래. <강화>를 사용한 기성 마법의 재현. 그대에게 아주 익숙한 방식이지?”
“아니, 잠깐만요. 그건, 흑마법이잖아요……?”
“그런데?”
“저한테 마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한 게, 설마 흑마법의 활용법을 가르쳐주려고 했던 겁니까?”
“맞아. 그게 뭐 잘못됐나?”
순간 벙쪄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사기라도 당한 기분인가?”
“……저는 분명, 당신에게 배운다면 언젠가 제대로 된 마법을 쓸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아하, 그랬구먼. 흑마법은 제대로 된 마법이 아니라고, 그대는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로군.”
“그러면, 제 생각이 틀린 겁니까?”
“으음, 따지기 전에 하나만 묻지. 그대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마법’의 정의는 무엇인가?”
“온전히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쓸 수 있는 마법이겠죠. 악마의 힘 따위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그대는 흑마법이 악마의 힘이라 생각하나?”
“아닙니까?”
“아니고말고.”
“왜죠?”
“악마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덜컥―.
말문이 막혔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요……?”
“들리는 그대로의 의미지. 세상에 악마 같은 건 없어. 실존하지 않는 지어낸 존재라 이 말이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실제로 악마를 보았으니까.
검은 머리와 보라색 눈을 가진 그 소녀를. 몇 번이고.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모든 흑마법 아티팩트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지. 바로 강력한 사이오닉 계통의 주술이 걸려 있다는 점이다. 흑마법사들은 저마다 ‘악마’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존재와 조우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실체는 단지 주술에 의한 환각. 아티팩트가 술사의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 만들어낸 무의식의 산물에 불과해.”
“…….”
“그대 또한 악마를 보았을진대, 혹시 그대가 아는 사람의 얼굴과 판박이로 닮아 있지 않았었나?”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미르각시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흑마법은 다른 누구의 힘도 아니야. 그대 자신의 힘이다. 적어도 그 사실만은 알고 있음 하는군.”
“…….”
“다시금 말하지만, 나는 그대를 최강의 마법사로 키워낼 생각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의심은 집어치우고 얌전히 따라오기나 해라. 오만방자한 제자 놈아.”
“……알겠습니다.”
“좋다. 그럼 지금부터.”
미르각시는 손가락으로 수영장 쪽을 가리켰다.
“물 위를 걸어 봐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