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Take the Power Back (4)
신기한 기분이었다.
금기를 깨뜨린 죄악감도, 다짐을 어긴 죄책감도 없었다. 휘몰아치는 악몽의 구심점에 있으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마음 한구석이 평온했다.
구름 위에 올라타 있다기보다도,
구름 그 자체가 되어 있는 듯한 기분.
<부름>의 힘은 어김없이 폭주를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군체의 크기는 감당이 안 될 수준으로 거대해졌고, 제멋대로 날뛰는 벌레들이 이젠 나까지 갉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제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가?
제어할 필요는 없다.
날뛰게 내버려 두면 된다.
때로는 맹렬하게 달려드는 들소를 붉은 깃발로 제압하는 투우사처럼.
때로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가벼운 손짓만으로 조율하는 지휘자처럼.
아찔한 힘겨루기와 조화로운 협주를 반복한다.
우위에 선 존재는 없다. 자연스러운 팀플레이. 혹은 엉망진창인 깍두기판. 아무래도 상관없다.
감각 속에 고양된 욕망이 가득 들어찼다.
의식을 초월한 전율이 무의식을 지배했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무엇도 중요치 않다.
지금이라면 나는 분명,
악마라도 될 수 있었다―.
***
벌레는 모든 것을 잡아먹는다.
가리는 것은 없다. 닿는 대상은 모조리 먹잇감. 잡아먹힌 존재는 존재 자체가 그대로 지워진다.
가장 좋아하는 먹이는 바로 ‘마력’이다.
우주에서 가장 신비하고 기묘한 에너지. 이 세상 모든 창조와 파괴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힘.
오랜만에 태어나 가뜩이나 배가 고팠던 벌레들에게 있어, 때마침 쏟아진 고위 마법의 연격들은 딱 좋게 차려진 만찬, 그야말로 황홀한 식탁이었다.
―캬학! 캬하학!
―크카카카카카캬칵!
처음에는 아껴먹듯 조금씩 갉아먹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순식간에 모조리 다 먹어 치웠다.
생각지도 못했던 격렬한 폭식에 행복해진 벌레들은 저마다 울부짖듯 흉측한 괴성을 내질렀다.
―키케케켁! 크카키키키켁!
자색 군체는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하더니 이내 폭죽처럼 터지며 사방으로 흐트러졌다. 보랏빛 곰팡이가 허공의 이곳저곳에 길고 촘촘하게 손길을 뻗쳤다. 그렇게 지하의 광활한 공간을 잠식했다.
실로 괴악하고 불결한 광경이었다. 목전에 드넓게 펼쳐진 죽음. 귀를 괴롭히는 끔찍한 소음. 마치 미니어처로 표현된 우주의 종말을 보는 듯했다.
「전투 경과 확인. 시뮬레이팅 시작.」
「승리 확률 계산 완료. 현재 21.2%.」
「오류. 잘못된 접근입니다. 시스템 재시작 권장. 격도 조정 실패. 긴급. 바이러스 체크 권장.」
그리고 그 무렵, 3체의 안드로이드는 전기로 된 악몽을 꾸고 있었다.
연산 과정의 오류. 프로그램의 오작동.
컴퓨터는 끊임없이 최악의 결괏값만을 도출해냈다. 악마의 씨가 시스템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격도 조정 불가.」
「도주 요청 불가.」
「상황 지연 불가.」
도대체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이 정답일까.
사람이었다면 생을 포기하고, 그저 가만히 엎드려, 혹 있을지도 모르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을 터. 그것은 필연 최선의 판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과 확인.」
그리고,
AI가 내린 결론은…….
「전투를 재개한다.」
죽음으로의 무모한 걸음마.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임무를 완수한다― 이외의 다른 경우의 수는 애초에 입력될 수조차 없었다.
「다중 시전 개시.」
흑마법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마법은 마법.
마력과 술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만은 변치 않는다. 고로 <해체 술식>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마나 결합 구조 파악.」
「술식 조립 공식 파괴.」
로봇들은 동시에 움직였다.
영창을 포함한 고도의 연산.
「<해체 술식> 연성.」
그 과정의 결과는 언제나와 같다.
마법은 분해되고, 그대로 어스러진다.
―카가각. 카각.
효과는 있었다. 자색 군체의 끝자락 일부분이 <해체 술식>에 의해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해체 술식>은 일반적인 마법과는 달리 마나를 내포하지 않았다. 따지고 본다면 그것은 관성을 이용한 기술, 일종의 물리 법칙 활용에 가까웠다.
때문에 <부름>으로는 그것을 막을 수 없으리라 보았고, AI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이대로만 간다면 <부름>의 요새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었다.
평범한 <부름>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카인 나호르.”
몰락해 가는 요새의 한가운데서.
흑마법의 본체, 유진이 속삭였다.
“<강화>.”
심장이 떨리듯, 대기가 살며시 떨렸다.
주인의 부름에, 벌레는 기껍게 호응했다.
두근―.
작은 고동과 함께,
블랙홀이 피어났다.
빛과 중력. 우주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공간의 비틀림. 물리 법칙마저도 잡아먹는 탐식의 괴물.
난장판과도 같았던 지옥은 이제 없었다. 대신에 선명한 검은색 죽음이 그곳에 자리했을 뿐이다.
「전투 경과 확인. 시뮬레이팅 시작.」
<해체 술식> 따위는,
더는 먹히지도 않았다.
「승리 확률 계산 완료. 현재 0.0%.」
***
지하 B2 플로어.
비상 거점 대피소.
“뭐, 뭐야, 지진인가……?!”
거센 진동이 몇 번씩이나 지반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있을 동안, 알랭 그루너는 위층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미스터 연. 들립니까?”
그는 무전기에 대고 다급한 목소리로 유진을 불렀다. 그러고 나서 한참 뒤에야 답신이 돌아왔다.
「……예에. 들립니다…….」
“무사하십니까? 그쪽 상황은 어때요?”
「……침입자 격파했습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예상치 못했던 호재였다.
“맙소사, 그게 정말입니까?”
「……완전 안전해진 건 아닙니다. 해킹당한 안드로이드들은 아직 다 처리하지 못해서…….」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략적인 상황도 파악했으니, 이제부터는 이쪽에서 처리하겠습니다.”
「……다행이네요. 제가 지금 좀 한계라…….」
“당장 지원을 보내겠습니다. 위치가 어딥니까?”
「…….」
“미스터 연?”
통신 불량인 걸까. 아니면 다른 문제일까.
유진으로부터의 연락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젠장, 보안팀! 서둘러요! 움직여야 합니다!”
“자, 잠깐만요, 치프. 곧 외부에서 구조대가 들어올 텐데, 굳이 저희가 위험하게 나설 필욘…….”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B1 플로어에 목숨 걸고 올라간 그를 그냥 내버려 두잔 건가요?”
“이쪽도 급하잖습니까. 지금 안 그래도 엘리베이터 쪽을 지키고 있는 인원이 턱없이 부족한데, 위층으로 지원을 보냈다가 방어가 뚫려 버리면 대피소에 있는 사람들까지 전부 위험해집니다.”
빌어먹게도 맞는 말이었다.
경비 병력을 함부로 돌릴 수는 없었다. 지금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피난민들의 안전이다.
“젠장할…….”
알랭 그루너는 주먹을 꽉 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유진은 자신이 한계라고 전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였다. 정녕 그를 도울 방법은 없는 것인가?
“치프!”
그때.
보안팀의 다른 직원이 그를 불렀다.
“지, 지금 외부에서, 시설 내부의 시스템에 해킹 시도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예상치 못했던 악재였다.
“제기랄! 이제야 겨우 일부 시스템을 안정화시켜 놨는데, 해킹범이 또 안에 쳐들어왔단 겁니까?”
“그, 그게…… 아닙니다…….”
“뭐라고요?”
“이번에 해킹을 시도한 건 다른 사람 같습니다. 뭔가 허술해요. IP까지 대놓고 공개하고…….”
“무슨 소립니까, 그건? 이런 시국에 도대체 누가 우리 시스템을 해킹하려 하고 있다는 건데요?”
“인트라넷 방화벽을 못 뚫었는지, 메신저로 계속 메시지를 보내오고는 있는데요. 그…….”
해킹을 시도한 자의 메시지는 딱 네 글자였다.
HELP
그것은 도와달라는 의미일까?
아니면…… 도와주겠다는 걸까?
“어떡할까요, 치프?”
“…….”
그 도움의 손길은 왠지 꺼림칙했다.
당연하지만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에게 권한을 부여해주세요.”
고심 끝에―
알랭 그루너는 결단을 내렸다.
“뭘 하려는지 한번 지켜나 봅시다.”
***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부름>을 쓴 여파였다.
“……스읍…….”
벌레들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타협은 해냈다. 녀석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맛 좋은 먹이. 마법을 쓰는 안드로이드는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진미였을 테니 꽤나 만족했겠지.
다만, 타협의 과정이 너무나도 험난했다.
내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벌레가 갉아먹은 자국이다. 그것만큼은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지난번처럼 끝없이 폭주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루는 요령을 터득한 덕이다. 내 몸을 간식으로 조금 바치는 것도 그 요령의 일부고 말이지.
흑마법을 내 것으로 만들었지만,
마냥 기뻐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철컥. 철커덕―.
기계 관절이 움직이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최소 30기가 넘는 <슐츠텍>의 경비용 안드로이드들이 빨간 눈을 번쩍거리며 나를 둘러쌌다.
「침입자 발견.」
「제거한다. 제거한다.」
놈들이 총구를 내게 들이밀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저항할 힘이 없다.
“……하…….”
이런 결말은 좀 너무한데.
기껏 각성했는데 딸피가 돼 버려서 결국 잡몹한테 마무리 일격을 받는다니, 뭐가 이리 허무해.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낸다면 다시 한번 더 <부름>을 쓸 수는 있을 테지만.
그때는 방금처럼 폭주를 막을 자신이 없다. 그때야말로 우주의 멸망이 시작될 것이다.
“……나 혼자 죽는 게 낫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때쯤에 들려온 것은.
「들립니까? 미스터 연?」
주머니에 넣어 둔 무전기.
그루너 씨의 목소리였다.
「지금 그쪽으로 지원을 보냈습니다.」
「민간 측의 조력자가 메시지를 보냈는데.」
「의미는 모르겠지만 전달해달라고 하더군요.」
「당신이라면 알아들을 거라면서 말이죠.」
그는 또박또박 읊었다.
뭔지 모를 일곱 음절을.
「나니니시마스까.」
순간.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파아아아앗―.
새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경비용 안드로이드의 총에서 발사된 펄스 캐논이었다. 그 살벌한 백색광이 오롯이 나를 감쌌다.
아, 죽는구나, 싶었던 그때.
뭔가가 내 앞으로 날아왔다.
「목표 지점 착륙.」
그리고.
착지했다
「에어리얼 디텍션 필드 전개.」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무수하게 쏟아져 나온 캐논 광선의 빗줄기가 나를 향해서 날아들었지만, 그 어떤 것도 내 몸에 닿지 못했다. 모두 보이지 않는 막에 가로막혔다.
느닷없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인형 같은 생김새의 안드로이드.
「시스템 확장 동기화 100% 완료.」
「운영체제 업데이트. TYPE-R. 기동.」
어깨에 살짝 닿는 금발 머리.
치마 옆 자락이 한 갈래로 북 찢어져 다리와 가터벨트가 드러나는 빅토리아풍 메이드 복장.
「주인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강철 날개를 달고 있는 천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타이퍼……?”