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That’s Not Me (3)
“티, 팀장님……?!”
헛것이라도 본 줄 알았다.
그가 오늘 퇴원했다는 사실은 물론 알고 있었지만, 자기 집에 찾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몸은 좀 괜찮으세요, 스몰필드 씨?”
“아, 아니, 그, 저, 왜, 왜 오셨어요……?”
“왜긴요. 병문안 왔죠. 혹시 오면 안 됐나요?”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입원해 있는 동안 알게 된 건데, 아플 때 혼자라는 게 생각보다 엄청 외롭더라고요. 스몰필드 씨가 자주 병문안을 와줘서, 정말 너무 고마웠어요.”
은혜를 갚으러 온 것처럼 말하는 유진.
리타 스몰필드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은 고마움 따위 받을 만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
유진과 헬렌이 다친 것은, 병가를 낸 자기 대신 타이퍼를 살피러 <슐츠 업그레이드 센터>에 갔다가 테러에 휘말리는 바람에 벌어진 일 아니던가.
유진이 입원한 이유 역시 그동안 일을 너무 많이 해서였다. 그 또한 부하 직원인 자신이 모자란 탓에 평소 제대로 서포트해주지 못한 까닭이 컸다.
“저어, 회사는……?”
“오늘 할 일은 오전에 모두 마치고 왔어요. 거의 열흘 만에 복귀하는 거라 솔직히 좀 걱정했는데, 막상 회사 가보니까 별로 할 게 없던데요.”
“그런가요…….”
“스몰필드 씨 덕분이에요.”
싱긋 미소 짓는 유진을 보면서,
리타 스몰필드는 조금 안심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번만큼은 도움이 된 것 같아서.
“밥 안 드셨죠? 아파서 식욕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뭐든 먹어야 나아요. 레토르트지만 일단 치킨 수프랑 전복죽 같은 것 좀 사 왔어요. 그리고 이온 음료하고 과일 젤리도요. 냉장고에 넣어 뒀으니까 이따 꼭 챙겨 드세요.”
“아, ㄴ…….”
대답을 하려 한 순간.
꼬르륵―.
갑자기 뱃속에서 우렁찬 소리가 났다.
마치 애니메이션 효과음 같은 소리였다.
“지금 드실래요?”
“…….”
리타 스몰필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엌에 나간 유진은 조금 뒤, 전자레인지에 돌린 죽과 스푼이 담긴 쟁반을 들고 방에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한입 떠먹어 본 죽은 그럭저럭 맛있었다. 유진은 그녀가 식사하는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봤다.
“…….”
이상한 기분이었다.
폴리 보일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인 적이 없는 자기 방 안에, 유진이 있었다. 남자가 있었다.
“……?”
어라. 잠깐만.
지금, 방에 단둘이……?
“……#$@%?!!?!”
그제야 리타 스몰필드는 룸메이트 폴리 보일이 나가면서 보였던 음흉한 미소의 의미를 알아챘다.
‘으아악, 나, 나 지금 쌩얼인데!’
‘요즘 바빠서 방 청소도 못 했고!’
‘것보다 잠옷! 잠옷 입고 있잖아아!’
죽이나 먹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 또한 아니었다. 뭐 이제 와서 몸단장이라도 하리.
다만 본인이 현재 감정적으로 굉장히 부끄러운 모양새에 놓여 있음을, 여실히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스몰필드 씨.”
“……느ㅖㄲ?!”
유진이 대뜸 그녀를 불렀다.
“아까 그, 친구분께서 안내해 주셨는데요.”
“……아, 룸메이트인 폴리예요.”
“그분 풀네임이 어떻게 되죠?”
“……? 폴리 보일인데요.”
“그렇군요. 이름이 좀 특이하시네.”
그는 고개를 끄떡댔다. 어조는 그렇지 않았지만, 어쩐지 표정에는 알쏭달쏭한 진지함이 묻어났다.
“룸메이트분은 일하러 가신 건가요?”
“네에. 요 앞에 카페에서 파트타임 매니저로 근무하거든요. 오늘은 오후 시프트라고 했어요.”
“거기, 길 건너에 있는 털리스 맞나요?”
“아, 네. 맞아요.”
“스몰필드 씨가 커피를 잘 끓이시는 건 바리스타이신 룸메이트분 영향이 없잖아 있겠네요.”
“……으음, 그렇다고 봐야겠죠.”
“두 분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인가요?”
“……어렸을 때 같은 동네에 살았어요. 시에라시티 오고 나서도 지금까지 쭉 룸메이트였구요.”
“소꿉친구였군요. 둘이 무척 친하겠어요.”
“……네에, 뭐…….”
뭐랄까.
이상야릇한 분위기였다.
‘…….’
리타 스몰필드는 조금 언짢아졌다. 갑자기 폴리 얘기는 왜 꺼내고, 왜 계속 캐물어 보는 거지?
‘설마.’
마음에 들었다거나?
첫눈에 보고 반했다거나?
‘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야…….’
폴리 보일은 신비로운 은색 머리에 새하얀 피부가 돋보이는 절세미녀. 카페서 일하는 동안 손님들이 번호 따 갔다는 얘기를 그간 수도 없이 들었다.
더군다나 순혈 엘프. 평생 늙지 않는 장생종.
엘프의 아름다운 외모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오죽하면 현역 모델 중 50% 이상이 엘프일까.
게다가 유진은 아마도 이종족 취향이다.
예전에 그가 헬렌이랑 데이트를 하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었다. 헬렌은 부정했지만, 두 사람이 한때 그렇고 그런 관계였음은 정황상 틀림없을 터.
“룸메이트분, 귀를 보니까 엘프시던데.”
“…….”
“비너, 헬렌도 그렇고, 왠지 엘프는 죄다 얼굴 예쁜 사람밖에 없는 것 같네요. 참 신기하죠.”
이것 봐. 역시. 엘프가 취향인 거야.
리타 스몰필드는 순간 좌절할 뻔했으나…….
‘흡.’
이대로 가만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은 뭐라도, 어필을 해야만 했다.
“저, 저기요. 팀장님!”
“예?”
무슨 어필을 해야 할까.
생각은 깊게 하지 않았다.
“저, 저어…….”
필터를 거치지 않고서,
그냥 냅다 말을 던졌다―.
“저도, 사실, 엘프인데요……!”
….
….
정적.
침묵이 흘렀다.
“……예?”
유진은 물음표를 띄웠다.
리타 스몰필드는 자신이 뭐라고 내뱉었는지를 잠깐 되새겼다가, 곧 당황해서는 어버버 둘러댔다.
“아, 거짓말 아녜요! 저 진짜로 엘프 맞아요!”
“…….”
“쿼터거든요! 4분의 1! 외할아버지가 엘프예요! 그러니까, 그, 저는 쿼터엘프? 라고 해야 되나?”
“어, 저기, 진짜예요……?”
“진짜라니까요! 보세요! 귀 윗부분이 평범한 인간에 비해 살짝 길쭉한 느낌이 있잖아요? 그쵸?”
흥분해서는 자기 귀를 씰룩씰룩 흔들어 대는 자칭 쿼터엘프. 그걸 당황스럽게 지켜보는 유진.
“……아…….”
그즈음 리타 스몰필드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었는지를 뒤늦게 눈치챘다.
“스몰필드 씨, 혼혈 엘프셨군요.”
“…….”
“전혀 몰랐어요. 요즘은 이종족차별 철폐다 뭐다 해서, 회사 이력서나 사원 프로필 등지에 종족란 기입하는 게 아예 불법이잖습니까.”
유진은 자연스러운 담화로 어색한 상황을 다소 무마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영업 사원으로서 갈고 닦아 온 훌륭한 비즈니스 스킬이었다.
리타 스몰필드 또한 더 이상 무용한 어필을 하려 들지 않았다. 새빨개진 귀를 옆머리 속으로 얼른 감추고 나서, 그릇에 남은 죽을 조용히 퍼먹었다.
“설거지 좀 하고 올게요.”
“앗, 아뇨, 그냥 놔두세요. 이따 제가…….”
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쟁반을 들고서 그대로 부엌으로 나갔다. 설거지하는 소리와 그릇 정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잠시 동안 혼자 남은 방에서, 리타 스몰필드는 침대머리에 가련히 등을 기댄 채, 유진이 가져다준 디저트 젤리를 깨작깨작 앞니로 깨물어 먹었다.
‘아무한테나 저렇게 다정한 걸까.’
좋은 사람이다. 옛날에는 안 그랬으나, 지금 모습이 진짜 모습이란 건 콩깍지 쓰고 봐도 안다.
진짜 좋은 사람은 누구에게라도 사람 좋게 행동한다. 좋은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런 점은 왠지 조금 별로네.’
속물 같은 생각이지만,
특별한 존재이고 싶었다.
‘욕심이겠지. 나도 알아.’
이것은 그저 일방통행일 뿐인 감정이다.
지금껏 살면서 누군가와 그런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어서, 아무 때나 괜히 심쿵하고 혼자 착각하고 그랬다. 어쩌면 이 감정조차도 착각일지 모른다.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지만,
그건 아마 내가 아닐 것이다.
“이만 가볼게요. 스몰필드 씨.”
“몸조리 잘하시고, 회사에서 뵙시다.”
유진은 곧 그녀의 집에서 떠났다.
리타 스몰필드는 이불을 덮고 누웠다.
“휴우.”
열이 조금 내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옆이 허전해졌지만, 아침때보다 포근했다.
만약 내일도 아프다면,
팀장님이 또 와주려나―.
그런 어린애처럼 몹쓸 생각을 하면서.
배시시 웃음 짓고는, 홀로 잠이 들었다.
***
스몰필드 씨의 병문안을 마친 뒤.
나는 곧장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맨션 앞 도로 건너편에 있는 작은 카페.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계산대에 서 있던 여직원이 금세 나를 알아보고 반응했다.
“어라, 병문안 오신 리타 상사분?”
“…….”
“벌써 돌아가시는 거예요? 리타 요 기집애, 기껏 판 깔아줬더니만 그걸 못 꼬시냐……. 아니,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것보다 주문하시겠어요?”
여직원은 명랑하게 웃어 보였다.
스몰필드 씨의 룸메이트. 폴리 보일.
“카푸치노. 중간 사이즈로 두 잔.”
“한 분이신데, 두 잔 맞으신가요?”
그녀가 물었고,
나는 바로 말했다.
“한 잔은 당신 거야.”
잠시 침묵.
“으음, 손님?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출근한 지 한 10분 정도밖에 안 됐걸랑요? 헌팅 시도는 참 고마운데, 이러면 친구한테 미안해지기도 하고…….”
“연기는 집어치워. 당신 나 알잖아.”
거칠게 내리깐 목소리로 말하며,
위협하려는 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나도, 당신이 누군지 알지.”
위로 치켜뜬 오렌지색 눈동자.
눈처럼 하얀 머리칼을 가진 엘프.
“알리시아 벨카폴리아.”
고대 아르카나 마법의 계승자이자,
<나인서클>의 제5원. 일류 대마법사.
“아니면 ‘세실리아 화이트럼’이라 불러야 하나?”
“…….”
“당신이지. 타이퍼 속에 있던 마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의 변화도 일체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신이 신분을 숨긴 채 일반인인 척 살아간다는 사실은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어.”
게임 속에서 알리시아 벨카폴리아는 ‘폴리 보일’이란 이름의 아이템 샵 NPC로 등장한다.
문제는, 등장하는 가게가 항상 랜덤으로 바뀐다는 점. 그래서인지 현실인 이쪽 세계에서도 그녀를 찾기는 어려웠다. 단서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설마 지인의 친구일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나한테 관심을 보여 접근했던 인물이, 알고 보니 내 주변에 있었을 거란 사실은 놀라울 것도 없지.
“거실에 있는 노트북에 해킹 툴이 깔려져 있더군. 부업으로 안드로이드 해킹이라도 하셨나?”
“…….”
“그때 타이퍼 속에 들어가서 날 살려줬지. 녀석의 몸으로 아르카나 마법을 썼잖아. 그렇지?”
부추기듯이 물어봤다.
직접 답을 듣고 싶었다.
“당신이잖아. 날 구해준 사람은.”
드디어 찾아낸 마녀에게,
어떻게 해서든 들어야 했다.
….
….
기나긴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