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The Devil In I (2)
그 시각.
<윌슨앤코> 사무실.
‘팀장님, 오늘도 안 나오셨네…….’
캐비닛의 서류철을 정리하고 있던 리타 스몰필드의 시선이 문득 맞은편 책상의 빈자리로 향했다.
금주 수요일부터 연속된 휴가로 유진이 회사에 나오지 않은 지 벌써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멘탈 케어일세, 멘탈 케어.”
사장님께서는 그렇게 말했다. 이번 유진의 장기 결근 역시 자기가 명한 강제 휴가라고 말이다.
저번처럼 몸이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니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요즘 유진 군이 좀 오락가락했잖나.”
최근 그의 상태가 꽤나 이상하긴 했다.
말을 걸어도 살짝씩 반응이 늦는다거나, 일부러 자기나 다른 사람한테 묘하게 거리감을 둔다거나,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의욕이라곤 없어 보였다.
“무어,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리타 스몰필드는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무슨 일이 있었다면,
……얘기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은 사이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다.
자기 혼자만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그렇게나 미덥지 못했던 걸까.
“하아.”
관계의 발전이란 건 참 어렵구나 싶었다.
어쩌면 이대로 계속 상사와 부하 간의 역할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아, 괜스레 속이 쓰렸다.
그때쯤.
「어머니.」
책상 옆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드복을 입은 금발의 안드로이드, 깡통 로봇 신세에서 벗어난 사무실의 마스코트― 타이퍼였다.
「오전 중에 명하신 납품증명서와 수출입신고서, 계약서 작성 등 모든 문서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어? 벌써?”
「예. 검토 부탁드립니다.」
타이퍼는 예법을 중시하는 다도가처럼 정갈하고 다소곳한 자세로 출력한 서류들을 그녀에게 건넸다.
리타 스몰필드는 메이드 로봇이 건네준 종이들을 받아 한 장씩 꼼꼼히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완전 잘했네. 내가 한 것보다 훨씬 낫잖아.”
「칭찬 감사드립니다.」
“이거, 코볼트어 법률 문서 번역은 어느 업체에 맡긴 거야? 반나절 만에 한 것치곤 되게 깔끔한데?”
「해당 문서의 번역 작업은 제가 직접 하였습니다.」
“뭐? 진짜로?”
「소수종족어 번역 단가의 시중 평균 시세를 고려하였을 때 비용적인 측면에서 그편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코볼트어 학습 데이터의 부재로 부득이 공용어 중역을 거칠 수밖에 없었지만, 의미 전달에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미래 시대의 안드로이드란 말인가.
유능해도 너무 유능하다. 말하는 커피머신에 가까웠던 업그레이드 이전의 타이퍼와 비교하면 지금은 거의 환골탈태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다른 명령하실 일은 없습니까. 어머니.」
“……저기 근데, 그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 좀 그만해주면 안 될까?”
「독단적 명명으로 인한 심기의 불편을 안겨드려 죄송합니다. 원하신다면 호칭 방식을 재지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냥 편하게 리타라고 불러.”
「알겠습니다. 리타.」
업그레이드되었음에도 여전한 무표정.
뭐, 감정 표현이 서툰 것은 TYPE-R의 AI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고질병이니. 차츰 나아지겠지.
“…….”
조금 머뭇거리다가 문득.
리타 스몰필드는 입을 열었다.
“저기, 타이퍼.”
「부르셨습니까.」
“혹시 팀장님한테서, 무슨 연락 같은 거 못 받았어? 아니면 너한테 뭐 남기고 간 말이라든가…….”
왜 그런 걸 물어봤는지도 대답기 어려울 정도로, 별생각 없이 그냥 한번 던져본 질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전하고 가신 말씀이라면 있습니다.」
돌아온 대답에, 순간 화들짝 놀랐다.
“이, 있다고……?”
「예. 화요일 새벽 3시경 주인님께서 퇴근하시면서 저한테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뭐, 뭐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타이퍼는 말했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내가 회사에 안 나올 동안.」
「스몰필드 씨 좀 잘 챙겨 줘.」
「또 혼자 무리하다 끙끙댈라.」
리타 스몰필드를 쳐다보며.
자신이 들은 말들을 전했다.
“…….”
리타 스몰필드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어쩐지 빨개진 얼굴. 푹 숙여진 고개.
‘……으으, 자존심 상해…….’
그렇게나 침울했던 기분이, 고작 전해 들은 말 몇 마디에 눈 녹듯이 사르르 풀어 헤쳐지다니.
「리타.」
“…….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추론입니다만.」
“…….”
「감정 모듈의 센서로 파악한 결과, 리타는 주인님께 애정을 품고 계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
「응원하겠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로봇한테도 쉽게 들킨 이 마음을,
그 사람은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만약 두 분이 연적인 관계를 이루게 된다면 그때는 주인님이 제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까?」
“몰라…….”
들리지 않는 그녀의 속앓이가,
오늘도 긴 긴 하루를 지새운다―.
***
첫째 날.
이날은 와이번의 맹공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는 데만 급급했다. 미르각시가 안겨준 제약으로 인해 최소한의 <강화>조차도 쓰지 못하는 실정. 마법을 못 쓰는 이상 일반인이나 다를 바 없는 내가 공룡 크기의 괴물을 상대로 무얼 할 수 있었겠는가.
세 시간 동안 죽기 직전까지 쫓기다가 공격 타임이 끝나면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고, 세 시간 후에는 다시 또 개빡친 와이번과의 추격전이 시작됐다. 그 짓거리를 하루 종일 몇 번씩이나 반복했다.
훈련 중의 식량 확보 역시 기본적으로 자기가 직접 조달해야만 했다. 다만 이 괴팍한 정글은 나무에서 불고기피자가 주렁주렁 열린다거나, 밭 같은 곳의 흙을 파면 베이크드 빈즈 통조림이 나온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밥걱정은 말고 훈련에나 집중하라는 드래곤 선생님의 배려겠거니 싶었다.
둘째 날.
슬슬 도망치는 일에도 여유가 생겼다. 와이번의 대략적인 행동 패턴을 파악하고 나니 대처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까다롭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돌로레스란 아가씨는 전투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듯했고, 첫날만큼 호전적이지도 않았다.
여유가 생기자 귀가 트였다. 와이번이 마법을 구사할 때마다 내뱉는 정체 모를 소리들이, 미르각시가 내 머릿속에 넣어준 용언에 관한 지식들과 결합하여 차츰 그 언어의 체계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싸우는 도중에 시험 삼아 몇 가지 기초적인 용언 마법을 직접 사용해보기도 했다. 물론 들인 노력에 비해 그 위력은 아주 형편없었다. 와이번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좀 더 다양한 용언 활용법과 언어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또한 획기적인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저녁 즈음부터는 본격적으로 용언 연구와 전략 계획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셋째 날.
쿠우우우우웅―!
땅이 거세게 진동했다.
삼림 한가운데에 착지한 회색 용은 거대한 날개를 잔디밭에 내려 앉히며 살벌한 숨결을 내뱉었다.
“안녕. 돌돌아.”
그르릉거리는 와이번과 눈을 맞대고서,
나는 여유롭게 아침 인사를 건네 보였다.
“너 오늘은 기분 좋아 보인다?”
「Rehikdennzt. Zi′knsekcs Doparhak.」
“어허. 여자애가 그런 말 하면 못써.”
내가 핀잔을 주자, 와이번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114개의 크고 날카로운 이빨을 양옆으로 야금야금 갈아 대며 대놓고 입맛을 다셨다.
“하여간에.”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되는,
딥하고 진솔한 대화의 시간.
“말이 안 통한다니까.”
회색 용이 오늘의 첫 번째 영창을 외기 직전.
나는 허겁지겁 몸을 뒤로 돌려 쏜살같이 달렸다.
타다닷―!
일단은 도주. 시작은 언제나와 같다.
목적은 거리 벌리기 겸 상황 지켜보기. 앞선 이틀간의 데이터대로라면, 와이번의 첫 행동은…….
「Lumuluazk, Deierapind, Elkandarha!」
그렇지. 원거리 견제를 위한 파괴 마법 주문.
‘Lumuluazk’의 뜻은 ‘여름의 폭풍우처럼 매섭게 내리치다’. ‘Deierapind’의 뜻은 ‘조준’. 마지막에 나온 ‘Elkandarha’는 모르는 단어지만, 파괴 마법의 영창이라는 점과 다른 어구의 의미를 종합해 봤을 때, 그 뜻은 아마도 어떤 속성을 가리키는 말.
파지직―!
그때.
하늘에서부터 시퍼런 낙뢰가 내리쳤다.
투콰아아아아앙―!
나는 번개가 떨어질 지점을 포착하고 미리 발을 굴려 공격을 피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몰라도, ‘Elkandarha’는 분명 ‘번개’와 관련된 의미를 가진 단어였을 것이다.
“오케이. 이번에도 맞혔어.”
영창이 들려온 순간에 곧바로 그 문장의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모르는 단어의 의미를 유추해서 판단해야 하는 때가 잦아 아무래도 좀 헷갈리긴 하지만.
“해볼 만해.”
와이번의 전격 마법으로 인해 절벽의 바위들이 굴러떨어져 도주 경로에 장애물이 생겨 버렸다.
다른 길들은 개활지로 나가지는 터라 하늘을 날 수 있는 와이번을 따돌리기 어렵다. 도망을 계속 치고 싶다면 바위를 뚫고 지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역시 <폭렬파>려나.
나는 오른손 검지에 낀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이걸 장착하고 있는 동안에는 드래곤만이 쓸 수 있는 용언 마법, 드라고닉을 구사할 수 있었다.
“스읍.”
용언의 가장 큰 특징은 어휘의 의미나 문법의 규칙이 시시각각 바뀐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불’을 의미하는 단어인 ‘Sihossheh’는 ‘의지의 현현’ 혹은 ‘태산을 부수다’란 뜻이 될 수도 있다. 문맥과는 상관없이 상시 불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이며, 변형의 여부는 오로지 육감만으로 캐치해야 한다.
「Sihossheh― N′dizkhlu, Vbrenyva.」
어제 미르각시에게서 처음으로 배운 용언 마법.
강렬한 화염의 숨결을 내뿜는, 통칭 ‘드래곤 브레스’라 알려진 대표적인 드라고닉 파괴 마법이다.
세 가지 단어로 이뤄진 기본 영창의 구조.
각각의 단어의 정의. 그것을 오롯이 지키며.
“Karhksais.…….”
말의 울림을 기억한다.
그러고 나서 내뱉는다.
“Ubthunzuk…….”
허나 기억과는 다르게.
본질은 변하지 않노니.
“Sihossheh.”
불처럼 타오른 의지가,
태산을 부술 수 있도록.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거친 폭음과 함께, 강한 충격파가 일었다.
아슬아슬하게 피부를 스치며 지나간 바람의 반동. 손바닥 끝에 남아 있는 중독성 강한 얼얼함.
그것은…… 틀림없는 <폭렬파>였다.
즉흥으로 만들어낸 엉망진창인 재현의 결과물일 뿐이었음에도, 반지는 내게 제대로 응답해주었다.
어제에 비해 위력도 많이 올라왔다. 단어 조합과 영창 발음에 어느 정도 노하우가 생긴 덕분일까.
자신이 생겼다. 적어도 기초 수준의 용언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단계까지는 확실하게 올라왔다.
“좋아.”
도망칠 필요는 이제,
더 이상 없단 얘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