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That’s Not Me (2)
….
….
한밤중의 어두운 병실.
누군가 침대에 누워있다.
어깨를 살짝 넘기는 검은 머리에,
보라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소녀.
소녀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무어라 속삭였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일까.
내 손에는 칼 한 자루가 쥐여져 있었다.
칠흑처럼 빛나는 날을 가진 검은 단검이.
칼을 들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 온 것처럼.
일말의 망설임과 후회도 없이,
침대에 누운 소녀의 심장을―
“허억.”
눈을 떴다.
하얀 천장이 보였다.
익숙한 약품 냄새. 조금 건조한 공기. 입고 있는 환자복은 식은땀에 젖어 조금 축축한 상태였다.
“…….”
입원한 뒤로 매일 같은 꿈을 꾼다.
디테일은 매번 조금씩 다르지만, 무척이나 생생하다. 직접 겪었던 일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어쩌면 ‘유진 연’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나는 알지 못하는 나 자신의 과거의 기억.
흘러간 꿈의 내용을 되짚어 보았다.
꿈속의 소녀는 내가 아는 사람과 닮은 얼굴이었다. 닮았다기보다도 거의 판박이에 가까웠다.
<에덴 파크 모텔> 210호에 사는 이웃.
엄마 행세를 하는 뱀파이어 여자, 메리.
병실에 있던 소녀는…… 그녀인 걸까?
어째서인지 꿈의 마지막 장면만은 항상 기억에서 지워진다. 손에는 칼 같은 걸 들고 있었는데, 내가 그걸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는 결국 알 수 없다.
“후우.”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떴다.
벽면의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 중이었다. 오후에 검사가 있어 오늘은 점심밥이 나오지 않는다.
병원 생활도 어느덧 벌써 일주일째.
침대에 누워 절대 안정을 취할 뿐인 지루하고 평안한 나날들을 그저 하릴없이 보내는 중이다.
솔직히 안락하다. <슐츠텍>에서 치료비 전액을 지원해준 덕분에 어디 회장님마냥 개인실까지 쓰고 있고, 올해 처음으로 받은 장기 휴가니까 말이다.
그동안 할 일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예상치 못했던 장기 입원으로 인해 일상에 거대한 공백이 생겨 버려,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곳저곳에 바삐 연락을 돌려야 했다.
「입원하시는 겁니까?」
“으응, 그렇게 됐어. 최소 일주일은 있을 것 같으니까, 그동안 애들 관리 잘 부탁한다. 애런.”
「알겠습니다. 카이트 씨가 복귀하실 때까지 아무 문제 없도록 하겠습니다. 쾌차하십시오.」
「암귀가 과로로 입원? 푸핫! 개웃기네.」
“아무튼, <헬터 스켈터> 쪽은 애런한테 맡겨 놨어. 지나 너는 아리엘이랑 보육원만 좀 챙겨 줘.”
「오케이, 썰―. 몸 남는 거 있으면 보러 갈게.」
「헐? 아저씨 어디 아파요? 암 걸렸어요?」
“아뇨, 그냥 조금 쉬는 거예요. 저 없을 때 메리가 방에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대신 얘기 좀 해주세요.”
「210호 언니 말이죠. 알았어요. 빨리 나아요.」
면회도 은근히 자주들 찾아왔다.
애런, 지나, 아리엘, 페니, 사장님, 그루너 씨……. 특히나 스몰필드 씨는 안 그래도 혼자 회사 일을 도맡아 하는 중이라 무지막지 바쁠 텐데도 하루에 한 번은 꼭 들렀다. 날 부담스럽게 만들려는 신종 괴롭힘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쪽 세계에서 ‘유진 연’으로서 보낸 6개월.
그동안 꽤 많은 인연을 쌓아 왔구나 싶었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잘살고 있는 거려나.
뭐, 아직까지는 사지 멀쩡히 살아는 있으니.
어쨌든 참 발버둥 치면서 열심히도 달려왔잖나.
가끔씩은, 이렇게 쉬어주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
입원 9일째.
비너스가 병실에 찾아왔다.
“하이욤.”
휠체어에 앉은 채 손을 흔드는 녀석.
전치 6주치고는 묘하게 쌩쌩해 보인다.
“뭐야. 여긴 왜 왔냐.”
“심심해서요. 인기 짱인 누구 씨랑은 다르게 저는 면회 와 주는 사람도 거의 없단 말이에요.”
아주 자랑이랍시고 떠들어 댔다.
보통 같으면 무시하고 그냥 내쳤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마침 할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너, 그때 <슐츠 업그레이드 센터>에서 그 마법 쓰는 안드로이드한테 공격받았다고 했었지.”
“넹? 아, 그쵸. 깡통이도 옆에 있었구요.”
슐츠텍 연구소를 노린 의문의 테러 사건.
본래 게임상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 즉, 내가 개입함으로써 발생한 일종의 무작위 이벤트다.
테러범이 노린 것은 나.
혹은, 내 주변의 누군가.
“그 로봇들은 분명 콘스탄틴의 복제품이었어.”
“……알아요. <나인서클>의 기계해골 말이죠.”
위저드로이드 콘스탄틴은 <나인서클>의 제7원, 마법공학의 대가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의 발명품.
복제품 역시 바르베이라의 것이라 한다면, 이번 테러를 일으킨 범인은 그녀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리고,
테러의 목적은―
“아마도 너일 거야. 비너스.”
“…….”
“연구소를 습격한 안드로이드들은 개체 하나하나가 최소 가이우스급은 될 정도로 강했어. <부름>을 쓰기 전의 나조차도 상대가 안 됐는데, 완드도 없는 네가 놈들과 일대다로 붙고도 끝까지 목숨을 부지했지. 일부러 살려 놨다고밖에는 설명이 안 돼.”
비너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놀란 기색은 없었다. 보아하니 자기도 어느 정도 그럴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거 실화 맞아요? 저 옛날에 쓰던 완드도 바르베이라 시그니처였는데. 아니, 대체 그 미친 여자가 날 왜 노려요? 말도 안 된다구요, 진짜…….”
“착잡하겠네. 우상한테 노려지는 기분이라니.”
“저기요, 유진 씨? 저 지켜줄 거죠? 그쵸? 지켜주는 거 맞죠? 나 몰라라 쌩까진 않을 거죠? 네?”
“지켜주고 자시고, 어차피 네가 타겟이 됐다는 건 나도 이미 그쪽 레이더에 포착돼 있단 소리야.”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의 구체적인 속내는 모른다.
어쨌든 간에 <나인서클>의 대마법사가 나와 적대하게 됐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것도 둘씩이나.
“그, 그래도, 유진 씨한텐 <헬터 스켈터>랑 <블랙 대거즈>가 있잖아요? 도그아이드 킴도 같은 편이고, 거기다 유진 씨는 그 뭐냐, 암귀니까!”
“바르베이라 테르마옌은 민간군사기업 <카이젠> 회장이잖아. 인력으로는 그쪽이 몇십 배는 더 우수해. 김씨는 동료라고 하기엔 아직 좀 애매한 데다, 나는 암귀인 척하는 초짜 흑마법사일 뿐이야. 저쪽에서 그럴 맘만 먹으면 우리들 따윈 하룻밤도 안 돼서 몰살이란 얘기지.”
상대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세계 최강의 존재들 중 하나. 강함의 단위부터가 애초에 다르다.
“그, 그럼 어떡해요?”
“편을 먹어야지. 가급적 든든한 친구랑.”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군이 더 필요했다.
“예를 들면…….”
<나인서클>에 대항할 수 있는 존재는,
같은 <나인서클>의 일원 말고는 없겠지.
“알리시아 벨카폴리아.”
제5원. 벨카폴리아의 마녀.
고대 아르카나 마법의 계승자.
“비너스 너, 알리시아랑 같은 엘프 마을 출신이라고 했지? 그, <아이에르 비트>였나?”
“뭐어, 맞아요.”
현대의 몇몇 엘프 부족들은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종족의 전통성을 중시하여,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된 세계수 삼림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스스로를 진정한 숲의 요정, ‘하이엘프’라 칭한다.
<아이에르 비트>는 그중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엘프 공동체로, 제5원 알리시아 벨카폴리아를 포함한 수많은 대마법사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거긴 뭐랄까, 공동체주의의 낙원 같은 곳이라서요. 엥겔스나 마르크스가 참 좋아할 법한 사회였죠.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뭐 그런 표어가 당연한 곳이었으니, 암튼 참 구렸어요. 마을을 나간 사람에게도 예외는 없어서, 저는 상경한 지 5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명절 때마다 고향발전기금 독촉 연하장이 날라 오곤 한다니까요.”
“알리시아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지?”
“글쎄요. 세대가 달라서 잘은 모르지만, 10년 전 계승식 즈음에 마을 출신들끼리 드문드문 들려온 소문은 있었죠. 요약하자면, 계승자로 낙점됐던 알리시아가 원로회에 대판 들이받고는 마을이랑 손절 쳐서 빠이빠이 했다는 얘기였어요. 사실은 진짜 계승자가 따로 있었다나 뭐라나―.”
아르카나 마법의 계승이 원래는 그녀가 아닌 다른 이의 것이었어야 했다는 그 소문은 세간에도 널리 퍼져, 계승식 이후 알리시아 벨카폴리아는 ‘가짜 마녀’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을 얻게 됐다고 한다.
콤플렉스를 가진 마녀. 고고한 하이엘프의 여왕.
고물 로봇 타이퍼의 몸에 들어가 나에게 마법을 가르쳐준 스승이자, 위기로부터 나를 구해준 은인.
정말로 그녀가 맞을까?
왜 나를 도와주는 걸까?
만나서 물어보고 싶다.
직접 대답을 듣고 싶다.
허나 게임에서 알리시아를 만날 수 있는 것은 플레이어 캐릭터가 <나인서클>에 들어갔을 때뿐.
……으음. 당장은 아무래도 무리.
가만있자, 미르각시와 좀 더 친해진다면 알리시아와의 만남을 주선해 볼 수 있으려나?
괜찮은데.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용님이 저번에 말했지. 자기한테 마법을 배우고 싶다면, 내 예전 마법 스승을 자기 앞에 데려오라고.
“퇴원하면 할 일이 생겼군.”
하고 싶은 얘기가 정말 많다.
만나게 된다면, 얘기할 수 있겠지.
***
웨스트록 6구역.
잭슨 빌리지 아파트.
“……네에, 사장님…… 몸살이 심해서…….”
침대에 누운 리타 스몰필드는 휴대전화를 붙잡고 죽어가는 다람쥐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죄송해요. 병가를 자주 내서…….”
「어허, 괜한 소리 말게, 리타 양. 일하느라 아픈 걸 누가 나무라겠나? 유진 군이 드디어 오늘 퇴원한다고 했으니, 자네는 안심하고 푹 쉬도록 해!」
“……네에…….”
전화를 끊은 뒤, 참아 왔던 기침을 콜록콜록 쏟아냈다. 눈앞이 핑 돌더니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심장 뛰는 소리에 맞춰 통증이 거세졌다.
열이 너무 높아 식은땀이 도로 금방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리타 스몰필드는 말라붙은 입술을 미지근한 물로 조금 적시고서, 다시 자리에 누웠다.
“……하아아…….”
세 명이서 처리하기도 버거운 양의 업무를 장장 10일간 고군분투하며 홀몸으로 소화했으니, 원체 몸이 약한 그녀로서는 탈이 나는 것도 당연지사.
다행히 어제까지 해야 할 일은 모두 마친 상태였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회복이 늦어진다면 또 회사에 폐를 끼칠까 봐 그것이 걱정이었다.
….
….
점심시간이 다 지나고.
오후 1시쯤이 됐을 무렵.
“리타?”
방문을 열고 누군가 안에 들어왔다.
그녀의 룸메이트― 폴리 보일이었다.
“몸은 어때? 좀 괜찮아?”
“……으응. 아까보단…….”
“나 슬슬 출근할 건데.”
“……그래. 다녀와…….”
“근데, 지금 너 병문안 온 사람이 있거든?”
……병문안?
리타 스몰필드는 누운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들어오라고 말할게. 둘이 알아서 해~.”
어쩐지 폴리 보일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능글맞게 웃는 것이 뭔가 장난기로 넘쳐흘렀다.
……알아서 하라니, 뭐를?
폴리 보일이 나가고 나서 잠시 후.
리타 스몰필드의 방에 들어온 것은―
“실례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인물.
금발에 정장을 입은 청년, 유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