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The Devil In I (1)
얼마나 오래 떨어졌을까?
1분. 아니, 어쩌면 10분 이상.
어쨌든 아주 길게 낙하한 것만은 분명했다.
검은 구덩이 아래로, 나는 끝도 없이 추락했다.
흡사 잠에 빠지기 직전처럼 의식이 점차 흐리멍덩해지며, 시간에 대한 감각이 서서히 고장 나기 시작했을 즈음.
파앗―!
돌연 새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머금었고,
이내 중력이 조금씩 약해져 감을 느꼈다.
….
….
마침내 발밑이 묵직해졌다.
바닥이다. 어느샌가 바닥이 생겼다.
이어서 느껴진 것은…… 진한 흙냄새. 그리고 풀 냄새. 남국의 휴양지마냥 축축하고 미지근한 공기.
나풀거리는 잎사귀 소리. 풀벌레와 새들의 노래. 아주 먼 데서부터 들려오는 야생 동물의 울음.
“여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있는 곳은 마치 선사 시대의 정글 같은 울창한 밀림의 한가운데였다.
갑작스러운 풍경의 전환에 순간적으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첫 번째 스테이지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때 미르각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상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음성을 상대방의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하는 텔레파시 마법이었다.
「공들여 만든 맵인데. 감상 좀 듣고 싶구나.」
“……또 그때와 같은 결계 마법입니까.”
「후후후. 이날을 위해 내 특별히 준비했지.」
확실히 제법 본격적인 기운이 엿보였다.
처음 내가 드래곤의 농간에 당했던 때, 그때의 그 기묘한 마을과 마찬가지로 이 숲의 만듦새는 아무리 보아도 가짜인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오감은 완전히 이곳을 현실이라 인지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요술을 부려야 이 정도 레벨의 환영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것일까.
「오늘 그대에게 가르쳐줄 것은.」
「내가 쓰는 드래곤 고유의 마술.」
「용언 마법. 즉― ‘드라고닉’이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용언 마법을, 가르쳐주겠다고요……?”
「그래.」
미르각시는 매우 덤덤하게 말했다.
「기타 색채 마력을 가진 그대는 당연 기존의 통상적인 마법 체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 용언 마법은 색채와 관계없이 술식의 최적화가 자유롭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
「어떤가. 그대에게 딱 맞지 않겠는가?」
이론상으론 틀린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태클 걸 부분이 너무 많다.
“저기, 잠시만요. 제가 알기로 드라고닉은, 용족이 아닌 이상 쓸 수 없는 마법이라고…….”
「아예 못 쓰는 건 아니다. 단지 배우는 과정이 상당히 어려울 뿐. 뭣보다 일반적인 5대 색채 보유자라면 굳이 용언 마법을 익힐 이유가 없으니까.」
“그, 드라고닉은 영창 과정이 매우 중요해서 용언을 미리 숙지해 두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저는 용언에 대해서는 단어 한 개도 모르는데요.”
「오른쪽 주머니를 뒤져 보거라.」
“……?”
그녀가 시킨 대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작고 단단한 무언가가 걸리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것을 꺼내서 살펴보았다. 그것은 반지였다. 물결 모양 각인이 새겨진 은반지.
「마도구다. 내가 직접 만든 아티팩트지.」
「손가락에 끼운 다음 마력을 공급해 봐라.」
나는 미르각시의 지시에 군말 없이 따랐다.
반지를 오른손 검지에 끼우고서 조심스럽게 마력을 방출했다. 그러자 곧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촤라라라락―.
자신의 뇌가 책처럼 펼쳐진 듯한 기묘한 감촉.
이윽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권 분량에 달하는 수많은 양의 정보가, 일순에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용언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주입시켰다.」
「2만여 개의 단어. 보통형 문법. 인간의 조음기관 구조에 알맞게 변형시킨 발음법과 발성법.」
「반지를 끼고 있는 동안에만 나타나는 효과지만, 이걸로 어느 정도는 감을 잡을 수 있을 게야. 영화 자막 보면서 외국어를 배우는 느낌이랄까.」
과연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아무래도 저 위대하신 드래곤 양반께서 내게 마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한 게 그저 허투루 내뱉은 소리는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 지금부터 뭘 하면 되는 거죠?”
「오호, 의욕이 앞서는 기특한 제자인지로고.」
미르각시는 기분 좋은 듯이 재잘거렸다.
「그 반지에는 완성 상태의 술식과 호환용 마나가 탑재돼 있어서, 장착자가 영창을 외는 것만으로 기기에 내장된 용언 마법을 바로 구사할 수 있다. 일종의 매크로 아이템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어, 그렇다는 건…….”
「그대도 용언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게지.」
놀라고 있을 틈조차 없었다.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간단한 것부터 한번 써보도록 할까.」
「화계 술식 1형. 통칭 드래곤 브레스.」
「혓바닥 옆으로 발음이 새지 않게 주의하면서. 천천히.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해 보거라.」
….
….
「Sihossheh― N′dizkhlu, Vbrenyva.」
마치 불꽃처럼 강렬하게 다가오는 음성.
나는 그 괴상한 발음을 어떻게든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 첫 옹알이를 하는 갓난아기가 된 기분으로.
올바르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내 딴에 발음을 끝마친 순간.
화아아아악―!
손가락에 끼운 반지 끝에서부터,
푸르게 빛나는 화염이 용솟음쳤다.
「성공했군.」
「대충 그런 느낌이다. 감이 잡히는가?」
얼떨떨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방금 내가 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드래곤님의 기준점은 가까스로 통과한 듯싶었다.
「좋아. 이제부터는 실전이다.」
….
….
잠깐.
실전이라니?
자연스럽게 물음표가 떠올랐을 즈음.
문득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 왔다.
……공기가 흔들리고 있다.
……무언가 소리가 들린다.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야생 동물의 울음.
아니, 이건 그냥 동물의 울음소리가 아니다.
소리가 가까워진다. 공기의 흔들림도 거세진다.
거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초록빛으로 가득 채워진 숲의 하늘을,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회색으로 덮었다.
그리고,
쿠우우우웅―!
하늘을 뚫고 온 그림자가, 내 앞에 착지했다.
그 육중한 충격에 땅이 우르르하고 진동했다.
“…….”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그 생물체의 겉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집채만 한 덩치. 바위를 깎아 만든 듯이 단단하게 반짝이는 잿빛 비늘.
끝내 드래곤이 되지 못한,
비운의 날개 달린 도마뱀.
“……와이번……?”
멸종되었다 알려진 고대 용족의 잔재가,
어째서인지 지금 여기 내 눈앞에 있었다.
……이것도 가짜겠지?
……라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코앞에 서 있는 괴물의 무지막지한 박력. 피부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위압감.
―아. 이건 진짜다.
「그 녀석은 레반테인 비룡의 서른 번째 실패작. 보통 와이번이라고 부르는 드래곤의 아종으로, 내 처소 밑에서 같이 살고 있는 룸메이트다.」
「이름은 돌로레스. 보이는 대로 한창때의 암컷이고. 좋아하는 건 포유류의 날고기. 최근에 생리통을 심하게 겪어서 기분이 영 좋지 않은 상태지.」
와이번이라 하면 <사이버판타지>의 마수魔獸형 몹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다 할 수 있는 몬스터.
오래전에 멸종됐다는 설정에 맞게 게임에서도 그 개체 수가 극단적으로 적어, 후반부 일부 퀘스트에서나 겨우 한두 마리를 볼 수 있을 정도에 그치지만, 일단 한번 등장하게 되면 ‘짝퉁 드래곤’이라는 치욕스러운 별칭에 걸맞지 않은 말도 안 되는 강력함을 플레이어들에게 양껏 선사한다.
「Zijkhainen……」
와이번, 즉 용족 몹의 가장 큰 특징은―
몬스터인 주제에 마법을 구사한다는 것.
「Rtuhelquassh, Kzmonkahhah!」
회색 용이 이빨 사이로 바람을 내뿜었다.
이내 솟구친 시퍼런 화염이 나를 덮쳤다.
화아아아아아악―!!
용의 숨결. 드래곤 브레스.
그 위력은 드래곤이 아닌 와이번의 것이라기엔 믿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도 강력했다.
물론, 한때 디바인 마스터와도 겨뤄 봤던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까다로운 공격도 아니었다.
반응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강화>를 몇 겹 두른 <포스 배리어>라면 쉬이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
어떻게 된 일인지.
마법이 나오지 않았다.
“얼레?”
손끝에 마력을 집중시켰지만 무반응이었다. 아예 마나의 방출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치 몸속의 마력 혈관이 어떤 기름 같은 것에 막힌 듯했다.
“아.”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얼른 허리를 젖혀 바닥 쪽으로 냅다 몸을 굴렸다.
콰아아아아아―!!
두터운 불꽃이 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움직이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통구이가 될 뻔했다.
“허억.”
숨을 고르는 것도 잠시뿐.
눈앞에 직면한 위기는 아직 거기에 그대로 있음을 알았기에, 빠르게 전투태세를 갖춰야 했다.
「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용언 공부 시간이다.」
「외국어 공부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하면, 모름지기 원어민과의 회화가 최고 아니겠느냐.」
그즈음.
머릿속에서 미르각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지금부터 <강화>를 쓸 수 없다.」
「반지가 그대의 마력을 봉인하고 있으니까.」
「그대가 여기서 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반지에 내장된 용언 마법뿐. 물론 그걸 쓰기 위해선 아까처럼 제대로 된 영창을 읊어야 할 것이다.」
듣는 와중에도 숨이 마냥 가쁘게 차올랐다.
불길한 기운은 역시 틀리지 않았구나 싶었다.
「참고로 그대의 반지가 현재 낼 수 있는 용언 마법 최대 출력은 돌로레스의 1/10에 불과하다.」
「다만, 특정 속성 마법에 대한 정확한 카운터 스펠을 구사했을 시, 그때 쓴 마법의 위력은 20배로 점프. 무려 그녀의 두 배가 된다.」
「알겠는가? 그대가 돌로레스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이 카운터 전략을 잘 구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숨을 고르며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지금은 듣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돌로레스는 3시간 주기로 공격과 휴식을 반복할 거다. 서로 간 휴식 중의 공격은 엄금한다.」
「그대의 승리 요건은 돌로레스의 리타이어 혹은 항복 선언. 패배 요건은 주어가 반대일 경우다.」
「참고로 돌로레스는 그대를 찢어 죽일 각오로 이 수업에 임할 거다. 말했다시피 지금 그 아이는 기분이 굉장히 좋지 않은 상태거든.」
와이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용의 관상에 관해 아는 게 없지만, 왠지 개빡친 것처럼 보였다.
「이건 메탈슬러○랑은 다르다.」
「죽으면 그대로 끝. 게임 오버.」
「목숨 이을 동전 따위는 없단 얘기지.」
<강화>도 <부름>도 쓰지 못한다.
내게 주어진 거라곤 두뇌 전반에 뒤죽박죽으로 섞인 용언에 대한 잡지식들. 그리고 요상한 반지.
상대는 와이번. 드래곤 바로 아래 클래스.
과연 나 같은 놈이 저것을 이길 수 있을까.
「어디, 준비는 되었느냐?」
묻고 앉았을 것도 없다.
어떻게든 해보는 수밖에.
「수업을 시작한다.」
「열심히 버텨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