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는 야근을 한다-152화 (152/201)

152화. You Know My Name (1)

유클리드 진.

그것은 내 본명 ‘유진연’에서 앞의 두 글자를 따와 그럴싸하게 지어낸 이름으로, <사이버판타지>를 플레이할 때 주로 쓰던 캐릭터 닉네임이다.

물론 컨셉질 내지 심심풀이로 대강 만든 캐릭터에는 ‘고블린배꼽핥고싶다’라든가 ‘불꽃파이터김정일’ 같은 장난스러운 닉네임을 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만든 캐릭터라면, 언제나 반드시 ‘유클리드 진’이란 이름을 붙였다.

다소 오글거리긴 해도, 자고로 롤플레잉 게임을 할 때는 무엇보다도 몰입감이 중요하다 보았기 때문에. 게임이든 뭐든 제대로 각 잡고 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나에게 있어서는, 그 중2병스러운 이름 자체가 게임광으로서 일종의 루틴인 셈이었다.

최고 레벨 달성. 모든 퀘스트 클리어.

숨은 버그 찾기. 공략 제작. 각종 기믹 실험.

게임 속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다 했다.

더 이상 할 만한 게 남아 있질 않아, 나중에는 아예 직접 모드 통합팩까지 만드는 데 이르렀다.

‘유클리드 진’은 그야말로 <사이버판타지> 세계의 진정한 최강자, 신이라 칭한들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 이름 알잖아. 유진 연.”

그놈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그러니까 뭐, 초면이긴 하지만, 굳이 지금 서로 통성명을 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치?”

얼굴을 보자마자 눈치챘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깨달았다.

캐묻거나 할 필요조차도 없이,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진연’의 분신.

플레이어로서의 나.

유클리드 진.

“뒷세계에서 내 행세를 하고 다녔다던데.”

“…….”

“용병 일을 할 때 ‘유클리드’란 이름을 썼다지? <펍 미드나이트> 주인장한테 대충 얘기 들었어.”

달밤의 공터 한복판에서 놈이 떠들어 댔다.

이곳이 마치 자신의 독무대라도 되는 것마냥. 의기양양하게.

“우연이야. 난 너 몰라.”

나는 그런 녀석에게 야유를 하듯이 그 말을 툭 뱉어 던졌다. 그러자 놈은 뻔뻔하게 웃어 보였다.

“모른다고 말한 주제에, 내 이름이 ‘유클리드’란 건 알고 있었나 보군. 의심조차 안 하는 걸 보니.”

“…….”

“근데 개눈깔 할배가 나랑 만났었다고 얘기 안 해줬나 봐? 게다가 그쪽 반응을 보아하니, 나 따위는 그동안 아예 신경도 안 썼다는 눈치고……. 이거 좀 섭섭한걸. 나는 너한테 관심이 꽤 많았는데. 너는 전혀 아니었나 보네. 하아. 짝사랑 쫑난 기분이야.”

상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나 자신.

설마 내가 만든 캐릭터가 이 세계에서 버젓이 활보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하기야 즉석에서 랜덤으로 뽑아낸 것에 불과한 일회용 캐릭터 ‘유진 연’ 따위도 있는 마당에, 내 본캐인 ‘유클리드 진’이 없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게임을 할 때의 나는,

한마디로 말해서 ‘씹새끼’였다.

NPC와 동료 살해는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고.

선택지 고르기는 무조건 이득 보는 방향으로만.

덕분에 바이스 포인트 999를 찍는 것은 예사였다.

만약, 저 ‘유클리드 진’이란 놈이 게임 속의 내 플레이 스타일을 그대로 가져온 캐릭터라 한다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어떠한 일도 망설이지 않고 실행하는.

―완벽에 가까운 만능 천재 사이코패스.

악惡의 진정한 의인화. 말 그대로 절대악.

어쩌면 놈은 <나인서클>의 대마법사들, 최강의 드래곤이나 마왕의 후손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존재.

……문득 두려워졌다.

……과연 내가 저 녀석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때, 우우웅―.

주머니 속 전화기가 진동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발신자는 전前 따봉맨, 분신술사 지나 드비토였다.

“전화 왔어?”

“…….”

“괜찮아. 받아.”

놈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전화를 받았다.

「보스. 지금 어디야?」

지나의 목소리는 조금 다급하게 느껴졌다.

“8구역 로건스트리트 공사장. 아까 전에 네가 알려준 사냥 표식 위치 중 한 곳에 와 있어.”

「아. 젠장. 한발 늦었네.」

“무슨 일이지?”

「늦게 전해서 미안. 잘못된 위치를 가르쳐줬어. 아무래도 분신 중에 일부가 배신한 것 같아.」

나는 흠칫했다.

“배신이라고?”

「예전에 말한 적 있지? 내 분신들은 본체의 명령만을 공유할 뿐, 자아와 기억은 각기 다 별개라서. 그래서 가끔씩 한두 년이 시키지도 않은 요상한 짓거리를 벌일 때가 있어. 팀플의 숙명이랄까.」

“뭣 때문에 배신을 한 건데?”

「돈이지, 뭐. 공동 계좌 입금 내역에 <카르마 코퍼레이션>이란 곳 명의로 100만 달러가 들어와 있더라고. 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 ‘나’를 고용한 거지.」

“그럼…….”

「보스가 발 디딘 곳은 함정이야. 혹시라도 거기서 ‘나’랑 마주친다면, 적이라고 간주하도록 해.」

“…….”

「내 쪽에서 지원은 안 보낼게. 괜히 숫자가 많아졌다간 누가 배신자인지 구분이 안 가 헷갈리기만 할 테니까. <헬터 스켈터> 애들은 도착할 때까지 좀 오래 걸릴 텐데, 아리엘이라도 불러볼까?」

“아니. 아무 데도 연락 돌리지 마.”

슬며시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뚝―.

전화를 끊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들어본 적 있다.

최근 어스테이트 무역업계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신흥 기업. CEO가 뒷세계 쪽과 아주 깊이 엮여 있다는 부정한 소문을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다.

“통화 끝났어?”

“…….”

“흐음, 아마 그 복제인간 아가씨의 전화였으려나? 같은 편에 착실한 일꾼이 있다는 건 참 부러운 일이야. 그래서 나도 한번 콕 찔러 봤는데 말이지. 뭐, 이런 류의 헤드헌팅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방식이니까. 부디 업계 관행에 따라 이해해주길 바라.”

나는 놈을 노려보았다.

“메리가 사라진 것도 네놈 짓이냐?”

“응. 맞아.”

그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저만치서 능글맞게 웃고 있는 개자식에게, 나는 당장이라도 냅다 주먹질을 날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 딱히 납치 같은 걸 하진 않았으니 오해는 하지 마. 그녀는 지금 매우 안전한 장소에 있걸랑.”

“…….”

“하지만 지금부터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그녀의 안부가 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지.”

빌어먹을 미소를 보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허나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다스렸다.

“뭘 원하지?”

거액을 들여 내부에 첩자를 심고,

메리가 실종된 것처럼 판을 꾸며,

나를 이 장소까지 오게 만들었다.

“으으음, 일단 이렇게까지 해서 정말 미안해. 그래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웬만하면 방해꾼 없이 너랑 나, 딱 둘이서만 얘기가 하고 싶었거든.”

“…….”

“뭘 원하냐고 물었지. 그래.”

단순히 재미로 그랬다고 해도 결코 개연성 없는 상황은 아니다. ‘나’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그러나 지금 저놈에게는 분명히 무언가 이뤄야 할 목적이 존재했다. ‘나’이기에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이내 놈이 입을 열었다.

여전한 미소를 머금은 채.

“네 삶Your life이야.”

그것은 중의적인 의미였을까. 아니면 직구로 꽂은 말이었을까. 실상은 곧 놈의 혓바닥으로부터 드러났다.

“너는 뒷세계에서 ‘카이트’란 이름을 쓰지. 10년 전, 이 도시의 마법사들을 지옥과도 같은 악몽에 빠뜨렸던 공포의 살인마, 암귀. 그게 바로 너라면서.”

“…….”

“한데 그 정체는 놀랍게도 평범한 회사원.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보통의 남자, 유진 연. ……아마 다들 까무러칠 거야. 시에라시티 최악의 살인마가, 지루할 정도로 평온한 일상을 잔뜩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면, 그 갭에 참 신기해하겠지.”

그는 과장적인 제스처를 선보이며 말했다.

“그래. 평온한 일상. 평범한 인간 ‘유진 연’으로서의 인생. 그거야말로 네가 원하는 것 아닌가?”

“…….”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던데. 도시 이곳저곳을 마구 휘젓고 다니는 것도, 어울리지 않게 악당인 척하는 것도, 강해지기 위해 애쓰는 것도, 동료들을 모으는 것도…… 모든 게 그저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발버둥으로만 보여. 하찮기 그지없는 생존의 감성이 풀풀 느껴진다 이거야.”

나는 가만히 말없이 놈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는 지금 삶을 위해 죽음의 길을 걷고 있어. 물론 그건 나락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지. 이미 늪에 빠진 이상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욱 깊은 수렁에 잠겨 버리고 말 뿐이야.”

나는 항상 캐릭터를 키울 때마다 무조건 매력 스탯에 먼저 포인트를 올인해 만땅을 찍고 출발했다. <사이버판타지>에서는 그게 정석 공략이었다.

모두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 간단한 상황이 얼마나 사기적인 이점인지, 지금 이렇게 당사자가 되어 직접 체험하는 중이었다.

“네가 정녕 ‘유진 연’으로서의 평온한 일상을 원한다면, 지금처럼 ‘카이트’로 살아가서는 안 돼.”

“그림자가 너무 커지면, 언젠가 너 자신마저도 까만 땅거미 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테니까.”

놈이 하는 말에는 무언가 기이한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귀가 기울여졌다.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음표처럼 느껴져, 흡사 베토벤의 교향곡이라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방법은 있어.”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길.”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유일한 해답이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 레벨의 카리스마.

유클리드란 놈의 시커먼 속내를 훤히 다 꿰뚫어 알고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나는 귓구멍을 활짝 열어젖힌 채로 놈의 목소리를 양껏 받아들이고 있다.

“나한테 그 역할을 넘기면 돼.”

뱀의 혓바닥이 나를 옭아 온다.

어리석은 나는 저항하지 못한다.

“……뭐……?”

“간단해. 네가 이전에 ‘유클리드’ 행세를 했던 것처럼, 이제부턴 내가 ‘카이트’ 행세를 하는 거야.”

처음엔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했으면서도, 하지 못한 척을 했다.

“너 대신에 내가 ‘암귀’가 될게.”

직설적으로 던져진 한마디에,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허나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도,

생각 자체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달갑지도 않은 이중생활에 굳이 목매달 필요는 없잖아? 카이트란 신분을 버리고 평범하게 살아! 들키면 끝장인 살얼음판 인생에서 해방되는 거야!”

“…….”

“이쪽에서 선심 쓰는 것처럼 말하긴 했지만, 공짜로 암귀의 명성을 슬쩍하겠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야. 네가 포기하는 것들에 맞춰 그에 충분히 걸맞은 대가를 약속할게. 향후 어떤 식으로든 그쪽에 피해 가는 일은 절대 하나도 없게 할 거고.”

놈의 제안은 단순했다.

‘카이트’란 신분의 양도.

나는 그 이름을 버리고, 뒷세계에서 떠난다.

그 대신 유클리드 진이 새롭게 암귀가 된다.

만약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경찰의 추적을 받지 않는다.

갱스터들의 위협에서 벗어난다.

모르는 사람을 죽이거나 하는,

더러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

“어때?”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다.

거절하면 바보일 정도로.

―그래. 맞아. 무얼 망설이랴.

머뭇댈 것도 없이,

나는 입을 열었다.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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