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The Devil In I (3)
나는 뻥 뚫린 활로 앞에 그대로 멈춰 섰다.
도망치는 것을 완전히 단념한 듯한 내 행동에, 회색 용 돌로레스 또한 나와 가까운 곳에서 정지했다.
「크륵―.」
돌로레스가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경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와이번은 용족답게 인간보다도 지능이 월등히 높았지만, 하필이면 드래곤의 안 좋은 부분만을 닮아 쓸데없이 자만에 빠지는 일이 잦았다.
드래곤이란 자고로 유희遊戲를 좇는 생물.
재미있어 뵈는 일에 사족을 못 쓰는 것은, 용이란 종족의 DNA에 각인된 원초적 본능인 모양일까.
「크헤헥―!」
우리의 회색 용 돌로레스 아가씨가 마치 하굣길에 떡볶이 노점을 발견한 여중생처럼 꺄르륵 미소 짓는 듯 보이는 것도, 아마도 기분 탓은 아닐 터였다.
“웃겨 죽겠지. 그치.”
노리개 취급은 매우 정당하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와이번은 세계관 내 최강의 몬스터 중 하나. 나만큼 만만한 먹잇감도 없다. 나는 녀석의 아침 식사 접시 위 계란 프라이 같은 존재다.
그리고 지금. 접시 위의 그 계란 프라이가 실로 용맹스러운 태세로 포식자와 맞서 싸우려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웃긴 상황이 도대체 어디 있겠는가.
“그래, 실컷 놀아주마.”
만약 이쪽이 이긴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기적.
본래대로라면 승부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이 일선에 미르각시가 나를 던져 놓고 방치해 둔 이유는, 내가 스스로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상 <소생술>을 익힌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
“자아.”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목전에 앞둔 지금.
나는 기적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덤벼라. 돌돌아.”
와이번이 콧김을 강하게 내불었다.
이내 뻔뻔한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Areoquix, N′tajkhe, Asludhvikc!」
용언으로 이루어진 영창을 외었다.
낯선 울림. 습득한 어휘가 아니다. 나는 그 세 개의 단어 중 어느 하나도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어떤 마법인지는 알고 있었다.
‘화염. 혹은 바위 속성의 파괴 마법.’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영창 직후, 공중에 형성된 무수한 마법진들로부터 불덩어리들이 네이팜탄처럼 쏟아져 내렸다.
콰과과과과과광―!!
화마의 폭격은 주변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나는 절벽 뒤편에 몸을 숨겼다. 숨어 있는 동안 화염탄이 몇 개인가 근처에 떨어졌지만, 불길이 옮겨붙을 나무나 풀잎 같은 것은 없어 비교적 안전했다.
“휴우.”
공격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처가 늦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공격을 읽었다고 호기롭게 말은 했지만, 기껏해야 화염 아니면 바위, 둘 중 하나의 속성으로 공격해 온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니.
어떻게 알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녀석의 마법 구사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우선 영창 주문 시에 시전되는 마법은 무조건 속성 마법― 엘리멘탈 계통의 마법이다.
홀수 번째 마법의 속성은 랜덤이나, 짝수 번째에는 반드시 화염 혹은 바위 속성 파괴 마법이 온다.
이를테면 3일 차인 오늘 와이번 녀석이 처음으로 쓴 것은 전격 속성의 파괴 마법. 그리고 그다음에 날아온 것은 보았다시피 화염 속성의 파괴 마법이다.
「Zi′egpahr. Kawrrdhmileh. Undihaikn!」
회색 용이 영창을 외자, 송곳처럼 날카로운 얼음 소나기가 나를 덮쳐 왔다. 나는 서둘러 공터에서 벗어나 정글의 무성한 수풀을 방패 삼아 공격을 피했다.
세 번째는 빙결 속성의 마법이었다. 앞서 말했듯 홀수 번째 마법의 속성은 무작위로 정해진다.
이제 다음은,
화염 혹은 바위.
「Erdinnhrs. Claarwqundrk. Thrurkzstarha!」
발밑이 살짝 떨리더니,
거센 흔들림이 전해졌다.
쿠구구구궁―!
우렁찬 굉음과 함께 땅이 번쩍 솟아올랐다.
용암이 지반을 수직으로 뚫고 솟구쳐 나오며 강도 높은 지진이 찾아왔다. 사방팔방 흔들리는 진동을 못 이긴 내 몸은 중심을 잃고 쓰러져, 하마터면 갈라진 크레바스 사이의 마그마 속으로 추락해 버릴 뻔했다.
“이크.”
역시. 바위 속성의 파괴 마법이다. 아케인 중에서 비슷한 마법을 찾자면 <어스퀘이크 바운드>일까.
어쩐지 위력이 범상치 않았다. 첫째 날과 둘째 날에 비해 마력의 출력이 상당히 올라가 있었다.
“어제까진 그래도 좀 봐줬던 건가.”
단순히 와이번 아가씨의 변심? 아니면 교육 프로세스를 염두에 둔 미르각시의 철두철미한 지시?
뭐, 어느 쪽이건 간에, 기존 계획보다 공략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해 버렸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참고로 그대의 반지가 현재 낼 수 있는 용언 마법 최대 출력은 돌로레스의 1/10에 불과하다.」
훈련 시작 전, 미르각시는 그렇게 말했다. 아까 전의 <폭렬파>도 그렇고, 내가 쓰는 용언 마법의 위력 자체는 와이번과 비교하자면 확실히 보잘것없었다.
「다만, 특정 속성 마법에 대한 정확한 카운터 스펠을 구사했을 시, 그때 쓴 마법의 위력은 20배로 점프. 무려 그녀의 두 배가 된다.」
미르각시가 말한 대로라면,
공략의 열쇠는 카운터 스펠.
쉽게 말해, 와이번이 마법을 구사한 순간에 그 속성의 약점이 되는 속성으로 반격을 가하는 것이다.
불은 물에 약하고.
물은 번개에 약하고.
번개는 바위에 약하고.
바위는 금속에 약하고.
금속은 불에 약하다.
속성끼리 서로 먹고 먹히는 이러한 상성 관계는 게임에서도 아주 중요한 요소였던 만큼, 실제 세계의 마법전에 있어서도 승부의 향방을 가르는 핵심이었다.
짝수 번째에 한해서라면, 나는 와이번 아가씨가 어떤 속성의 마법으로 공격해 올 것인지 알고 있다.
화염 혹은 바위. 반반의 확률. 이는 필히 미르각시의 지시로 정해진 패턴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
화염 속성의 대표적인 약점 속성은 물.
바위 속성의 대표적인 약점 속성은 얼음.
그리고―
화염 속성의 강점 속성은 얼음.
바위 속성의 강점 속성은 물.
“하.”
화염의 약점인 물은 바위에게 공략당하고,
바위의 약점인 얼음은 화염에게 공략당한다.
즉, 카운터 스펠을 잘못 구사해 버리면―
반대로 이쪽이 카운터를 처맞는다는 얘기.
“진짜 너무하네.”
좆되라고 기도하는 듯한 악의적인 패턴.
일부러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유일한 승리 플랜이 확실한 패배 엔딩을 보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드래곤의 악질적인 개트롤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후우우.”
한숨을 푹 내쉬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뭐 어쩌겠는가. 나는 한낱 인간인 것을. 위대하신 용님께서 원하신다면야 좆이든 뭐든 되어 드려야지.
「Lumier. Rykshinn. Dekanchalhaghaa!」
정글 속으로 숨어들었던 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돌로레스 아가씨가 곧장 영창을 외었다.
푸른 마나를 머금은 공기가 사슬처럼 엮이며 지름 10미터가량 되는 바람의 가두리를 내 주변에 올려다 세웠다. 이로써 나는 이 공간에 발이 묶여졌다.
오늘의 다섯 번째 마법은 바람 마법 <지박풍>. 상성을 그다지 타지 않는 무상성의 속성 마법이었다.
이제 다음은,
화염 혹은 바위.
나는 눈을 부릅떴다. 수능 영어 시간에 듣기평가 문제를 풀 때보다도 몇만 배는 더 끌어 올린 집중력으로, 들려오는 음절 하나하나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Undine.」
‘Undine’는 ‘정령의 눈물’이란 뜻. 물 속성 마법에 주로 사용되는 단어지만, 이번에 오는 마법은 물 속성이 아니다. 그거 말고 다른 뜻은 뭐가 있었지?
「Khrssbukendagh.」
‘Khrssbukendagh’는 ‘초신성의 열기’인데, ‘열’과 관련된 단어라면, 이번 마법의 속성은 화염인가?
아냐. 확신하기에는 아직 애매해. ‘굳건하게 버티는 자’란 의미도 꽤나 자주 쓰이는 편이니까. 만일 그쪽으로 생각한다면 바위 속성일 가능성도 있어.
……제기랄. 판단이 계속 늦어진다. 두 번째 단어까지 들었는데도 속성을 확인하지 못했어. 이러면 카운터 스펠을 준비하고 구사할 시간이 촉박해지는데.
어떡하지? 그냥 찍어야 하나?
아무래도 망설여진다. 단 하나뿐인 목숨을 걸기에 50%의 확률은 충분히 높은 확률이 결단코 아니다.
……녀석이 쓰려는 마법은?
화염?
바위?
……내가 지금 써야 하는 마법은?
물?
얼음?
……어느 쪽이지? 뭐가 정답이지?
나는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고뇌는 점점 더 길어져 갔다.
….
….
기나긴 고뇌 끝에 들려온,
마지막 세 번째 단어의 뜻은―
「Meteorskaia.」
하늘이 노여워하여 천벌을 내린다.
‘아.’
감겨져 있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그것이 무슨 마법인지 깨달았다.
<메테오 스트라이크>다.
운석을 소환하는 최상급 파괴 마법.
기본은 화염 속성으로 분류되지만, 때때로 바위 속성이라 칭해지기도 하는. 다중 속성 마법.
그러니까, 정답은―
‘양쪽 다.’
….
….
“하.”
정말이지. 혀가 내둘러졌다.
어쩜 이리도 악질일 수 있을까.
“진짜 너무하네.”
사람을 졸지에 등신으로 만들다니.
물 속성 마법을 써야 하나 얼음 속성 마법을 써야 하냐는 문제로, 난 열불 터지도록 고민했단 말이다.
‘물이냐. 얼음이냐.’
‘물이냐. 얼음이냐.’
‘물이냐. 얼음이냐.’
고민이 너무 길어져서.
결국 분수에 맞지도 않게.
‘에라 모르겠다.’
몹시 오만한 짓거리를.
저질러 버렸단 말이야.
‘둘 다 써버리자.’
한 손에는 물.
한 손에는 얼음.
「Nebnemmains.」
「Lozrkghsheniiai.」
「Ciel′ludvisanrha.」
영창은 통으로 외었다. 세 개의 단어를 절묘하게 조합하여, 물과 얼음의 기를 동시에 지닐 수 있도록.
즉흥적으로 저지른 짓거리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계획한 대로 실현하는 데는 성공은 했으니까.
지잉―.
반지 끝에서 기묘한 울림이 느껴졌다.
어쩐지 익숙하다. 마치 평상시에 <강화>를 몇 겹씩 중첩시킬 때의 바로 그 느낌이었다.
힘이 중첩된다. 한 겹. 다시 또 한 겹.
끝없이 무한히 성장해 가는 마력의 기운. 이 힘은 아마도 미르각시 본인의 힘 그 자체였다. 나는 지금 드래곤의 힘을 내 손 안에서 직접 내뿜고 있었다.
자그마한 물줄기가 토네이도처럼 범람하며.
냉기의 꽃이 눈처럼 지천에 가득 내려앉았다.
시야가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어느덧 물과 얼음만의 세계가 되었다.
「정확한 카운터 스펠을 구사했을 시.」
「그때 쓴 마법의 위력은 20배로 점프.」
분명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허나 이건 20배 정도가 아니었다. 무슨 요술을 부린 건지는 몰라도, 이것 역시도 미르각시의 장난질임이 틀림없었다.
위력은 어림잡아 200배.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상.
나의 용언 마법은 무덥던 정글을 한순간에 빙하기로 만들어 버렸고.
회색 와이번 돌로레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화석처럼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